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신부님들께서 보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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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자살이라는 죽음의 방식을 바라보는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일부 신부님들의 시각 및 공식적인 발언의 내용,
그리고 그것이 일반 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우회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좀 긴 글이니... 시간 되실 때 천천히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뜻을 최대한 전달하고 오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예를 먼저 들겠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오해받고... 오해받아서 돌 맞고... 돌 맞아서 가슴 속에 피 터지고
그런 일이 한두번도 아닌데, 저는 아직도 적응이 안되는군요.
저는 영화배우 이은주를 무척 좋아했었습니다. 아니. 사랑했었던 것 같습니다. 명확한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연기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배어나오는 듯한 슬픔을 느낄 수가 있었고 그 애절함이 제 가슴에 깊이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2005년, 그녀가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을 때
저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었는지 모릅니다. 사흘 정도는 아무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고 멍한 상태였습니다. 왠지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나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의 슬픈 연기를 보면서, 나 자신을 너무 투영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배우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유독 그녀에게만 감정이입이 잘 되었고, 그래서 왠지 그녀가 나의 분신 같고... 그런 느낌을 갖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녀의 죽음 후, 4개월 정도 지났을 때
제가 이 게시판에 “그래도 죽지는 말고 살아만 있자” 라는 제목으로 한편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야말로 개인적인... 한 편의 감상문이었습니다. 그 글에 대해 달아주신 한 분의 댓글을 읽고 약간 서운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의 시각으로 보면 자살이 얼마나 중죄인지...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댓글이었는데요... 당연히 맞는 말씀이지만, 왠지 서운하더라구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라서일까요. 아무리 그 죽음의 방식이 옳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좀 따뜻한 눈으로 보아주시면 좋을텐데... “안타깝지만 그녀는 중죄인이군요.” 라는 어조로 남겨주신 글이...
너무 냉정하게 느껴져서 못내 서운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할 말이 없더군요. 그녀가 선택한 죽음의 방식이 옳지는 않았으니까요. ..................... 그런데 최근에 또 한 사람의 자살이 발생하면서 이제까지와는 참 다른 시각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때 그때 달라요~~~~
이건 개그에서 활용된 유행어이긴 하지만... 정말 우리 삶을 잘 나타내주는
섬찟한 말인 것도 같습니다. 예전에는 “가톨릭 신앙의 시각으로 보면 자살은 중죄”라고 말씀하셨던 분들이
이번에는 그런 말씀을 전혀 안 하시더군요. 오히려 어떤 신부님은 그 죽음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고백... 그 스스로 하늘의 명령을 오히려 앞당기며 삶과 죽음을 넘어 초탈의 경지에서 결단했다.” 이렇게 표현하시더군요.
또한, 이번 일이 있기 전에는 자살이라는 행위가 죄악이라는 데에 서슴지 않고 동의하셨던 많은 분들이,
이제는 자살이라는 명제 자체에 너그러워지신 경우를 많이 봅니다.
더구나, 신부님들께서 그러시는 경우를 보면... 저는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살하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죽어라 이를 악물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보니 자살한다고 영혼이 멸망하는 것은 아닌가보구나. 얼마든지 정상참작이 가능하구나.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니까 이런저런 사정을 참작하여,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자살했다면, 구원해 주시겠구나. 너무 안된다고만 생각할 것도 아니겠구나.“ 이렇게 마음을 느슨하게 갖게 됩니다.
물론 이렇지 않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만... 솔직히 저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너무 진지하고 예민한 사람입니다.
저도 삶을 즐기고 싶지만, 성격상 즐기기보다는 견디어나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내가 있는 어디에서도...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데...” 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인지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저에게 100%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싯귀였습니다. 죽고 싶은 순간은 너무나 많습니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너무 벅찹니다. 이 세상 나그네길은 고행의 길... 기쁨보다 슬픔과 고통이 많은 길... 그 길을 걸어가며... 하느님의 사랑을 절실히 깨닫게 된 1996년 이후로는 한번도 자살할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사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기는 내키지 않지만
제 영혼이 하느님을 영접했던 1996년 그 당시 저는 자살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드는 충동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구체적인 계획을 짰고... 의외로 아주 담담한 마음으로 실행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하느님은... 내가 말로만 믿는다고 했던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손수 보여주셨습니다.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 날 이후로,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
타인을 위한 죽음이라 해도... 꼭 내가 죽어야만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노력함으로써 타인을 돕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당연한 그런 경우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비난하고자 올린 글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역시 비난하는 글이라고 밖에는 해석 안되는 분들도 있겠죠) 죽은 이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가 나쁘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도자적인 위치에 계신 분이
바람직하지 못한 죽음의 방식을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써 힘겹게 삶을 견디고 있는 신자들의 굳건한 믿음을 흔들리게 하고 느슨하게 하여 “뭐.. 정 못견디겠으면 자살해도 괜찮겠구나. 우리 가톨릭에서도 다 봐주겠구나.”
이런 식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한다면 감히 제가 이렇다 저렇다 할 일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판단해 주실거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2005년에 제가 이은주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올렸던 글을
다시 한 번 게시하면서 마무리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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