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어느 정치신부(??)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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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일수 [paulk] 쪽지 캡슐

2012-03-14 ㅣ No.19

프랑스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어 한다는 삐에르 신부님.

마더 데레사와 함께 20세기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는 신부님.

"피에르 신부의 유언"

2005년당시 94세이신 노 사제의 유언이 무었이었는지 사뭇 궁금해 집니다.

한번 읽어 보면 어떨까요?

 국회의원도 하셨네요. 우리나라 같으면 큰일나겠죠??

 ps : 웅진씽크빅에서 발간한 책입니다. 너무 안팔려서 지금 재고는 많이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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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 사이에서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일컬어 지는 피에르 신부님은 1912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나 19세에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카푸친 수도회에 들어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항독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투사였으며,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엠마우스'' 라는 빈민구호 공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집없는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함으로써 ''살아 있는 성자'' 로 불리며 전세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 피에르 신부에 대하여


[그는 어떻게 신부가 되었나]

프랑스 리옹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그 많은 유산과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서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다. 그가 수도사가 되기로 마음먹기까지는 신앙이 돈독한 집안환경도 환경이지만 그의 마음 밑자락에 깔려 있던 종교인으로서의 성정과 두 번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열네 살, 성실한 보이스카웃 단원이었던 그에게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인 <명상하는 해리>는 무엇보다 유년시절 피에르 신부의 면면을 적절히 말해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열네 살짜리 남자아이들이 이 이름을 내게 골라준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앞으로 나는 집을 짓기 위해 평생을 바쳐 싸우게 될 터인데, 해리는 집을 짓는 동물이고, 명상은 나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니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로마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들른 <카르세리 수도원>에서 ‘한 수도사로부터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에 대해 듣고 난 뒤’ 결심을 굳힌다. 그는 그때부터 ‘맨발로 지내며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고, 매일 밤 자정에 깨어나 한 시간 가량 시편을 암송하고 다시 한 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 기도드리는’ 수도사로서의 생활에 전념하며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남다른 이력, 레지스탕스와 국회의원]

피에르 신부의 이력은 남다르다. 그중에서도 사제라는 신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투사였다는 점이 이채롭게 다가온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믿고 내 가족, 내 나라, 내 민족을 넘어서 인류는 한 형제라고 생각한 그를 떠올려볼 때, 배타적 민족주의와 인종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싸움을 그냥 지나쳤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답지 못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1941년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기 시작한 피에르 신부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레지스탕스에 가담하면서 내 삶과 신앙에 새로운 한 장이 열리게 된다. 솔직히 말하건대 그 선택에는 정치적 동기라곤 없었다.’ 쫓기는 유대인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그는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고, 헌 신발을 신은 유대인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어주고는 맨발로 눈길을 걸어 돌아오고, 동료의 밀고로 독일군에게 체포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 등,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시작으로 그는 지금까지 궁글려왔던 자신의 사유와 말을 차근차근 행동과 일치시켜나가기 시작한다.

또 하나의 독특한 이력인 국회의원 활동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이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 부조리와 불합리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정치적인 힘에 호소했다. ‘나는 국회의원으로 지내면서 아주 단순한 사실 한 가지를 터득했다. 정치인들의 할 일은 근본적으로 누구에게서 돈은 얻어내어 재분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엠마우스, 더불어 사는 기쁨]

전쟁 후 국회의원 활동으로 뇌이-플레장스에 머물던 피에르 신부는 어느날 자살을 기도한 사람과 얘기를 나누게 된다. 신부는 섣부른 위로와 도움 대신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집짓는 일을 도와달라고 청한다.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되찾은 그는 후에 이렇게 말한다. “신부님께서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푸셨더라면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상처입은 독수리들’이라는 생각 아래 피에르 신부는 자신이 살던 집을 개조해 그곳에 집 없는 사람들과 부랑자들, 그리고 그 당시 넘쳐나던 전쟁고아들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엠마우스’라고 명명한다. 현재 44개국 350여 곳으로 확산되어 있는 ‘엠마우스’는 단순한 자선단체가 아니다. 그곳에는 세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우리가 먹을 것은 우리가 노동해서 번다. 둘째, 우리는 모든 걸 나눠가진다. 셋째, 멸시받고 소외된 주변인들인 우리는 베푸는 사람이 되는 사치를 누리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한다.
즉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곳을 찾은 구성원들은 조건 없이 도움만을 받기보다는 땀흘려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하고, 사회로부터 받은 도움을 다시 사회로 환원할 줄 아는 존재로 거듭나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당당하게 말한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우리도 마음을 담아 나누고 구원을 베풀 수 있는데,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한 여러분이 그런 일을 못할 게 뭐 있습니까.”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 피에르 신부]

