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환경 파시즘과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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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식 [guten1273] 쪽지 캡슐

2012-03-22 ㅣ No.223

에코파시즘(Ecofascism)

老子의 道德經에 ‘현소포박(見素抱)’이라는 말이 나온다. 물들이기 전의 흰 비단처럼 때 묻지 않은 그 본성을 드러내고 온갖 기물이 되기 전 나무의 투박한 본 모습을 회복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素' 는 물들이지 않은 흰 명주, '' 은 밑동만 자른 나무를 말한다. 이런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젊은이가 국량(局量)도 지녔다면 천하의 인재라 할 만 하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 학유에게 ‘局量의 근본은 용서하는데 있다.’ 는 편지를 보내어 깨달음을 주었다. 이규보의 국선생전(麴先生傳)을 보면 <성(聖)이 어려서부터 이미 깊숙한 국량(局量)이 있어, 손님이 아비를 보러 왔다가 눈여겨보고 사랑스러워서 말하기를,

“이 아이의 마음과 그릇이 출렁출렁 넘실넘실 만경(萬頃)의 물결과 같아 맑게 해도 맑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리지 않으니 그대와 더불어 이야기함이 성(聖)과 즐겨함만 못하이.” 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나의 주변을 살펴보면 이러한 청소년들이 많이 있다. 즐겁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見素抱의 모습으로 局量을 지닌 젊은이들은 동량지재(棟梁之材)의 자격이 있다. 이러한 젊은이들이 많아지려면 올바른 처신을 하는 어른들이 우선 많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요언비설(妖言蜚說)로 젊은이들을 꾀어내어 학문에 힘쓸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그들은 ‘생명’, ‘평화’, ‘보존’, ‘인권’ 이라는 누구든지 수긍할 미명(美名)을 앞세워 젊은이들의 인생과 나아가 나라를 좀먹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에코파시즘(Ecofascism)도 이런 예의 하나이다.

넓게는 지구, 좁게는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불사하는 전체주의 사상, 즉 에코파시즘(Ecofascism)은 독일의 나치즘에서 시작되었다. 나치스는 정권을 수립할 초기 단계부터 '동물보호법'(1933), '국가수렵법'(1934), '국가자연보호법'(1935)  등 환경을 배려한 법률들을 차례로 제정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동물학대를 금지하는 것에서부터 야생동물의 서식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관목 숲이나 잡목림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까지 다방면으로 언급하고 있다. 예컨대 인류 최초의 자연보호법이라 할 수 있는 라이히 자연보호법(Reich Nature Protection Act)의 핵심은 ‘영원한 숲(Dauerwald)’ 이었다. 이는 나치의 환경이념으로 격상되고 순수 아리안족의 보호를 위해 유태인을 학살하는 이론적 명분이 되어 전 유럽을 도살장으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에코파시즘은 생태계 보호를 위해서는 인간마저도 배제할 수 있다는 '생태중심주의' 이다. 심층적 생태주의의 가장 큰 운동 진영인<Earth First!>는 인간이 다른 자연의 종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면서 ‘어머니 지구를 지키는 데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는 문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환경보호를 위해서는 테러와 폭력도 불사한다.註1)

  註1)그린피스가 북극해에서 고래잡이 포경선의 어업을 방해하는 수준이라면 ‘어스 퍼스트’는 포경선을 폭침시키는 전법을 쓴다. 이 ‘어스 퍼스트’ 의 편집장 존 데이비스의 발언은 유명하다. 그는 2000년 중반 한 저널에 “종(種)으로서의 인간은 벌레만큼의 가치도 없다” 라고 했고 다른 저널에서는 “에이즈가 인류 감소를 초래하기 때문에 찬성한다.” 라는 표현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한정석

 

  브라질 산림의 예

대기 중에 포함되어 있는 산소는 바다 속 식물성 플랑크톤이 50%를 생산하고 육상의 숲과 해조류가 생산하는 산소는 30%에 불과하다. 특히 남극 바다에 서식하는 식물성 플랑크톤들은 낮은 수온의 영향으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한 채 바다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리기 때문에 남극 바다는 이산화탄소를 저장하는 창고 역할을 한다. 그런데 지난 100년간 바다에 사는 식물성 플랑크톤이 40%나 감소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지난 2006년 7월 29일 네이처지에 실린 한 논문에서 나온 과학적인 분석결과이다. 논문은 식물성 플랑크톤 감소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바다 표층 온도의 상승을 꼽고 있다. 이는 지구온난화 때문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핵발전소 폐기운동가들이 이를 모를 리가 없지만 환경단체들은 그들의 전략적 모멘텀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모르는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브라질 산림은 무분별한 벌목으로 매년 280만 평방미터의 삼림이 벌채되고 있다고 한다. 알다시피 이 지역의 산림에서 발생되는 산소는 지구 전체의 1/4에 달한다고 한다.註2)  문제는 무분별한 벌목이 선진국에 의한 생태파괴라는 오해가 불식되지 않는다는 사실인데 그 내막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대량의 광물과 목재, 목축업 이것만으로도 이들 지역이 브라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브라질 정부에 의한 개발이 가장 큰 원인이고, 밀렵이 급증하면서 밀렵동물을 매매하거나 목축업에 종사하는 목축업자들이 거액의 보상금을 노리고 목축지를 과다하게 확장하거나 농지 개간을 목적으로 화전을 만드는 현지인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막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 예컨대 브라질 정부에 산림보호를 담보하는 보상금을 지불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으나 이는 각 나라마다 복잡한 형편이 얽혀서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브라질 국민의 호주머니 사정이 좋아지게 하는 도움이 필요하다. 결국 생태계 보호를 위해서는 생태중심주의나 맹목적인 자연보호 운동보다는 체계적인 개발이 ‘영원한 숲(Dauerwald)’ 을 가꾸는 지름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註2) 지구 온난화로 인한 날씨 변화와 기온 상승의 악순환으로 인해 아마존이 말라가고 있고 해마다 20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온 아마존이 지난 2005년부터는 오히려 매년 30억 톤씩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있다. 2009-03-27 07:38 SBS 뉴스

