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교회 안의 평신도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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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kspeter] 쪽지 캡슐

2000-04-05 ㅣ No.655

 

  #488에 올려논 페미니즘 관련 자료 4편에 대한 번역이 이번 글로써 완결을 보게 되었습니다.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함께 번역할 분을 찾았건만....  여하튼, 저에게는 좋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사순절에....  제 전공과는 별 상관도 없는 일이고, 제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현실적 문제들이 해결된다거나 다소 곤란한 처지가 호전되는데 별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여하튼 문제를 제기해 주셨던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굿뉴스 토론실을 이용하시는 분들과 더불어 진정한 가톨릭 신앙인의 모습, 그리고 생명을 주시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들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번 글로써 페미니즘에 관한 저의 발언을 끝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신학,철학 수업을 받지 못아보지 못한 어설픈 평신도 청년의 번역인 관계로 오역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별로 매끄럽지 못한 우리말 옮김이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0534.

 

교회 안의 평신도 여성

(Laywomen in the Church)

자넷 E. 스미츠 박사(Janet E. Smith, PhD)

 

  역사적으로 여성이 억압받고 착취받아 왔다는 주장은, 페미니즘이 가장 열렬히 견지하고 있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천명하고 있는 도그마(dogmas)들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젊은 여성들은, 1960년대 이전 여성들이 남성에게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었고 그들의 삶이 사사롭고도 모욕적인 허드렛일들로 완전히 점유당한 상태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여성들이 결국 가정이라는 게토(ghetto)로부터 탈출함으로써, 더 이상 클리버 부인이나 워드의 아내 비버, 웰리의 어머니가 되는 것을 여성의 최상의 열망으로 삼을 필요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 페미니즘 덕택이라고 믿는다.

 

  여성의 역사적 종속 신화는 지난 19세기 중반부터 아메리칸 문화를 점유해 왔다.  여성의투표권 획득에 대해, 20세기 한 여성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

 

  "여성 투표권에 대한 반대의 진실은 그 어떤 논쟁보다도 더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여성에 대한 투표권 부여는 예전에는 우리가 두려워 했던 놀라운 사회 혁명의 가시적 징표요 상징이다.  여성은 전세계의 절반의 존재이다.  그러나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음악과 미술과 조각과 문학, 학문과 과학의 세계는 거의 남성만의 세계였다.  모든 직업과 무역과 노동의 세계는 남성만의 세계였다.  여성들은 희미한 삶, 반쪽만의 삶을 살고 있었고, 남성의 그림자로밖에 살 수 없었다.  법은 남성의 법이었고, 정부는 남성의 정부였으며 국가는 남성의 국가였다 …" (Mary T. Beard, Woman as Force in History : A Study in Traditions and Realities (New York; The Macmillan Co., 1946), citing M. Carey Thomas, p.21

 

  아메리칸 역사학자 메리 비어드(Mary Beard)는 1946년에 "역사 속의 세력으로서의 여성(Women as Force in History)"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녀는 그러한 보편적인 여성 종속 신화를 비판하려 했다.  비어드는 그러한 신화의 근원을 파헤쳐 드러내려 하였다.  그녀는, 여성이 역사에 별 주목할만한 공헌을 하지 못했다는 관점이 어떻게 주류적 관점이 되기 시작했는지를, 1848년 그 유명한 뉴욕주 세네카 폴스(Seneca Falls)에서 있었던 페미니스트 모임으로 소급하고 있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들이 윌리암 블랙스톤 경(Sir William Blackstone)이 쓴 영국법 주해서에 상당한 책임과 비난을 돌리고 있음을 지적한다.  윌리엄 블랙스톤 경은 영국법을 잘못 해석하여 여성은 결혼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남편의 정체성 속으로 완전히 상실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주해를 했다.  비어드는 여성은 보통법에서 블랙스톤이 언급하지 않은 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비어드는 얼마나 페미니스트들이 영국법에 대한 블랙스톤의 잘못된 해석을 모든 법의 대표로, 심지어 모든 여성과 모든 시대와 장소에 대한 대표로 이용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비어드는 대부분의 역사들이 여성들과 그들의 공헌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정도 그러한 소홀함에 대한 책임이 페미니스트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여성들이 역사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해왔다는 잘못된 관념을 절대화시키는 근원이 바로 페미니스트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러한 오류가 역사가들이 여성들의 업적들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눈가림한다고 역설(力說)한다.  끝내 발견하지도 못할 사실, 즉 역사에서 여성의 적극적인 역할을 무슨 이유로 힘들여 찾으려 하겠는가?  예를 들어, 그녀는 어떤 역사 텍스트, 백과 사전도 중세 여성들이 남성과 더불어 당시 경제 활동의 주요한 장(場)이었던 길드의 한 일원들이었다는 사실을 게재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사료적(史料的)인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사적 증거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대치되기에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덧칠해 버리고자 한다.   따라서, 그러한 사료는 억압되거나 무시당하고 있다고 그녀는 리포트한다.