공동체 형제들과 ‘엠마우스’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며 여전히 집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던 피에르 신부는, 1954년 방송국과 텔레비전을 찾아가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실상을 호소했고, 이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얘기는 1989년에 세자르영화상을 수상한 영화 <겨울 54(un Hiver 54)>에서 자세하게 다뤄졌다.
그는 외부적인 사안뿐만 아니라, 자기자신 혹은 교회와 성직자가 범한 오류도 과감히 질타하는가 하면, 법을 어기고서라도 집 없는 자들에게 집을 지어준다. 그러나 그가 목소리 높여 비판하고, 논쟁을 만드는 것은 싸움을 좋아해서도, 어떤 대가를 바라서도 아니다. 그가 약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세상의 저열함에 진정으로 분개하고, 온갖 부정과 부패와 불의와 불평등에 무감각해져 있는 우리들의 근시안을 깨우쳐주려는 것은 오직 하나,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몸소 실천으로 옮겼기에 그의 메시지들이 아무리 원론적이고, 평범한 것들일지라도 결코 공허하거나 평범하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타인은 지옥이다, 라고 사르트르는 썼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한다. ‘유일한 신성모독은 사랑에 대한 모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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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네이버 인물세계사에서 펌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6923

다른 사람들과 달리 피에르 신부에게는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모순적인 면과 때때로 나타나는 까다로운 부분, 오만, 분노, 고집, 솔직함, 참을성 없는 성격, 규율을 지키지 않는 태도, 부랑배라고 손가락질 받는 떠돌이들을 옹호하고 강자들을 당황스럽게 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모습, 그리고 유머와 겸손 등을 지닌 그는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다. 한 마디로 그는 진정한 깊이를 지닌 인간이다.”

-데니스 르페브르

 

 

 

수도사에서 사제로, 그리고 레지스탕스로

'피에르 신부'(아베 피에르)라는 이름은 이 유명한 빈민운동가의 본명이 아니다. 그의 본명은 앙리 그루에. ‘피에르’라는 이름은 그가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며 사용한 가명 중 하나였다(이 글에서는 편의상 ‘피에르 신부’로 통일했다.) 그는 1912년에 프랑스 리옹에서 8남매 가운데 6번째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특히 불우한 이웃을 돕는 봉사 활동에 열심이었다. 어린 시절의 피에르 신부는 상당히 유복한 편이었으며, “나중에 크면 선원이나 선교사, 아니면 부랑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피에르 신부는 15세 때에 여행을 하면서 구도의 길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성 프란체스코의 활동 무대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그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부모의 은혼식이었던 1930년 3월 1일, 그는 가족 앞에서 폭탄선언을 한다. 앞으로 1년 뒤에 집을 떠나서 수도회에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피에르 신부는 여러 수도회 중에서도 프란체스코회의 한 분파이며 매우 엄격하기로 소문난 카푸친회를 선택한다. 자신이 존경하는 성 프란체스코를 연상시키는 중세의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피에르 신부는 19세 때인 1931년 11월 21일에 생테티엔의 한 수도원에서 수사복을 입었고, ‘필립 형제’라는 이름으로 6년간 수도에 전념한다. 하지만 엄격한 고행으로 심신이 피폐해지자 결국 수사 생활을 그만두고, 1938년 8월 24일에 소속을 바꾸어 프란체스코회의 재속 사제로 서품을 받는다. 이때 한 주교는 “성자 특유의 반(反)교권주의”를 실천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조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피에르 신부는 하사관으로 징집되지만, 폐렴으로 인해 병원 신세를 지다가 휴전을 맞이한다.

