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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라! 신앙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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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란희 [iris2005] 쪽지 캡슐

2012-04-04 ㅣ No.486


저항하라! 신앙의 이름으로

[삼성물산 앞 마지막 거리미사 강론-정만영 신부]

삼성이 없어도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는다..학습된 무력감에서 벗어나야



2012년 04월 02일 (월) 16:42:41 한상봉 기자 isu@catholicnews.co.kr
 

 

지난 3월 12일부터 삼성물산 앞에서 봉헌된 '구럼비 살리기' 생명평화미사가 성주간을 앞두고 30일로 마무리되었다. 미사 제안자였던 정만영 신부는 이날 미사 강론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반평화 세력에게 저항하며 무력감을 극복하자"고 촉구했다. 그 전문 싣는다.   -편집자




매맞는 여성 증후군처럼..학습된 무기력
 


평소에 남편에게 매 맞고, 오랫동안 가정불화가 있던 부인이 술 먹고 잠든 남편을 목 졸라 살해해서 체포된 기사를 신문에서 읽는다. 또한 의부나 친부에 의해 오랫동안 성폭력에 시달려온 어린 청소년 여성이 살인을 저질렀다거나, 혹 자살 미수에 그쳐서 그 사실이 알려졌다든가, 경찰에 신고된 이야기들을 뉴스나 신문기사를 통해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 나는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솔직히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 특히 남편에게 매 맞는 여성들이 왜 지속적으로 매 맞고도 이혼하지 않는가? 또는 왜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을까?


혹시 여러분 중에 ‘매 맞는 사람 증후군(battered person syndrome)’ 혹 ‘매 맞는 여성 증후군’이란 단어를 들어 보신 분이 있을까? 워커라는 학자는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의 실험과 ‘학습화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이란 이론을 예로 들어 “왜 매 맞는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학대자로부터 도망가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셀리그만의 실험에서, 실험쥐들에게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전기충격을 반복적으로 가하였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쥐들에게 도망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전기충격을 주어도 도망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즉 여자가 한두 번 고통을 당하다보면 ‘어차피 반항해 봐야 더 맞는 걸’ 하며 시간이 흘러 지나가기만 기다리게 된다. 그러는 사이 무기력이라는 것이 학습되어 개선의 시도나 희망도 버리게 된다고 한다. 워커에 의하면, 반복적으로 맞는 여성들과 여러 형태의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도 셀리그만 실험의 쥐와 유사한 심리적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미사가 마치지만,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김선기
 


이명박 정부와 삼성에 의해 학습된 집단적 무기력

현재 한국사회는 폭력에 노출된 ‘매 맞는 사람 증후군’과 그로 인한 ‘학습화된 무기력’이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지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민들은 수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왔다. 그 지속된 폭력에 의해 국민들이 집단적으로 ‘학습화된 무기력’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든다. 


광우병 파동과 촛불시위, 그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과 신 공안정국. 이 와중에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용산참사로 1명의 경찰관과 5명의 가장이 목숨을 잃었다. 더불어 광우병 파동과 관련해 MBC PD수첩 작가들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기소(주임검사는 결국 사직을 했다)와 사생활 침해가 있었고, 언론장악을 위해서 KBS 정현주 사장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로 불구속 기소하였으나 무죄로 판명났다. 또한 BBK와 관련된 검사뿐만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지휘했거나 관련된 검사들, 한명숙 씨를 기소한 검사들은 다들 소위 영전하고 출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근에 밝혀진 가장 큰 사건은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이다.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민간인 사찰 총 2,619건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전 사회분야다. 그리고 몸통으로 청와대 이명박 대통령이 지목받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어디에 있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한 검찰은 어디에 있는가? 의문이 든다. 