 

  정말로, 페미니스트들은 그러한 함정에 스스로 빠져 들었다.  비어드는 이러한 페미니스트 신화가 창안되던 18세기 초, 여성의 공로들에 대해 여성들이 쓴 논문들과 팜플렛들, 책들이 얼마나 풍부했었는지를 주목한다.  Beard, 74.  그녀는 페미니스트들이 보지 못했던 바를 분명히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던 드 토커빌(De Tocqueville)의 관찰을 인용한다 : "만일 미국인들이 이루어낸 많은 중요한 일들과 그 독특한 번영과 강성해지는 힘을 일으킨 요인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미국 여성들의 우월성(superiority)에 그 원인을 돌릴 수밖에 없다." Beard,74-5.  비어드는 여러 권으로 구성된 저서 서 여성 투표권의 역사(History of Women Suffrage)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리더로서, 거의 모든 직업의 멤버로서 여성들이 이루어낸 성취들을 노래하고 있는 장(章)들을 주목하고 있다.  그 책은 수잔 B. 앤쏘니(Susan B. Anthony), 엘리자베츠 캐디 스탠톤(Elizabeth Cady Stanton), 이다 우스테드 하퍼(Ida Usted Harper)의 공저(共著)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들은 여성의 역사 종속 신화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이다.

 

  또한 비어드는 여성이 역사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해왔다는 미신을 거부하는 역사가들과 그들로부터 발견된 사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녀는 12∼13세기에 관한 헨리 아담스(Henry Adams)의 저작 몽-생-미쉘(Mont-Saint-Michel)을 검토한다.  아담스는 여성의 에너지가 역사의 진행을 설명하는데 중심축이 됨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러한 사실이 그가 저술하고 있는 시대만 해도 충분히 제시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그 시대의 남성과 여성들이 19세기 미국보다 평등성을 보다 많이 누리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그 시대 사람들에서 널리 퍼져있던, 동정 성모 마리아님께 대한 봉헌을 상당히 강조했다.  비어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성모 마리아님께 대한 대중적인 봉헌은 인간의 오랜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성적 품성에 대한 열렬한 애착을 말해주고 있다." Beard, 206.

 

  비어드는 전반적으로 역사가들이 여성에 대한 암흑시대로 제시해온 시대동안 오히려 많은 여성들이 교육을 더 잘 받을 수 있었다는 그녀의 주장을 뒤받침해주는 인상깊은 증거를 제시한다.  역사에 위대한 공헌을 한 많은 여성들에 대한 그녀의 검토에서 비어드는 몇 명의 성녀들, 예를 들어 노르웨이의 성녀 율리안나,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 스웨덴의 성녀 브리짓뜨 등을 포함시키고 있음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Beard, 265.  물론 이 리스트는 매우 길어질 수 있으며, 성녀 모니카,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 쟌 다르크,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가렛, 리마의 성녀 로사, 이탈리아의 성녀 짓따,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폴란드의 헤드비제스 등의 많은 성녀들 없이는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이 리스트는 기혼자나 독신자 평신도 여성 모두가 사회를 위한 봉사에서 매우 뛰어났음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역사를 전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여성들이 언제나 남성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들의 그늘에 가려져 왔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오랜동안 의혹을 가져왔다.  나는 고전학자이다.  그리고 페네로프(Penelope), 앤티곤(Antigone), 클라이템네스트라(Clytemnestra), 메데아(Medea) 등에 친숙한 나는, 그리이스 사회에서 여성이 공식적인 사회 구성원이 아니었다는 주장에 넌더리가 나있는 상태이다.  모든 시대의 문학들은 충만하고도 생산적인 삶을 이끌어 나갔던 여성들, 남성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들, 위대한 지도자였던 여성들, 어떠한 남성이나 남성 그룹보다도 지혜로울 수 있었던 여성들을 보여주고 있다.  배츠의 아내(the Wife of Bath) 또는 맥베츠 부인(Lady MacBeth)이나 윌라 캐더의 여걸들(Willa Cather’s heroines)을 생각해 보라.  그러한 여성들은 서사시, 드라마, 소설 작가들의 상상으로서만 등장하게된 인물들이 아니다.  또한 문학은 남성과의 바람직한 관계, 남녀 양측의 자기 희생적 사랑을 기초로 하여 관계를 형성하는 여성들을 보여 주었다.  분명히 이는 결혼한 성녀(聖女)들에 해당하는 진실이다.  그러나 동정 생활에 봉헌된 성녀들도 동시대의 남성인 성인(聖人)들과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는 사실 역시 진실이다.  여성들이 역사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문학과, 신구약 성서의 여성 이야기들, 성녀들의 이야기들, 역사 속의 여왕들에 대한 사료와 증거를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역사적 공헌을 발견하면서도 그러한 공헌이 성서와 역사 텍스트들에서 제대로 기록되지 못해왔음을 발견하고 있다는 몇몇 징후들이 정말로 있다.  성서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성서가 여성에 대한 잔혹한 부당한 대우의 기록이라는 평가 ― 예를 들어,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는 제프타(Jephtath)와 같이 ― 와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라 성서를 명명한 룻, 에스더, 유딧과 같은 진정으로 범상치 않은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평(評)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듯하다.  성서에서 여성들의 역할에 관한 신뢰할만하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들을 원하는 분들에게는 Feminist Theology : A Reader ed. by Ann Loades (John Knox Press; Louisville, Kentucky, 1990)을 권해 드린다.  뒤에서 보다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무엇을 찾아야 할지를 알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여성의 역할이 필수불가결하고도 진실로 중요하지만 번번히 감추어져 있는 미묘한 방식으로 되어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성들이 역사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해왔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성서나 문학이나 역사 뿐만 아니다.  우리 주변의 공적, 사적 생활에서 우리는 강한 여성들, 남성들 이상으로 능력있는 여성들, 자신이 처한 사회 경제적 여건이 어떠하건 어떻게 뚜렷한 자취를 남길 것인지 알고 있는 여성들을 발견한다.  이러한 여성들의 어머니들과 할머니들은 분명히 같은 기질의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이 완전히 남성에 종속된 비참한 삶을 살았고 그들의 천부적 재능들을 결코 실현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분들에 대한 기념(記念)을 모욕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할머니는 겨우 2년밖에 공공 교육을 받지 못한,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농부 이민자였다.  그녀는 공장에서 일했고, 결국 그녀 자신의 집을 구입할 수 있었으며, 자녀들을 키웠고 그 자녀들은 학위를 취득했다.  그녀는 페미니즘의 소산(所産)이 아니었다.