 

비시 정부 치하에서 그로노블 성당에 재직하던 피에르 신부는 머지않아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942년 6월의 어느 날, 유대인 남자 두 명이 그를 찾아와서 울면서 도움을 요청한다. 피에르 신부는 지인과 교회를 통해 최대한 많은 유대인을 숨겨주는 한편, 이들에게 위조 신분증을 마련해 주고 산길로 안내해서 스위스로 보내는 활동을 전개한다. 샤를 드골의 막내 동생인 자크 드골은 전신마비 환자였지만, 그 역시 피에르 신부와 조력자들의 도움 덕분에 간신히 스위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가톨릭 사제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 조직원을 독일군이 가만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1944년에 피에르 신부는 독일군에게 체포되었다가 가까스로 풀려나서 에스파냐로 피신했지만, 거기서 또다시 프랑코 정부에 의해 체포된다. 다행히 프랑코 정부는 연합국으로부터 식량 원조를 받는 대가로 포로를 인도하기로 했고, 피에르 신부도 알제리로 인도되어 샤를 드골과 처음 대면한다. 이후 피에르 신부는 전쟁이 끝나고 1945년 1월까지 프랑스 해군 소속 군함 장 바르 호의 군종신부로 일한다.


 

빈민을 위한 엠마우스 공동체를 창설하다

1945년 가을, 피에르 신부는 드골의 측근으로부터 뜻밖의 정계 진출 권유를 받는다. 가톨릭 사제라는 신분에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훈장을 두 개나 받은 남다른 경력 때문이었다. 피에르 신부는 고심 끝에 새로운 프랑스 건설에 협조하기로 작정하고, 로렌 지방의 뫼르트에모젤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정계 체험은 그에게 씁쓸한 환멸만 가져다 준다. 논쟁과 계략이 판치는 정치판에 실망한 피에르 신부는 보다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봉사 활동을 꿈꾸기 시작한다.

 

빈민 운동을 위해 쓰레기장에서 고물을 수집하는 피에르 신부. 1952년. <출처: 게티이미지>


 

1947년 10월, 피에르 신부는 파리 교외의 뇌이플레장스에 있는 낡은 2층집을 구입해서 직접 수리한 다음, ‘엠마우스’라는 간판을 붙이고 무료 숙박시설로 꾸민다. 신약성서 누가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가 죽고 나서 그의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엠마우스)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도에 한 남자를 만나는데, 뒤늦게야 이들은 비로소 그가 부활한 예수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절망에 빠졌던 두 제자는 다시 희망을 얻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본래 청년을 대상으로 했지만 머지않아 빈민 구제 공동체로 변화된 엠마우스의 첫 번째 가족은 조르주라는 이름의 전과자였다. 존속살해 혐의로 가정이 깨지고 20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돌아와서 실의에 빠진 나머지 자살을 기도한 이 남자에게 피에르 신부는 자기가 하는 빈민 구제용 주택 건립 사업에 힘을 보태 달라고 요청한다. “당신은 죽기를 원하니 거치적거릴 게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 이 집 짓기가 빨리 끝날 수 있도록,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소?”

 

이 말에 놀란 조르주는 사망할 때까지 15년간 피에르 신부의 곁을 헌신적으로 지킨다. 곧이어 여러 명의 노숙자가 공동체에 합류하자, 피에르 신부는 연이어 공유지에 천막촌과 판자촌을 건설했다. 건축 담당 공무원이 찾아와 만류하자, “아이들을 얼어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범죄가 아니고, 아이들을 얼어 죽게 하지 않으려고 건축 허가증 없이 판잣집을 짓는 일은 범죄가 되는” 현실을 자신은 참을 수 없다며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결국 담당 공무원들도 국회의원인 피에르 신부의 행동을 눈감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1년에 국회의원 직에서 물러나며 공동체의 운영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피에르 신부는 고심 끝에 직접 구걸에 나서기로 한다. 그는 파리의 번화가에서 사제복을 걸치고 혼자 후원금을 구걸한 직후, 감정이 북받쳐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엠마우스 식구들은 차라리 넝마주이와 고물 수거 일을 하자고 제안한다. 1952년부터 엠마우스 식구들은 아예 쓰레기 처리장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으며, 피에르 신부는 자금 조달을 위해 나간 어느 퀴즈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54년 겨울, 파리에서 일어난 선의의 봉기

전쟁의 참화를 겪고 난 프랑스에서는 주택 부족 문제가 어느 때보다도 더 심각했다. 심지어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피에르 신부조차도 임기 중에 머물 집을 못 구해서 여러 번 거리로 나앉았을 정도였으니, 서민이나 빈민의 고통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피에르 신부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에 서민의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가 제안한 긴급 주택단지 계획을 비롯한 여러 법안은 번번이 여러 가지 이해관계 때문에 통과되지 못하고 있었다.