또한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서기까지 얼마나 민주적인 절차가 이루어 졌는가? 천여 명의 마을 인구 중 87명이 참석하여 찬반 논의도 없이 박수로 결정하고, 절대보존지역의 해제, 불법 펜스, 철망, 공유수면매립지에 대한 출입금지가 이어지고, 선박검사도 받지 않고 불법으로 두 차례에 걸쳐 케이슨을 투하한 삼성물산의 바지선이 들어온다. 


그뿐인가, 삼성의 횡포와 뻔뻔함에 대해 국민들은 무기력해지고 있다. 지난번에 내가 왜 삼성물산 앞으로 왔는지 묻는 이들이 있었다. 삼성은 2007년 태안에서 전대미문의 해양 오염사고를 내고도 삼성중공업은 단 56억 원내에서 책임을 지고자 했다. 여론의 비난이 심해지자 삼성중공업이 내기로 한 태안발전기금 1000억 원은 지금까지 한 푼도 집행되지 않았다.
삼성전자 계열사 등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직업병이 137건이 보고되었으며 백혈병과 희귀질병으로 3월 현재 53명이 숨졌고, 지금도 투병 중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그린 FTA의 밑그림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의료체계를 무시하고 영리법인을 설립하려 하고 있으며, 또한 몬산토라는 다국적 종자회자와 합작을 통해 ‘유전자조작식품’(GMO)을 서산에서 생산하려 하고 있다.
4대강 사업에서 삼성물산은 7,302억원으로 1위로 삽질했다. 구럼비에서도 삼성물산은 사업비 3,007억으로 역시 1위로 무수한 생명을 죽이고, 하느님의 피조물을 파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삼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위험한 기억을 하자
 
   
그리스도인들은 쪼개진 면병 안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경험한다. ⓒ김선기
신학자 메츠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로마의 억압구조에 대한 예언자적인 항거의 죽음, 곧 정치적 죽음이었고, 이 죽음은 불의한 정치체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기억”(The Dangerous Memory of the Death of Jesus Christ)이라 했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이 “위험한 기억”에 의해 형성되고 그것에 의해 살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의 삶은 고난당하는 이들의 연대 속에서 잘못된 정치구조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특징지어지는 정치적 삶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지난 3월 26일, 이곳에서 남승원 신부님은 디트리히 본회퍼가 한 말을 인용하셨다. "나치가 집시를, 공산당을, 유대인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었습니다. 마침내 나치가 나를 잡아가려 할 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첫째로 이명박 정부의 악행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 삼성에 대해 기억해야 한다. 이 두 검은 쌍두마차가 저질렀던 불법·탈법·편법을 기억하자. 이 기억은 이명박 정부와 삼성에게는 ‘위험한 기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위험한 기억’은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 어둠의 세력들에 대해 우리가 침묵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침묵했던 결과는 무엇인가? 그 침묵의 결과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침묵의 대가를 이렇게 오늘 이 거리에서 치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 다시 이렇게 거리에 나오기를 원하는가? 그 대가를 나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에서 찾고 있는가?


그리고 저항하라



93세에 다다른 레지스탕스 투사,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이 34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 한권을 냈다. <분노하라>(Indignez-vous!) 에밀 졸라의 <나를 고발하라!>라는 책만큼이나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으며 200백만 권이 판매되었고 세계 각국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는 ‘누구에게 분노해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가 명령하며, 누가 결정하는가?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흐름을 샅샅이 구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의 상대는 작은 무리의 특권계층이 아니다. 우리가 상대해야할 것은 광활한 세계이며 그 어느 시대보다 강력하게 상호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강력하게 요청한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 말이다.
그가 관심을 가지도록 요청하는 일은 첫째로 극빈층과 최부유층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둘째는 인권, 그리고 지구의 현재 상태에 관심을 돌려야한다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호소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소비,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지나친 경쟁만을 강조하고 부추기는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엔지 젤터는 바로 이 책처럼 저항한 사람이다. 그분은 강정마을에서 구럼비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 이름과 국적을 묻는 경찰에게 “내 이름은 구럼비, 강정에 살던 세계시민”이라고 대답하였다. 


