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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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답하기 천주교 ㅣ 성경 ㅣ 7성사 통합게시판입니다.

q 나는 누구의 이웃이어야?/착한사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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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3-01-22 ㅣ No.6619

제가 평소에 즐겨 애용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묵상 내용입니다.
이곳 '굿뉴스'에 언젠가 소개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한번 더 '천국 가는 길'을 묵상하면서 소개코자 합니다.

세상에 독불 장군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웃 선정을 누구 마냥 자신을 기준으로만 사는 이가 있더군요.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라고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죠.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이웃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나는 누구의 이웃이어야?'라고 해 봤습니다.


내용이 좀 깁니다.
그래도 좋은 묵상거리일 것 같아, 아니 천국 갈 수 있는 지름길일 것 같아 소개해 올립니다.
짜증이 나셔도 가볍게 봐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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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하여야 할 이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이냐는 질문을 자주 되씹으며 산다.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은 대단히 칭찬할 일이다.
배려하는 것과 봉사하는 것은 믿음의 본질이요 사랑 그 자체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 많은 봉사와 배려를 하려고 한다.
이것들을 누차 강조하는 것은
그것들 자체가 믿음의 삶에서 기본적으로 큰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이 같은 봉사와 배려의 실천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나에 대해서인가? 아니면 남에 대해서인가?
여기에 대한 우리의 답은 그리 시원스럽지 못하다.
그 이유는 그것을 항상 나에 대한 기준으로 ‘그 남’을 ‘이웃’으로 정하기 때문이다.
남의 것보다는 나의 기준으로 봉사와 사랑을 줄 대상을 먼저 계산하고 재단하여 정한다.
그래서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라고 자주 질문을 한다.
또한, 강력한 직유법을 써가며, ‘이웃 사랑을 내 몸같이 하라.’라고 외친다.

사실 정의로운 사회 건설은 복지 사회의 구현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이유에서 ‘너는 너요, 나는 나요.’가 아닌 ‘우리’라는 것을 짐짓 강조한다.
그래서 ‘이웃 사랑을 내 몸같이!’라는 구호가 곳곳에 부착되어 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이 말은 불변의 진리이다.
복음에 ‘남’이 나의 ‘이웃’으로 정해질 때 적용하는 기준으로
그 구체적인 사례가 분명히 나타나 있기에 한번 묵상해 보자.
 

어떤 율법 학자가 예수님을 율법적으로 따돌리고자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선생님이라 호칭한 것도 파격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과 같은 고차원적인 문제를 논쟁의 수작으로 끄집어낸 것 자체가
율법 학자 자기 과시의 전유물이었다.
당시에는 유대교의 본질인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여러 율법을
어릴 적부터 무수히 가르쳤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우리에게도 영원불멸의 과제일 게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얻고자 사신을 동방의 끝까지 파견한 사실이라던가,
무덤 내에서도 영생을 누리고자 피라미드와 같이 불멸의 건축물을 구축한 것만 보아도,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에게 영원불멸한 진리의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예수님은 이 당돌한 율법 학자의 물음에 즉석에서 답하는 대신 되레 질문하셨다.
“그래, 율법에는 어떻게 적혀 있고, 너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였느냐?”
적혀 있는 내용도 그 해석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율법 학자에게 이러한 내용을 질문하는 것 자체가 해묵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것은 사법 고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헌법 전문’을 한번 이야기해 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아주 기초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이 일은 이, 이이는 사와 같은 구구단 암기랑, 태정태세문단세…와 같은
역사 과목 암기와 같이 어차피 학생의 신분이면 필수적으로 암기해야 할,
우리네 학생들의 기초 분야와 같은 것이기에.

율법 학자는 누워서 죽 먹기인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였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또, 마음과 생각과 목숨을 다하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거침없이 외웠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이런 율법 암기는 필수였으리라.
어렸을 때부터 암기하지 않고는 생활 그 자체를 누릴 수 없는 처지였기에,
그는 정말 자랑스럽게 줄줄 암기하였다.

“모든 것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또, 모든 것을 다하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 맞다. 너도 그대로 하여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라.”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논쟁해서 곤경에 빠지게 하려고 작심한 율법 학자에게,
그리 긴 설명이 그다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첫째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가 이웃 사랑을 하면 된다.
그것도 마음과 생각과 목숨을 다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또, 모든 것을 다하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것은 진리 중의 진리이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진리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우러러보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했는데 어찌 그의 이름이 우리의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겠는가!
이러한 성인이야말로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도 있다.

