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6.25 때 공산침략 벗어난 제주, 부산은 괜찮았을까?

스크랩 인쇄

고순희 [kohthea] 쪽지 캡슐

2012-03-28 ㅣ No.366

▲ 제주 출신 박문재 박사    
 

미시간 오클랜드 의대에서 생리학 교수 및 부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내과의사로 개업

2011/09/12 
 
“내들어봅서, 예!”                                          박문재

6·25 사변이 터졌을 때 나는 서울에 사는 철없는 중 3 소년이었다. 학교가 임시로 닫는다는 라디오 소식을 듣고는 신바람이 났다.
 
야! 이제는 숙제를 안해도 되고 동네 애들과 어울려 매일 뚝섬에 가서 수영하고, 고기잡이하고, 좋아하는 축구연습이나 매일하고… 즉 여름방학이 다시 돌아온 줄로 알았다. 
 
그러나 물론 이는 나의 큰 착각이었다. 군정하의 서울생활은 악몽의 석 달이었다. 물론 격렬한 전시체제하였으니, 모든 게 다 부족했다. 식량 보급도 없고, 전기도 항상 정전이고, 수돗물도 나오다 마다하고, 젊은 청년들은 거리에서 강제 징집되었고, 특히 소질 높은 성악가이던 나의 큰 누이는 인민군 협주단에 징집되어서, 북으로 이송되어갔다.

따라서 전국이 다시 바뀌어 서울이 다시 중공군 의용군의 개입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가장 노릇을 하시던 어머니는 누나가 없는 우리 형제 넷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고 결정하시고, 기왕에 피난 갈 바에는 아주 바다를 건너 평화의 섬, 제주도까지 가면 안전하다고 생각하시었다.

특히 제주도는 우리 가족 모두의 고향의 땅이고, 제주읍에는 한의사로 개업하시는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단둘이서 살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피난 보따리를 싸서 걸머지고, 우리 형제 넷은 어머니와 같이 서울역에서 이미 만원된 남행열차의 지붕 위에 기어 올라타고는 부산까지 사흘이나 걸려서 고생에 찬 여행을 하였다. 수많은 기차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기관차의 연탄 연기로 얼굴이 새까매지면서, 그러나 기차 지붕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부두에 나가 제주행 배, 금파호(똑딱선 보다 약간 더 큰 배)에 올라타, 다시 사흘간의 배고프고, 뱃멀미하는 태풍 속의 여행 끝에 제주 산지항에 굴러 떨어지다시피 하선하고는 모두 울면서 기다리시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품 안으로 안기었다. 
 
며칠 쉬면서 피로를 회복한 뒤 제주도를 돌아보니 예상과는 딴판으로 이는 “평화의 섬”은 아니었다.

소위 4·3사건으로 도민의 거의 몇 할이 사살당했다하며, 인심이 흉흉하였으며 수천 여명의 굶주린 소위 제이 국민병들이 모슬포의 수용소에서 사생경지를 방황하고 있었으며, 매일 함흥, 원산 등지에서 철수된 북한 동포 피난민들이 수송선으로 수백 명씩 입도되어서 여러 공공건물, 학교 관청, 공장 그리고 임시 천막촌에 수용되고 있었으며, 부족한 정부원조로 끼니나 겨우 때우고 있었다.


밤이면 한라산 중턱 여러 군데에서는 소위 “공비” 반란군들의 봉화불로 서로 신호를 하여 위세를 보이고 있었다. 
 
징집연령 미달의 어린 소년인 나는 학교가 열렸을 때는 학교(오현 중학교)에도 가고, 대부분 휴교 상태였으므로 시내 군수공장에 수류탄 포장공으로 취직도 하여서 일도 했다. 제조된 수류탄을 포장도 하고 또 완성된 수류탄을 시험하기 위해 매일 몇 개씩 뽑아서 시험 투척하여 폭발시키는 일도 하였다.

그것을 아신 어머니는 펄펄 뛰시면서 “살려고 피난 왔는데 그게 무슨 짓이냐”고 하며 나를 집으로 끌고 갔다. 그 후 거리에서 신문도 팔았으며 동생들 데리고 함덕 해변 수영장에도 자주 가고 하였다. 
 