 

  물론, 여성들이 사회와 역사에 실제적인 공헌을 해왔다고 말한다 해서 그것이 여성들이 언제나, 심지어 빈번히 정당한 대우를 받아왔고 전문 직업과 그에 걸맞은 권한을 누려왔다는 말은 아니다.  결국,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이고, 죄가 강자의 약자에 대한 지배라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진실이 아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평신도에 대한 당신의 사도적 호소문에서, 사람을 이기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착취하는 물건으로 보는 경향을 갖는 사고(思考)의 일차적 희생자들이 바로 여성이라고 말씀하셨다.  (John Paul Ⅱ, The Lady Members of Christ’s Faithful People (Boston : Daughters of St. Paul, 1988).  나는 여성들이 항상 자신의 재능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누려왔다는 장미빛 그림을 그리려 의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명백히, 그리고 자주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렇지 않다.  그러나 여성이 언제나 짓밟혀 왔고, 여성을 티끌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 속에서 ― 여성들로부터 아무런 저항도 없이 ― 남성들만이 쉽고도 유리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다.  여러 시대와 장소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될 수 있는 모든 직위에 오를 기회와 여유를 갖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투쟁해야 했다.  많은 여성들은 지독히도 부정의한 사회의 법률과 관행들에 종속되어 있어 왔으나, 그들은 이 세상이 뿌리고 다니는 비참의 모든 구석진 체험을 해 오지는 않아 왔다.

 

제 Ⅱ 부

 

  역사속의 여성에 대한 이러한 서론은 교회 속의 여성에 대해 같은 논점을 구성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이제 우리는 오늘날까지 여성들이 교회에서 어떠한 공헌도 할 수 있도록 허용되지 않아 왔다는 잘못된 견해에 대한 작업을 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공헌을 하는데 있어 ’아무런 허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어떠한 저항을 사회나 제도 교회로부터 받든지, 해야할 필요가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일을 완벽히 할 수 있다.  나는 이미 과거의 뛰어난 성녀들을 거명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기 위해 굳이 과거를 돌아볼 수고를 할 필요까지도 없다.  우리 자신의 시대에도, 우리는 생명수호 운동을 위한 많은 노력과, 어려운 상황에 임신한 여성들을 돌보는 일, 피난민들에 대한 구호, 공립학교나 가톨릭 학교들에서 이루어지는 성교육들을 모니터하고, 필요한 경우 시정을 요구하는 일 (물론, 이는 모두 다 열거하기 위해서는 너무도 짧은 리스트이다) 등을 리드하고 있는 여성들을 본다.  많은 평신도 여성들은 자신의 교회나 교구가 그러한 노력들을 돕는데 별로 내켜하지 않음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실행되어야 할만한 일들은 마땅히 실행되어야 함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그러한 노력을 자발적으로 시작해 나간다.  

 

  나는 서서히 나의 주요 논점을 향해 나가고 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껏 내가 역사에 강조를 두어 논지를 이끌어 왔기에 그로 인해 이제 내가 기술해내려 하는 그림이 왜곡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나는 여성들이 역사에 자신의 뚜렷한 족적(足迹)을 남기거나 그에 대한 인정을 받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성들의 공로들이 역사 텍스트들에 별 언급되지 않아온 까닭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기록자들이 대부분 남성들이었고 그들의 남성 자아와 무지로 인해 그들이 여성들의 공로들을 인식하는데 느렸을 수도 있었겠다는 이유는 격분한 페미니즘과는 다르다.  이는 흔히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여성을 역사 기록으로부터 배제시키려는 음모,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로부터 조장되고 지탱받는 악덕한 음모를 꾸며왔던 범죄자로서의 남성과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결국, 비어드는 남성과 여성 역사 기록자 모두가 여성의 공로들을 활발히 기술하지 못한 책임이 있음을 발견했고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가장 가치있는 글로서 헨리 아담스(Henry Adams)의 저술들에 신뢰를 두었다.