 

우리나라의 환경 파시즘

2003년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유치 문제로 주민과 경찰이 충돌해 4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부안방폐장’ 이 경주로 가버리자 부안군민들은 환경운동가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2003년 4월 25일자 전라일보는 ‘방폐장 사태 외부세력이 좌우’ 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주민과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세력이 마치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유언비어마저 서슴지 않는다.’ 라고 비판했다. 당시 주민들의 평화적 토론은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반미, 종북 단체들의 선동으로 폭력화됐고 환경운동과 사회주의가 결합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저명한 에너지 경제학자 엡스타인이 “과거 사회주의는 붉은 옷을 입었지만 지금은 녹색이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라고 한 말은 바로 이 생태주의가 어떻게 사회주의를 포섭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후 국책사업마다 단골손님으로 등장하여 국책사업을 망치는 방해꾼들의 등장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방해꾼들은 주장은 항상 똑 같다. “우리는 환경보호를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사상, 결사, 집회, 표현의 자유를 실천하기 위해 투쟁한다.” 는 것이다. 그런데 내막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북한산 끝자락의 사패산 터널 문제로 장기간 농성을 벌인 자들이 불법폭력시위로 천문학적인 국민혈세를 낭비하게 한 뒤 막판에 가서 시공업자에게 거액의 돈을 받아 챙기다 사법부에서 심판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염불보다 젯밥’ 에 눈독 들이는 환경보호단체와 정체모를 시위자 틈에는 성직자들이 끼여 있는데 이들과 궤를 같이 하는 종교계의 ‘어르신’ 까지 나서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알쏭달쏭한 일이다.

 

두려운 이유

영광 원자력발전소, 인천국제공항, 천성산의 도롱뇽, 새만금방조제 등에 대하여 시공이 끝나고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조사해보면 환경보호단체와 그들 사이에 끼여 있는 ‘성직자’ 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선적인지 당장에 알 수 있다. 한 번 검색해보기 바란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두렵다. 현재 진행 중인 국책사업들은 분명히 성공작이 될 것이다. 나는 현 대통령에게 표를 주지도 않았고 그가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한 대통령은 아니었다고 보지만, 그가 재임 중에 시작한 국책사업들은 결국 성공할 것이라고 본다. 한미 FTA만 해도 그렇다. 인터넷 공간에는 설익은 지식으로 국민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고 있지만 모두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자료들이 대부분이다. 일례로 멕시코가 NAFTA로 인해서 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NAFTA체결 당시의 멕시코의 경제상황이 어떠한 상태였는지, 그래서 어떠한 시련이 닥쳤는지, 그리고 현재의 멕시코의 상황은 어떠한지는 멕시코 국민, 대통령과 장관들이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발언을 잠시만 읽어보면 파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한미 FTA를 반대하는 비이성적인 행태에 슬픈 생각이 들 정도이다. ‘사목자적 고뇌’ 와 ‘예언자적 판단’ 을 하기 이전에 양심부터 갖추어야 한다.

우리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로 규정되어 있다.

양심의 자유란 삼라만상의 시시비비나 선악과 같은 윤리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아니되는 내심의 자유와 이와 같은 윤리적 판단을 국가권력에 의하여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제받지 아니할 자유까지를 포괄한다.

이 세상에는 별의별 인간들이 살고 있다. 심지어 미사에 뛰어들어 사제의 손에서 성물을 빼앗아 강물에 던져 버리는가 하면, 설교단에 뛰어올라 사제를 걷어차 버리고 신교의 가르침을 목청껏 떠드는 등 신교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라는 사람인데, 그래도 그의 노력?에 힘입어 1535년 8월, 당시의 제네바 의회는 로마 교회를 이단으로 선포하고는 미사 금지와 성상 파괴를 지시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면서 미사 도중에 이러한 행동을 한다면 용납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양심의 자유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당사자에게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양심의 자유는 신앙의 자유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종교지도자 또한 일반인의 양심의 자유를 침범할 권리는 없다. 이는 내심적 자유뿐만 아니라 양심실현의 자유를 포함한다. 종교지도자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해군기지건설에 반대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 라고 주장한다면 다른 사람의 양심을 강제하는 침범이 되고 그 교회는 이미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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