그러면 하늘을 우러러보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 사람이
우리네 사회에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예수님 말고 이러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이 과연 존재나 했겠는가?
예수님은 경천애인 그 자체를 삶의 기준으로 하고 실천하신 분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신지 3일 만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다.

가사, 우리 일반인들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였다 하면,
육신은 죽어도 그 이름은 두고두고 모든 이의 뇌리에 남을 것이다.
비록 그 육신은 썩어도 그 이름만은 영생을 누릴 것이다.
아니 그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발자취는 언제나 우리 곁에 남아 삶의 지표가 될 것이다.
 

“그래, 맞다. 너도 그대로 하여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라.”라는
이 예수님의 명답에 율법 학자는 다시 논쟁거리를 만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불변의 진리를 인간의 각도에서 자기가 옳다고 뽐내는 것은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는 얼마나 하찮은 것임에랴!
그렇지만, 율법 학자는 법률적인 용어의 구분에 대한 하찮은 질문으로
시시비비를 따져 보자고 덤비는 것이다.
이왕 논쟁은 시작되었고 어차피 결론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율법 학자이고, 예수라는 사람은 어부 출신 몇 사람과 어울려 다니면서,
자칭 구세주라 주장하는 볼품없는 사람으로도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학벌 없는 작자와 조금 고차원적인 논쟁을 해서
콧대를 꼭 꺾어야겠다는 그 나름의 심산이 있었다.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간결하면서도 대답하기 어려운 아주 타성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지금 우리가 아무 부담 없이 던지는 우리 자신의 질문이기도 하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또, 모든 것을 다하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려면,
굳이 이 이웃을 선정하여야 한다는 그 자체가 아주 비인간적이다.
이웃은 언제나 우리의 주위에 있다.
이웃이 나의 이웃이고 나 역시 남의 이웃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우리는 이 이웃을 정할 때 항상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려 한다.
모든 대상을 나의 기준에 두고 정한다.
율법 학자 역시 이러한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
‘이웃’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하자면서 예수님과 감히 맞서고 있다.
그는 자신의 우월감을 마치 과시라도 하듯이,
자칭 ‘메시아라는 너는 알고 있느냐?’라는 속셈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지게 덤비는 것이다.

이 질문의 핵심은 나의 이웃과 나와의 관계이다.
나의 이웃 선정 방법에서
이웃 그 자체보다 나의 관점으로 ‘그 이웃’을 ‘나의 이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 이웃’이 ‘나의 이웃’이 아니고,
내가 ‘그의 이웃’이 되는 이상한 ‘사랑’으로의 변질이 간혹 발생한다.
그건 ‘그이/그녀만 받고 내가 주는’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그도 받고 나도 받는’ 계산적으로만 보여주는 사랑이 된다.
율법 학자는 이웃에 대한 이런 ‘가진 자만이 가진, 이 관행적으로 내려온 단순 논리’로,
너는 ‘나만큼 알고 있는가?’라며 건방지게 도전하는 것이었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라는 질문은 달리 말해,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느냐?’와 일맥상통하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들어 명쾌히 설명하셨다.
율법적으로 맞대응하면 또 다른 논쟁의 소지만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런 소인배들과의 논쟁에만 매달릴 만큼 많은 시간을 가지시지 않으셨다.
우리 인류의 구원 사업을 위해 할 일이 너무나 많으셨다.
그래서 실제 상황을 들어 그 소인배인 율법 학자의 질문에 화답하셨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향하는 행인이 있었는데,
그는 산적을 만나 가진 것은 죄다 빼앗기고 초주검이 될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이 행인의 현재 상황은 어떤 처지인가?
누군가가 도와야 할 처지이다.
자, 누가 이 행인을 도왔는가?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 세 사람을 등장시킨다.
이 세 사람 모두 초주검이 된 행인의 주위를 지나간다.
사제와 세리,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제는 아마도 미사 집전하러 가다가 볼 수도 있었고,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서 돌아가고,
사마리아 사람은 일하러 가는 중일 수도 있었다.
다만, 세 사람의 직업은 분명히 달랐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나 신분도 달랐다.
 

사제는 가다가 보고서는 피해서 달아났다.
분명히 초주검 상태인 사람이 쓰러져 있었는데도 멀리서 보고는 피해 달아났다.
왜 달아났을까?
사제는 쓰러져있는 이 행인의 꼬락서니가,
혹시 죽은 사람이 아닐까 하여 달아났는지도 모른다.
성스럽다고 여기는 미사 집전을
시신을 보고는 지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제다운 율법 논리를 가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차마 다가가서 그 시체를 직접 확인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이런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는 보고는 피하여서 그의 갈 길을 재촉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극도의 도움이 필요한 행인을 가다가 보고는,
부정을 타지 않으려고 보고는 지레짐작하고 달아났다고 여겨진다.
미사 집전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한, 사제 본연의 본분을 지킨 진정한 사제일 수도 있다.
 

