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선과 악, 그들의 차이

스크랩 인쇄

정광식 [guten1273] 쪽지 캡슐

2012-03-19 ㅣ No.171

-미국 제8군 사령관 밴프리트가 한말:

"한국전쟁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그것은 아주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곳에서 일어나 준 적당한 전쟁이었다."

(a right war at a right place and at a right time)

-미국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얼마나 기뻐하는 지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이 발언에서 '적당한 곳'이란 중국과 소련을 견제할 위치를 말하고, '적당한 시기'란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거대한 군수산업이 불황의 늪에 빠져 있어 어디에서건 전쟁이 있어 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런 시기를 말한다. 이런 시기에 한국에서 전쟁이 났으니 미국으로서는 정말 '적절한 전쟁' 이 아니겠는가? (정경모의 <찢겨진 산하>참조)

 

이 글은 미국을 비판하는 데에 열을 올리는 어떤 사람의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 사람은 정경모라는 사람이 쓴 글을 아무런 검증도 없이 그대로 받아쓰고 이를 ‘근거’ 로 하여 반미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 정경모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조사해보니 다음과 같다.

 

정경모 鄭敬謨, 1924~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교 의학부, 서울대학교 의대에 다니다가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미국 유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주미대사 장면의 요청으로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GHQ)에 소환되어 문익환, 박형규 등과 함께 근무했다. 휴전회담 당시 통역업무를 맡는 등 한국에서 지내다 1970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40년간 망명객의 신분으로 문필활동을 통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지원했다. 일본에서 1981년 한국문제 전문지 <씨알의 힘>을 발행했고, 1991년에는 일본의 평화와 조선의 통일을 생각하는 ‘씨알의 힘’ 모임을 발족하여 기관지 <씨알>을 펴내왔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역사적인 평양 방문을 결행하여, 6·15남북공동성명의 초석이 된 4·2공동성명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현재 요코하마에서 5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한 아내와 살고 있다.

 

나는 <찢겨진 산하> 라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정경모라는 사람을 비판할 생각도 없고 자격도 없으나 밴플리트 장군이 과연 서두의 말을 했는지 국방일보를 찾아보았다.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밴플리트는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발언을 거론했다. 즉, 브래들리가 6·25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벌어진 잘못된 전쟁”으로 규정했는데, 이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브래들리의 발언에 대해서 극동군사령부의 여러 고위 장교와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서도 밴 플리트 장군과 같이 강하게 반론을 펴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이 인터뷰에서 밴 플리트 장군은 6·25전쟁을 결정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는 공격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자, 물어봅시다.”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민주주의 국가가 적합한 전쟁의 장소를 선택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민주국가란 항상 잘못된 곳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입니다.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민주국가들은 결코 그들이 선택하는 곳에서 전투를 벌일 수는 없습니다. 민주국가들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전쟁을 절대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란 공격을 받았을 때, 공격을 받은 곳에서 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상은 국방일보 2010.06.10자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정경모라는 사람이 다닌 서울의대나 에모리대학이나 잘 알려진 대학이지만 이 학교의 동창들은 정경모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에모리의대를 나온 친구에게 물어보니 “모른다. 아마 콜라를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지.” 하면서 낄낄 웃는다. 에모리대학이 코카콜라와 관계가 많단다. 그런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지만 그가 아직 살아있는 것 같아서 언제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나?” 하고.

 

아직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더 설명해 주겠다. 즉 6.25 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벌어진 잘못된 전쟁’ 이라고 규정한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십거리로 삼아,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전쟁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그것은 아주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곳에서 일어나 준 적당한 전쟁이었다.’ 라고 한 듯이 교묘하게 없는 말을 만들어서 둘러친 것이다.

이런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은 제법 가방끈이 길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착각에 빠지도록 요술(妖術)을 쓰는 데는 귀신이다. 여러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특정부분만 따온다든지 불확실한 정보를 기반으로 한 오류를 퍼뜨리고는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식적 기반이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격물(格物)하여 치지(致知)한 전문가에게 대항하자니 방법은 한 가지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문가와 직접 대면하여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전문가들이 만든 자료들을 차용하여 게재(揭載)하고 사회적 이슈로 만든 다음 어리석은 사람들이 서로 헐뜯게 만드는 것이다. 이건 ‘사실’ 이라기 보다는 ‘선전소설’ 에 가깝다. 이후 자석에 달라붙는 쇠가루처럼 이들을 이끌고는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선택을 강요하고 프로퍼갠더(propaganda)로 끌고 간다. 일례로 <꽃 파는 처녀>라는 북한 소설은 특정한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에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를 명백하게 강요하는 성명서이지 소설이 아니다. 우리 천주교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에 몰두한다. 창피한 일이다. 여담이지만 나의 경우에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마누라가 볼까봐 몰래 쓰고 있다. 천주교 세례를 받은 지 거의 40년이 되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좋지 않은 면에 대해서 쓰는 것을 발각이라도 된다면 몰매 맞을 각오를 해야 하는 환경?에 있는 필자를 불쌍히 여기길 바란다. 오 마이 갓.

 

밴플리트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6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다. 도덕 책에 실렸으니까.

그의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옮겨보았다.

 

 

'밴플리트' 장군과 그의 아들

밴플리트 장군은 6.25 전쟁 때 워커 장군의 뒤를 이어 駐韓 美 8軍司令官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는 미국 전사에서 전쟁영웅으로 추앙 받는 군인으로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 에 참가하였으며 유명한 발지전투를 지휘한 사단장이었고 프랑스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인이다. 그가 한국전선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8군사령부 참모 중에 한 장군이 ' 한국전쟁은 희망이 없으니, 동경으로 철수하자.'고 건의를 하자, '나는 승리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나와 함께 일하기 싫다면 당장 집으로 보내 주겠다.' 라고 말해 한국전선에서 해이되어 가는 미군의 전투군기를 확립시켜 놓기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였으며, 이승만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 공산군을 물리치고 한국군을 현대화하는 일에 혼신의 정력을 쏟았다. 특히 그의 아들은 B-26폭격기 조종사로서 1952년 4월 4일 새벽 3시경 북한의 순천지역에서 야간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의 대공포에 맞아 전사하였다.

밴플리트는 그날 오전 10시 30분경 공군사령관으로부터 아들의 전사소식을 들었지만, 아무런 동요도 없이 다음날 한국군 2군단 창설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밴플리트 2세'는 공군 중위였으며, 그의 아들 지미는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본국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해외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 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들을 데리고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 3월 19일은 밴플리트가 만 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父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4월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 짐이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 4월 4일 오전 10시 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동료는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 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다와 접촉했다. 지미는 主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전선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註1)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 벗은 미국 국민이기도 할 것이고, 남침을 당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밴플리트의 아들은 자원해서 한국에 왔다. 동포가 아닌 他國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 젊은이에게 살아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들 중에는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가 있고,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저의 의무입니다.' 라고 끝을 맺었다.

 

이것은 그의 생애 마지막 편지였다.

 

註1) 요한 15;13



69

추천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