 

  더 나아가, 그리고 아마도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란 대부분 정치와 전쟁의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역사에 남성들의 행적들이 불균형적으로 많이 실려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전쟁과 정치는 일반적으로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많이 관여해온 영역들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성들이 공공 생활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고 또한 공헌할 것이라고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러한 공적 영역이 그들이 영향을 미치는 일차적 공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며,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지도 않는다.  나의 일차적 논점이란, 여성들이 역사 텍스트들에서 정당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여성들이 공적인 방식 뿐만 아니라 사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공헌하는데 일반적으로 만족한다는 사실이, 여성이라는 존재의 위대한 힘과 은총들 중의 하나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실례들을 알아보기 위해 신앙적 모범으로서 주목하는 것이 온당한 듯하다.  여러모로 성모 마리아님은 드러나지 않는 삶을 이끌어 오셨다.  그러나 그녀의 예(fiat)는 그녀를 대찬송(Magnificat)으로 이끌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엄청난 일들을 하셨다.  지상에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은 모든 세대들이 성모 마리아님을 복되다 칭한다는 사실 안에서 마리아님의 영광을 함께 나눈다.

 

  오직 공적인 영역의 활동만이 가치있는 활동으로서 ’중요하다’고 보는, 현재 널리 견지되고 있는 주장은, 여성들이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달란트들을 가지고 즉각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모든 공헌들을 증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잠식시키는 위협이 된다.  우리의 시대는 공공의 시대이다.  즉, 사생활에 대한 인정과 감사를 거의 상실해버린 시대이다.  사적인 세계는 거의가 가정 생활의 세계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 이상이다.  사적인 세계는, 만일 그러한 세계가 없다면 우리가 충만히 인간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는 친밀한 관계의 세계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아의식과 연계의식을 주는 대부분의 기억들이 즉각적으로 형성되고 각 개인이 존중되는 영역이다.  공공(公共)이란, 우리가 보다 쉽게 어떤 역할을 하면서, 각 개인에게가 아니라 전체적인 공동선이나 인간성(humanity)에게 보다 직접적인 공헌을 이루어 나가는 장(場)이다.  양쪽 영역들은 그 나름의 영웅들과 성인(聖人)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의 공헌들은, 그 사적이라는 이유로 인해, 공적인 공헌이 받고 있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온갖 보상과 인정에 대한 욕구로 중독되어 있어서, 아무런 인정도 받지 않는 성취란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사적인 영역의 중요성은 거의 인식되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리고 만다.  여성들은 천성적으로 사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고 인정하고 감사하며 양육하는 경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은 공적인 영역을 위해 사적인 영역을 포기하도록 설득과 유혹을 받아왔고 지금도 그러한 영향을 받고 있다.  여성들이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는 이제 아기들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어머니의 요청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더욱 적대적인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최악의 밑바닥 체험이길 희망하고, 그 이상의 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만일 여성들이 계속해서 공공의 영역을 위해 사적인 영역을 저버린다면, 인간은 보다 힘든 시대를 겪게 될 것이다.  정말로, 여성들이 공공 영역에 할 수 있는 주요한 공헌이란, 사적인 가치들을 공공 영역에 가능한 많이 확장시키려는 사도이다.

 

  여성들은 우리의 개별성이 인정받는다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그 모든 행동들이 얼마나 엄청난 중요성을 갖고 있는지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들은 환영받는 가정과 맛갈진 음식을 창조해내고, 생일을 기념해 주며, 누군가의 어려움들을 귀담아 들어주고, 안아주며, 손수 만든 선물같은 것들을 만드는 작업이 결코 하찮은 행동들이 아님을 이해한다.  그들은 이러한 제스쳐들이 비록 짧은 순간일지언정 매우 개인적으로(personally) 방향지워진 방식으로써, 모든 창조의 표면을 넘어 흘러 나오는 사랑의 순간들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때때로, 심지어 단 한 번의 사려깊은 이러한 제스쳐들의 누적된 영향이, 보다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성취들 ― 엄청나게 높은 고층건물이나 성공적인 정치 캠페인을 달성하는 일, 또는 적으로부터 승리를 거두는 일 등 ―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공헌적 차원은 일부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인식되어 왔다.  그러한 겉표면 아래를 바라보기 시작한 페미니스트 신학자 니꼴라 슬리(Nicola Slee)는 성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남성의 지배와 여성들의 익명성은 경솔하게 삭제되어서는 안된다.  성서 속에서 우리 여성들이 비가시적이라는 싸인에 대해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을 표현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되고 확인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표면적인 여성의 비가시성 아래에서, 여성의 삶과 체험을 독특하게 일깨우고 있고 그들에게 깊이 있게 말하고 있는 이야기 속의 이미지들과 상황들의 주체임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Nicola Slee, "Parables and Women’s Experience", in Loades, p.41.