하루아침에는 수많은 미 해군 수송선(LST)들이 갑자기 수평선에 나타나 수천 명의 중공군, 인민군 포로들을 내려놓았으며, 또 수백 명의 미군 헌병들이 그들을 몰면서 상륙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들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폭동을 일으킨 소위 용공 공산 포로들이었다.

위험천만의 포로들을 제주의 공군기지(K-40)에 임시로 설립된 포로수용소에 수용하기로 되어 몰아온 것이었다. 그 K-40 비행장, 즉 그 포로수용소는 현재의 신제주의 제주국제공항이다. 
   

칠 후 산지항 근처의 공설시장을 지나는 나는 한 미군 Jeep차를 보았으며, 한 나이 많고 점잖은 미군장교가 주전자를 사려고 흥정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를 도민들이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의사통화가 안되니 곤란을 받는 듯했다.

당시 나는 중 3을 다녀 영어공부를 3년을 하였으니 간단한 회화는 문제가 없었다, 그래 다가가서 “May I help you?”하였더니 그 나이 많은 고급장교는 펄쩍 뛰면서 반가워하며 주전자를 산 다음 나를 Jeep차에 반 강제로 태워서 포로수용소(camp)로 데리고 와서 통역으로 임명하고, 군복을 재어 입히고 수용소 미군 숙소 내에 나를 거주시켰다. 그 미군 장교는 수용소 총사령관인 Schaffer 대령이었다. 
 
포로수용소에서 나의 생활은 편안했으며 모든 면에서 윤택하였고 경제적으로도 어머니와 동생들 셋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Schaffer 대령은 항상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배려해 주었다. 이렇게 약 일 년 반을 지나고는 부산에 피난민 학교들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우리 모두 데리고 교육을 위해서 제주를 떠났다.

그러나 일 년 반의 미군치하 포로수용소에서의 근무는 어린 내 마음속에 여러가지 의심과 고민과 모욕감 그리고 정서적인 불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어리고 단순한 생각에 나는 미국인들은 우리를 도우러 온 고마운 친우라 생각했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우리들의 상전같은 행세를 하였다.

상대가 제주도민이든, 피난민이든, 국군이든 또는 정부관리이든, Korean하면은 곧 명령을 내리고, 부려먹는 상대로 취급하였다. 그들은 제주도에 아무런 입·출국 수속절차 없이 들락날락했으며, 제주도의 자연을 마음대로 함부로 오염시켰다. 고기잡이 어부와 해녀가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물을 바다에 그대로 누출시키고, 아무데나 땅을 파고 쓰레기를 버렸다. 면허도 안 받고 마음대로 수시로 꿩 사냥, 사슴사냥을 했으며 시내에서도 교통신호도 지키지 않았다.

Schaffer 대령은 나를 통역으로 동반시켜서 제주도지사를 자주 공무로 방문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에게 거만에 찬 명령조로 대했으며 흥분했을 때는 영어로 욕을 퍼부으며 나에게 그대로 직설로 우리말로 통역하라고 강하게 지시하곤 했다. 

제주일반도민, 그리고 가난한 피난민들에게 포로수용소는 경제적 기회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자로 쓰레기꾼으로, 소제부로, 주방일군으로 일했으며 수용소 근처에는 판잣집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찻집, 빵집, 기념품 가게, 재봉, 세탁소가 미군 상대로 들어섰다.

그러나 제일 나의 어린 마음을 상하게 하고 슬프게 한 일은 수용소 근처에 여기저기 생겨나는 미군인 상대의 허수름한 매춘굴이었다.

미군들은 그들을 이용하면서도 심히 무시했으며 경멸하였고 강제 위생검사, 성병검사를 강요하였고 마음에 안들면 출입금지 딱지를 붙이곤 하였다. 대령과 같이 탄 Jeep차가 지나가면 여자들은 뛰어나와 소리치며 손 흔들고 불러드리려 하였다.