1944년 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던 때에 15세의 헝가리인 소년 엘리저 뷔젤(Eliezer Wiesel)이 있었다. 그는 수용소에서 학살되지 않고 살아남은 몇몇 생존자 중 하나가 되었다. 그가 지은 <Night>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 자신이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어린 소년이 교수형 당하는 것을 지켜보도록 강요당했던 아주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한 기록이 있다.
두 명의 성인들은 “이제 자유로운 곳에서 영원히 살겠소” 하고 외치며 죽었다. 그러나 아이는 1시간 30분 동안 매달린 채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죽는 사람도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것 역시 대단한 고통이었음은 틀림없다. 그 때에 뷔젤은 자기 뒤에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계시다는 말인가” 하고 숨죽여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때 뷔젤은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서 그에게 대답하는 이런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바로 여기에 계신다. 그는 여기 이 교수대에 매달려 계신다.”


“하느님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계시다는 말인가”라는 의문과 절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만 해당되는 질문인가? 아니다. 지금 여기서도, 정부의 폭력과 거대 자본의 횡포가 횡행하는 이 한반도에서도 유효하다. 더 밀접하게는 구럼비가 파괴되는 이 순간, 십자가의 길과 길거리 미사를 드리는 이 자리에서도 여러분과 내가 던지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이미 개인적으로 대답을 하시기도 했다.


이 미사에 참여하는 한 분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나는 유럽이나 그 어디 성지순례 가서 드린 미사보다 이 거리에서 드린 미사에서 2천 년 전 예수님이 제자들과 미사를 이렇게 드렸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구럼비에게는 미안하지만, 구럼비가 파괴되는 것을 통해, 이곳에서 십자가의 길과 미사를 통해 강한 하느님 체험을 했다.”
 
   
삼성물산 앞에서 미사 전에 십자가의 길을 드리고 있는 수도자들. ⓒ김선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참에 강남 길거리 성당의 본당신부로서 이 사순시기를 길에서 보낸 여러분들에게 공동보속을 주고자 한다. 첫 번째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미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이지만 더 강력하게 이번에는 보속 차원에서 드리는 것이다.


첫째, 여러분에게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길과 길거리 미사가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그 의미를 성찰하기를 바란다. 단 한 번이라도 참여하며 느끼고 생각한 것들 안에 머물러 보길 바란다. 지금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보일 것이다.


둘째, 구럼비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하시기 바란다. 먼저 강정마을에 가서 구럼비를 보고 오시기 바란다. 어떻게 되어 있는지, 철조망과 펜스에 갇혀 있는 구럼비를 보고 오시기 바란다. 강정마을 주민들과 활동가들을 만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오시기 바란다. 그리고 구럼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신이 속한 모임이나 인터넷 카페, 트위터, 페이스북 활동으로 이웃에게 알리고 활동하자. 이는 비록 혼자이지만 함께이다.


셋째, 삼성에 대한 ‘학습화된 무력감’에 저항하자. 삼성이 없으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든가, 삼성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는 생각, 삼성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라는 천박한 쇼비니즘을 거부한다. 오히려 삼성 때문에 이 국가가 병들고 있고, 사람이 죽어가고, 하느님의 피조물이 파괴되고 있다. 따라서 개인적 혹은 조직적인 차원에서 반삼성연대를 결성하자. 불매운동 등 어디서 무엇을 하든 저항하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있는 행동이 바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저항의 몸짓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핸드폰부터 고민하자. 그리고 집에서 삼성 제품을 치워 나가자.


넷째, 지난 1월에 우리 곁을 떠난 김근태 즈카리아 형제의 말처럼 2012년을 점령하는 것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두 번의 좋은 기회를 주셨다. 4월 11일 총선과 12월 대통령선거이다. 이 두 번의 선거는 여러분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하고,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의 <분노하라>에 실린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강론을 마치고자 한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 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이다“


정만영 신부(예수회)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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