 

  슬리는, 몇가지 성서 이야기들이 가정(domestic)을 하느님의 현존이 발현될 수 있는 곳으로 제시함으로써, 어떻게 "나날의 세계 자체가 전과 다르게 변모되는지" 설명해 나간다.  그녀는 더 나아가, "이는 여성들이 가정과 직업, 집과 일, 가족과 사회 등의 사이에서 겪는 갈등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인 가정 속의 삶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면서 그러한 현실들이 근본적이고 폭발적으로 변모된다는 힌트를 준다 …" (Slee, in Loades, p.42)  슬리는 가정과 사적인 생활의 감추어짐(hiddeness)을 발견하였고, 그곳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놀라우신 일들을 하시는 자연스러운 장소임을 깨달았다.

 

  체스터튼(G. K. Chesterton)은 사적인 일(the private)들의 중요성에 대한 안목을 상실해 버린데 대하여 여성들을 꾸짖었다.  "현대 여성들의 포기(The Modern Surrender of Woman)"라는 제목의 놀라운 에세이에서 그는 현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양도하지 말아야 할 부분을 양도했다고 개탄했다.  현대 여성들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여성들은 모든 일들에서 남성들이 옳았다고 진지하게, 그리고 공식적으로 인정해 버렸다.  그들은 공공건물(또는 의회)이 사적인 집(가정)보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생각, 정치란 (여성들이 언제나 주장해 왔듯이) 술퍼마시는데 대한 변명거리가 아니라 새로운 여성 숭배자들이 무릎을 꿇어야할 신성한 장엄 예식이라는 생각, 선술집에서 떠들어대는 수다스런 애국자들이 존경스러울 뿐만 아니라 질투심까지도 유발한다는 생각, 그러한 이야기들이 시간 허비가 아니라, 따라서 (결과적으로 분명히) 선술집들에서 쓰는 돈은 낭비가 아니라는 생각을 선호하게 되었다.  우리 모든 남성들은 내기, 술 퍼마시기, 정당 정치라는 남성들의 취미들에 대한 경멸에 모두가 합창하고 있는 아내들, 어머니들, 할머니들에 익숙해져서 자라왔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여성들은 틀렸고 모든 남성들이 옳았다고 인정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미스 팬커스트(Miss Pankhurst)가 등장한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자매들이 너무도 경멸해 왔던 남성적인 잇점들의 그림자라도 잡으려는 듯, 남성들의 세계에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탄원하고 있다 …  G. K. Chesterton, What’s Wrong with the World (New York; Sheed and Ward, 1956)

 

  아마도 체스터튼은 사적인 영역에 대한 그의 논점을 강조하기 위해 공적인 영역을 평가절하해버린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논점은, 여성들이 사적인 영역이 공적인 영역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지혜를 포기해버린데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만일 여성들이 여전히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가 그들의 삶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한다면, 여성 사제 서품과 같은 논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여성들이 단순히 봉사하길 소망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적 방식으로 섬기길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들은 사제가 될 아무런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  일부 여성들은, 사제 서품에 대한 여성의 배제가 여성들의 지성과 능력에 대한 평가절하 때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여성 사제 서품 쟁취를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나, 여성 사제 서품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가톨릭 교회가 사제서품을 남성으로만 제한하는 진정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이들은, 어떠한 직능을 여성에게 거부하고 남성에게만 허용하는 것이 여성이 열등하다는 관점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단순한 주장을 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남성들에게만 사제 서품을 하는 것이 그러한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연원된 것이 아니라는 설명들을 오랫동안 해왔으나, 그러한 가톨릭 교회의 논지를 숙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만한 발언을 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는 거의 없다.  

 

  현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또다른 미신은, 여성이 가톨릭 교회에 충만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교회내 고위직들을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많은 이들은, 교구의 여러 사무 직책들에서 여성들이 일하고 있는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성에 대한 요구의 증대된 감응성의 싸인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러한 열성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다.  나는 최고위직의 가시적 직책들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의심스러워 한다.  많은 교사들은 교장보다 훨씬 더 많은 선(善)을 하고 있다.  많은 간호사들은 병원장보다도 훨씬 더 많은 선을 행하고 있다.  가톨릭 학교들의 많은 교리교사들은 교구 종교교육 관리자보다 훨씬 더 많은 선을 행하고 있다.  물론, 선이란 고위 레벨들에서도 행해질 수 있다.  그러나, 봉사하고 선을 행하길 소망하는 사람들은 보다 고위직의 가시적인 업무들만이 반드시 가장 큰 선을 행하고 있는 직무라고 생각하는 유혹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많은 이들은 이제 여성들이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여성의 관점이 대표되고 귀기울여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견해는 심히 우려할 정도로 잘못되었다.  돈나 스타이켄의 저서 하느님을 모함하는 분노 Donna Steichen, Ungodly Rage : the Hidden Face of Catholic Feminism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91) 는 뉴에이지 원리들에 엄청나게 영향받은 여성들, 실제로 마술(witchcraft) 예식들에 참가하면서 전반적으로 가톨릭 교회와 그 가르침에 적대적인 여성들로 교회 직책들이 잠식(infestation)되고 있는 현상을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안으로부터의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길 원한다.  가톨릭 교회 그 자체를 사랑하면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는 삶을 가꾸어 나가길 모색하는 여성들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주장들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움을 발견한다.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높은 봉급을 받는 교구 고위직에 채용된다거나 성사를 집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꾸어 나가는데 있어 필수적 사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꾸어 나가는데 필수적인 것은 성사를 받는 것이며 그러한 성사를 통한 은총이 자신의 삶 속으로 ― 삶에서 자신의 성소가 무엇이 되었든 ― 깃들이게 하는 것이다.  가톨릭 평신도 여성들 ― 또는 평신도 남성들 ― 이 해야 할 바에는 그밖의 다른 열쇠가 없다.  우선적이고도 최선적으로, 여성(남성)들은 가톨릭 교회 가르침들에 관한 이해와 기도생활, 그리고 성사에 대한 충실성을 심화시켜야 한다.  각 평신도 여성들이 그것을 실천할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봉사해야 할 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평신도 여성이 봉사하는데 있어 특정한 유형이나 일단의 활동이 규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각 평신도 여성들은 고유한 시간과 장소에서 존재하는 독특한 존재이다.  뉴만 추기경(Cardinal Newman)이 언급했듯이, 평신도 여성들은 다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위탁받은 특별한 사명을 갖고 있다.  