그러면 Schaffer 대령은 얼굴을 찌푸리고 한국 여자 전부를 핀잔주고 경멸하는 말을 내 앞에서 중얼거렸다. 어린 소년인 나는 그럴 때면 어디 쥐구멍 속으로라도 숨고 싶었으며, 그 창녀들을 미워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녀들이 먹고 살기 위해,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해 딴 방편이 없으니 눈물을 가슴 속에 흘리며 하는 짓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중 어느 날 밤에 수용소 안이 왈칵 뒤집혔다. 젊은 창녀 하나가 수용소 내까지 들어와서 매춘을 하다가 잡혔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삼엄한 경비 속에 있는 수용소에 자발적으로 들어왔는지 미국 군인이 끌고 들어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녀는 체포되어서 경비책임 잘못했다는 미군 의무병과 함께 비행장 밖을 경비 책임 맡은 한국 공군 헌병에게 인도되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한국 종업원들이 킬킬거리며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화난 공군 헌병들은 그 여자를 벌거벗겨서 밤새 몸의 체모를 하나하나 뽑아 고문을 시키고 날이 새자 나체인 채로 우는 여자를 수용소 근처의 동네에 경고 목적으로 끌고 순회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날 점심시간 후 나는 Schaffer 대령과 같이 그의 Jeep차로 매일 하는 수용소 밖 경비순회에 나섰다. 그러자 저 멀리 해변에 한 여인이 흰옷을 입고 외로이 바다를 보고 앉아있는 게 보였다. 어쩐지 분위기가 무척 외롭고 슬프게 보였다.

경비순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고, 저 멀리 고요한 바다 수면 위에 쨍쨍한 햇빛에 비쳐 둥실 거리며 떠있는 하얀 치마가 보였다.
얼마 후 그날 오후에, 나의 슬픈 예상은 확인되었다. 그 여자가 울면서 바다로 들어가 자살하였다는 것이었다.  

제주도 서귀포의 강정마을에 거대한 해군기지를 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도를 떠난 지 반세기가 되었지만 제주도는 역시 나의 고향이며 나의 조상의 영혼이 떠도는 성지이다. 이 강정마을의 해군기지가 대한민국의 국방에 필수하다는 이론을 믿는 어리석은 자는 제주에는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미국시민으로 미국에서 50년 넘게 살았다. 그동안 살면서 미국의 해외정책에 대해 많은 진실을 보았다. 강정의 해군기지는 중국과의 대결에서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미국의 국방정책의 일환이고, 또한 미국의 최고 우방인 일본의 대중국 방위정책의 일환이다. 

강정의 해군기지는 평화의 섬 제주도를 군사공격의 표적으로 만들게 된다. 어떤 형태로든 극동에 전쟁이 일어나면, 제주도는 제 일차 유도탄공격의 목표지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제주를 겨냥한 유도탄은 강정기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제주시, 서귀포시, 모슬포, 성산, 함덕 등 모-든 곳에 떨어지며, 한라산 백록담에도 떨어질 수 있다. 

한국 사람이면 어디에 살든지, 남한, 북한, 제주 또는 해외 할 것 없이 떨쳐 일어나 이 무모한 계획을 반대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떨쳐 일어나, 이러한 무모한 계획을 외국 상전세력의 압력에 못 이겨 내세운 정치인들을 내쫓고, 처벌해야 한다.   

최근 국 일간지 New York Times 에 최상훈 기자가 쓴 글이 실렸다. (A-10 페이지, 금요일, 8월 19일판) 제목은 제주도 해군기지계획 남한의 국민의 반대에 봉착.”이다.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균형 있게 쓰인 기사인데 그 마지막에 47세의 제주 전복채취어부의 말이 인용되었다. 즉 너무걱정할필요없다. 상상해보라, 미국항공모함이들어오면수천미국군인들이내려와돈을뿌릴 것이다. 우리경제에얼마나도움이될 텐데…!!” 기막히는 망언이다!  

한국전쟁 때 어린 소년으로 제주도에서 쓰라리고 마음 아픈 경험을 한 나는 이제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사회에서 학자로서, 대학교수로서 그리고 내과의사로서 경력을 맞추어가며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 있다.

그러나 이제도 눈을 감으면 그 옛날 제주 해변에서 햇빛이 쨍쨍한 오후에 바닷물에 두둥실 떠 있는 슬픈 그 여인의 흰 치마를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앞서 말한 47세의 제주 어부가 그 슬픈 장면을 목격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제주사람들은 아니 우리 탐라 사람들은
저 바다건너 육지에는 자기 배만 부르면, 또는 자기 외국 상전의 명령만 만족시켜주면 한라산, 백록담을 다 팔아먹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소위, 정치적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4·3 사건이 왜 일어났던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20

추천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