한편, 세리는 어떠하였을까?
그는 가다가 다가가서 보고는 피해서 달아났다.
가서 보고는 분명히 확인하고 달아났다.
왜 다가가서 보았을까?
그 시각에 재수 사납게 그 꼴사나운 것을 목격한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다가가 보면 혹시라도 후일을 위한 알리바이라도 건질 수 있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확인하고는,
이 정도면 자신의 지나침조차 모르는
초주검 상태라는 것을 확신하고 달아났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계산이 빠른 그는 확인이 필요하였고,
그리고는 안심하여도 될 것으로 믿어 달아났을 수 있었다.

아무튼, 세리는 행인의 그 어려움 처지를 안중에 두지 않고,
오라 가라 귀찮게 구는 자신의 난처함을 생각하여
다가가서 확인까지 하고는 피해서 달아났던 것이다.

 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하였을까?
그는 가다가 보고는 혹시나 하였지만 즉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행인의 초주검 상태에 대해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응급 치료를 하고는 자기 나귀에 싣고
가까운 여관으로 데리고 가 밤새도록 치료를 하였다.

이튿날 아침 갈 길이 바빠 여관 주인장한테 행인의 치료를 부탁하고는,
가진 돈 두 데나리온을 치료비에 보태어 쓰라고 주었다.
두 데나리온은 우리네 돈 가치로는 이틀분의 노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치료비가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부족한 것을 갚아 주겠다고 하고는 길을 떠났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과의 관계를 한번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두 민족 간에는 큰 앙금이 있는 관계이다.
유대인에게는
사마리아 사람은 변방 민족으로 항상 멸시하여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이였고,
유대인에게 항시 괄시만 받고 살아오는 사마리아 사람 처지에서 보면,
유대인이라고 하면 다소간 몸서리치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나쁜 사이였다.

그런 유대인이 길거리에 초주검 상태에서 쓰러져 있는 상태일 진 데,
보통의 사마리아 사람이라면
그래 그 꼬락서니 좋다 하고는 한두 번 발길질하고는 달아날 수도 있는 처지일 수도 있었다.
그러한 관계에 있는 사마리아 사람이 초주검 상태의 유대인을 보자마자,
단번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는 그 자체가 착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성경도 이 이야기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적고 있다.
그는 그 유대인을 치료하는 데 모든 배려를 다했다.
그 행인의 어려운 처지를 가장 현실적으로 도와준 사람이었다.
즉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 사람이었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으로 모든 것을 다하여 초주검이 된 행인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여겨진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 학자에게 물었다.
“이 행인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냐?”
율법 학자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하고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세 사람의 예를 드시고는, ‘이 행인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냐?’라고 되물어보셨다.

우리는 흔히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고 생각하기보다는,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느냐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분명히 물으셨다.
‘이 행인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였느냐?’이다.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해서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하고,
이웃을 차선으로 생각하기가 십상이다.

사랑은 아낌없이 행할 때만 값진 것이 된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여유 있을 때 행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 학자는 “그 행인에게 사랑을 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 맞다.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과 율법 학자와의 논쟁은 이렇게 끝이 났다.

누가 이기고 지고가 문제가 아니다.
논쟁 그 자체에 대해 논쟁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하는 그 사랑에서,
우리는 진정 나를 필요로 하는 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고 생각하기보다,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예수님의 질문과 같이,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자.
그리하여 나의 도움을 필요로 느끼는 사람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자.
사랑은 받을 것을 기대하고 주어서는 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나한테는 불이익이 될지언정 조건 없이 주어야 한다.
거저 주었을 때의 그 보람은 언제나 값진 것이 된다.
준 것에 대한 혜택도 그렇다.
그것의 보상으로 수반되는 혜택이라면 지금이 아니라도 좋다.
후세의 누군가가 받는다.
주위에 불쌍한 처지에 계신 분이 있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사랑하자.
우리는 모두 나를 필요로 하는 그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또, 모든 것을 다하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누리는 최대의 첩경이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하느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히 영생을 누릴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웃을 나의 기준보다는 이웃의 기준에서 정해야 한다.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우리는 지금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자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진정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느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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