 

  우리 각자가 저마다 독특한 사명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몇가지 일반화가 가능해진다.  평신도 여성들이 갖는 특별히 중요한 직무는 그녀에게 주어졌고 형성된 관계성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내가 이야기해온 ’사적인(private)’ 영역이다.  대부분의 평신도 여성들은 결혼하기에, 그들이 가장 즉각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될 관계는 바로 남편과 자녀들에 관해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은 가족, 친구, 이웃, 동료, 상처입은 사람들이나 손길이 닿는 사람들과의,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관계성들을 갖는다.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은 여성들의 영혼이 갖고 있는 열망 중에 가장 깊은 열망은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는 갈망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여성의 전(全) 존재가 그러한 방식으로 질서지워져 있는 반면에 남성들은 그 존재 안에, 세상의 외양을 조율하고 일하는 방향으로 보다 지향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분명히,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일차적 소명은 다른 이들의 필요에 공감적이고 관심을 기울이는 여성의 본성(nature)에 대한 가장 적절한 상징의 근원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에서 이러한 성소(聖召)를 실천하는 주요한 장(場)은 가정이 될 것이다.  회칙 가정 공동체(Familiaris Consortio)는 가정 생활로 불리움받은 사람들의 성소에 대한 굉장한 청사진을 제공한다.  가정 공동체는 ’가정(domestic)’ 교회, 즉 가정을 복음화의 으뜸 장소라고 말한다.  가정은 ’구원받은(saved)’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구원하는(saving)’ 공동체이다.(49항)  가정 생활로 불리움받은 사람들은 가정 교회의 일들을 잘 수행함으로써 제도 교회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다.

 

  자기 희생적인 양육자와 돌보는 이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일반적으로 페미니스트들의 심사를 뒤틀어 놓는다.  페미니스트들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깨어있는 페미니스트들(enlightend feminists)과 (남성에 종속되어 있는) 신발털이개같은 여성들(dormats).  페미니스트들은 천박한 개인주의를 조장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성인(成人) 여성이란 홀로 설 수 있고 어떤 남성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성이 전적으로 남성의 속박을 받는 것, 여성이 남성을 섬기는 것, 자신을 자녀 돌보기와 집지키는데 한정시키는 것을 정당하고 온당하다는 생각을 그 신발털이개들이 갖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신발털이개들은 여성들은 감히 공공영역에 뛰어들지 말아야 하고, 단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로서 만족함으로써 남편과 자녀들이 세상에서 의미있는 존재(something)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공공연한 모략을 받는다.  ’신발털이개들’은 자신들은 여성이 경력을 추구하는데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으며, 자신들을 남성과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자신들도 역시 세상에는 여성이 대한 몹시 부정의한 차별이 있어왔고 지금도 그러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들은 여성이 인간의 업적들에 주목할만한 공헌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고 있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러한 주장들은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거부당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전업(全業)으로서의 모성에 대한 호의적인 발언을 듣는다든지, 낙태와 피임과 이혼에 대한 거부를 페미니스트들의 기조에 필요한 논지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면, 그들은 그 외에 제기되는 주장 모두를 거부해버리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안건들(agenda)의 가장 기조가 되는 아이템들에 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가 있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모든 여성들이 맨발에다 임신한 부엌데기가 되길 원하고 있다는 비난을 자주 받는다.  페미니스트들에게 그것은 노예로 끌려 다니는 쇠사슬 찬 흑인과 거의 대비될만한 억압에 대한 지극한 상징이다.  음, 나의 어머니는 그녀의 삶의 상당 부분을 부엌에서 맨발로, 임신한 상태로 보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들은 그녀의 삶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중 하나였다.  나의 어머니는 강제로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한 남성에 의해 임신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에 의해 임신했다.  어머니는 감방으로서의 부엌이 아니라, 그녀의 가족에 대한 사랑의 행위 안에서 놀라운 일들을 일구어내는 장소로서의 부엌에 계셨다.  그리고 어머니의 맨발은 아무런 속박이나 제한이 없음, 그녀 자신의 길을 걸어 갈 자유를 상징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가정 생활과 남성에 대해 불행한 체험을 해온 듯하며 그러한 체험을 하나의 보편적 기준으로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는 듯한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들은 가정이 억압적이고 직장은 해방적이며 가정에서보다 직장에서 더 반김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체험은 보편적 기준으로서 견지되어서는 안된다.  실상은, 가정과 직장에서 모두 행복한 체험을 해온 많은 여성들은 가정이 그들을 보다 많이 요구하고 있으며, 성장을 위한 보다 큰 기회를 제공하는 환경임을 발견한다.  오로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살아가려는 결정을 하기 전까지, 많은 이들은 직장이 도전적이고 자극적이며 보상적임을 발견한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가정 안에서(in home)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면("at home"), 그들은 직장이 더 이상 요구적이지도 보상적이지도 못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더불어 사는 법과 남편을 즐겁게 해주는 법을 배우는 것, 어떻게 하면 가정을 잘 가꾸어 나갈 수 있는지 배우는 것, 어떻게 하면 잘 교육받고 매너 있으며 자신감있는 자녀들을 길러나갈 수 있는지 배우는 것, 그들의 충만한 관심을 요구하고 있는 다른 모든 책임들에 어떻게 하면 기도 생활을 집약시킬 수 있는지 배우는 것은 그들에게 충분한 관심, 그리고 많은 덕(德, virtues)들을 내면화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물론, 동시에, 그들의 직업을 잘 해 나가기 위해서, 그들은 신발털이개(doormats)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요구들이 자기 주위의 요구들 ― 그러한 요구들은 자주, 그들의 배우자와 자녀들과의 매우 섬세하고도 외교적인 교섭을 요구한다 ― 과도 부합해야 함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일 남성들은 보다 외향을 지향한다는 에디트 슈타인의 말이 옳았다면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은 가정을 소홀히 하면서 일들 속에 쉽게 자기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뒤를 따라 온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남성들이 가정에 대한 충만한 책임성을 질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  평신도에게 보내는 사도적 호소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에서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일차적으로 여성에게 위탁된 임무들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말씀하신다.  성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임무란, "결혼 생활과 혼인의 충만한 존엄성을 가꾸어 나갈" 임무이다.  이를 설명함에 있어, 성하께서는 "지력에 뛰어나고, 사랑이 넘치며, 결정적인 개입력’을 지닌 여성들이 어떻게 그들의 남편이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온당한 역할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물론, 여성들은 그들의 자연적인 덕(德)들에 대한 왜곡이라는 일련의 실패 경향을 갖는다.  그들은 소심함과 심각한 주관성, 사치와 감정 등에 대한 과도한 애착 경향을 갖을 수 있다.  적적할 때, 그들은 겸손되이 남편으로부터 인도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요약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남편이 ’남편’이 될 수 있도록, 즉 그들을 도와주고 개발시켜주는 존재가 되도록 허용해야 한다.  에디트 슈타인은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달란트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요구된다면, 그녀가 용기와 자신감과 같은 덕들을 함양해 나갈 수 있도록 조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Stein, 76.

 

  이는, 배우자들이 서로를 진보시키는 수단으로서 결혼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시기에 그들은 서로가 보다 나아지도록 온유하게 진정으로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결혼은 두 개인이 서로를 잘 알게 됨으로써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버티어 주며, 기뻐할 수 있게 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방조하고 잘못에 빠지게 하는 기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전적인 자기 증여(total self-giving)’가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의 환상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편의와 모든 욕구에 다른 누구를 시중들도록 함으로써는 결코 풍성해질지 못한다.  결혼은 그리스도적 성소이다.  결혼은 거룩함과 봉사에 대한 부르심으로부터 사는 특별한 삶의 유형이다.  부부 양측 모두가 자신의 잘못된 습성들을 버리고, 부부 서로의 관계와 가족들의 상호작용을 증진시키는 새로운 습관과 기술들을 획득하지 않고서는 결혼생활을 해 나갈 수 없다.

 

  대부분의 평신도 여성들은 심원하고도 깊이있는 그리스도인 가정을 양성함으로써 가장 의미있는 공헌을 할 것이다.  그들이 가꾸는 가정은 그 의미 안에서 유쾌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은 가족들이 우리 시대의 물질주의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줄 우선권을 쥐고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주요한 성취이자 중요한 증거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이 없는 가정은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을 위한 강력한 자석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유익한 영향을 광범위하게 펼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를 배우고 성사를 모시며 교회 가르침들을 존경함을 배우는 것은 가정을 통해서이다.  어린 자녀들을 둔 어머니들에게는, 단순히 어머니가 되는 법과 가정을 운영해 나가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전업(全業)이 될 것이다.  자녀들이 자라나면서 양육기술이 증대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들은 자신의 그리스도 사도직 영역을 증대시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정 공동체(Familiaris Consortio)는 가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공동체나 본당의 자원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자신의 자녀 뿐만 아니라) 어린이를 사랑하게 된, 좋은 부모가 되는 법을 체득한 이들은 어린이들을 위탁 양육하거나 입양하는데 자신의 가정을 개방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그리 확연히 가시적이지 않으며, 역사책에 언급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 명예나 부를 가져다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이것이 교회, 가정, 가정 교회의 역할이며, 하느님 나라를 앞당기는 일일 것이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아내와 어머니가 되지는 않을 것이고 아내들과 어머니들의 상당수가 삶의 어떠한 시점에서 경력과 직업을 추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전문인 평신도 여성이 교회에 해야 하는 공헌이란 무엇일까?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우선적이고도 으뜸가는 공헌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증거가 되고, 직업에 충실하며, 직장에 그리스도의 가치를 전하고, 자신의 여성다움(femininity)의 영향력이 직장에서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될 것이다.  가정 공동체(Familiaris Consortio) 23항이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다 :

 

  [남성과 여성의 평등성은] 여자들이 여성다움을 포기하고 남성의 역할을 모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완전하고 충분한 여성적인 인간성이 관습과 문화의 차이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가정에서나 밖에서 행동으로써 표현되어야 합니다.

 

 

  여성들은 따뜻함과 공감이라는 여성다운 능력을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  전문 직업에 이끌리는 여성들을 발견하길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계 엔지니어링과 같은 영역에 이끌리는 여성들조차도, 그들이 만일 자신이 여성다움을 잃지 않는다면, 직장이라는 에토스(ethos)는 ―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방식을 통해서 ― 훨씬 좋게 변하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여성다운 여성들의 존재 앞에서는, 예전에 전혀 그렇지 못했던 남성들조차 보다 신사적이 되기가 쉬워질 것이다.  또한, 직장 여성들은 안전 사항들이 제대로 준수되고 있는지, 모든 이들이 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에 특별한 관심을 갖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 입법자들은 가정을 강화하고, 태아와 같이 힘없는 이들을 보호하려는 법제정을 위해 일해야 한다.

 

  여성의 존재가 직장에 일으켜야 하는 변화들은,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에서 여성에게 의탁한 두 번째 임무 즉, "문화의 도덕적 차원, 개인적이지만 사회적인 삶의 ― 즉, 인격이 존중되는 문화 ― 차원을 구현하는" 임무와도 상응하는 듯하다.  Christifideles Laici, p.134.  성하께서는 여성들이 개개인의 필요에 대한 특별한 감응성을 지녔으며 그러한 감응성을 공공생활에 구현시켜야 한다고 역설(力說)하신다.

 

  전문 기술을 갖고 있는 여성들은 그러한 기술들을 제도 교회(institutional church)를 돕는데 사용할 수 있다.  본당들은 재정 고문과 법률가, 교육자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영역의 여성들은 자신의 전문 능력을 자원 봉사하려는 계획을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봉사하는 단체들을 돕는데 특별히 좋은 위치에 있을 수도 있다.  가정에 있는 어머니들과 전문직 여성들은 서로를 적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그들은 다른 편은 다양한 자원 봉사를 할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다고 쉽사리 생각하고 서로에게 불합리한 요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은 두 가지 삶의 길 모두가, 이기적인 목표를 지향할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께 대한 봉사로 방향지워질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성취를 깎아내린다든지 질투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의 성소를 잘 완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진정으로 그 누구도 "존재(be)" 이상으로 "행동(do)"하도록 부르심받지 않는다는 말로써 본 글을 마무리 지어야 하겠다.  미국 사회는 여전히, 많은 일이 행해지는 시대만이 좋은 시대라는 노동 윤리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를 단순히 ’존재(being)’가 됨을 방해하며, 서로를 위한 더불은 존재가 됨을 저해한다.  그것은 우리가 공공 영역에 우리 자신을 고착화시킨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봉급을 받고 어떠한 차나 집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자주 우리 이름이 신문지상에 등장하는지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언제나 진실의 정곡을 찌른다.  보다 좋은 몫은 우리 앞에 계시는 선(善)에 관심을 기울이는 쪽이다.  우리는 ’존재여야(be)’ 하며,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귀기울이려 앉아 그에 경탄하는 관상의 소중함을 재발견해야 한다.  여성들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다른 인간 존재들 안에서 자주, 그리고 쉽사리 보게 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사랑하는 창조물로서 그들에 봉사해야 한다.  우리는 마리아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모든 것들을 우리 마음 안에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지극히 중요한 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우리 마음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마음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거룩함을 찾음으로써 교회에 가장 잘 봉사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무엇이 되었든 하느님께서 그녀의 그러한 열망에 대해 이끄시는 바에 자신을 내맡겨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을 제한시켜 버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각 단계와 순간에 ― 그분의 부르심이 아무리 평범하다거나 범상치 않다 하더라도 ― 의도하시는 바를 받아들여야 한다.  (김 신 베드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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