 

1954년 초에 프랑스에서는 유난히 겨울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급기야 1월 3일 밤사이에 뇌이플레장스에서 어머니와 함께 노숙하던 갓난아이가 얼어 죽자, 분노한 피에르 신부는 당시 자신이 제안한 긴급 주택단지 계획을 거부한 정부를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한다. 정부의 늑장 대응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자 결국 해당 부서의 장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서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주택 문제에 대해서는 뾰족한 해답이 나오지 않은 상태로 겨울 한파는 더욱 심해졌다.

 

급기야 추위가 영하 20도에 달하던 1월 31일 밤, 고물을 수거하던 엠마우스 식구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한 노파의 시신을 발견한다. 추위로 사망한 그 노파의 몸에서는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났음을 보여주는 퇴거 명령서가 발견되었다. 2월 1일, 피에르 신부는 지금 당장이라도 대대적인 비상 구제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라디오 방송국의 관계자를 설득해서 다음과 같은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한다. 그날 밤 안으로 각지에 임시 구호소를 만들 테니까, 각종 물품과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친구들이여, 도와주십시오! 오늘 새벽 3시에 한 여인이 세바스토폴 가의 인도에서 얼어 죽었습니다. 퇴거명령서가 그녀의 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집이 없어서 밤마다 추위 속에서 허름한 차림으로, 빵도 먹지 못한 채 길거리에서 웅크리고 앉아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2천 명도 넘습니다. 이런 공포 앞에서 긴급 주택단지 건설은 결코 충분한 응급구조가 되지 못합니다 (…) 바로 오늘 밤에 프랑스의 모든 도시에, 파리의 각 구역마다 현수막을 붙인 텐트를 치고, 밤새도록 불을 밝혀 놓읍시다 (…) 현수막에는 (…) 이런 글을 써놓도록 합시다. ‘고통당하는 자는 누구든 여기 들어와서 먹고, 자고, 다시 소망을 찾으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비참한 가난 속에서 죽어가는 형제들 앞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의견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이런 불행이 계속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지금 즉시 서로를 사랑합시다 (…) 여러분 덕분에 어떤 사람도, 어떤 아이도, 오늘 밤은 차가운 아스팔트나 파리의 강둑에서 잠들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의 호소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놀라웠다. 오후 1시에 방송이 나가자마자 전화가 울리기 시작하더니, 구조본부로 사용되는 한 호텔로 각계각층의 성금과 물품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부터 파리에서는 경찰과 자원봉사자가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거리에 누워 있는 노숙자를 데려와 지하철역 4개소를 비롯한 주요 지역의 50여 개 임시 구호소에 수용했다. 다음날 한 신문에서는 이런 헤드라인을 내보냈다. “간밤에 파리에서는 바깥에서 잠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생을 마치기 직전까지 빈민 운동에 헌신하다

“선의의 봉기”로 일컬어진 1954년 2월 1일의 사건 이후, 피에르 신부는 빈민 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이후 그는 프랑스와 세계 각지로 엠마우스 운동을 확장하며 슈바이처, 돔 헬더 카마라, 테레사 수녀, 비노바 바베 등을 만나 서로의 활동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머지않아 과로로 심신이 피폐해진 피에르 신부는 1957년에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한다. 이때 엠마우스 공동체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다. 와병 중인 피에르 신부를 축출하고 이 운동을 장악하려는 모종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피에르 신부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고 엠마우스 공동체로 돌아왔으며, 1969년에 스위스의 베른에서 20개국의 70개 조직이 집결한 제1차 국제 엠마우스 총회를 열었다. 이제는 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신보다 더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봉사하라.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봉사하라.” 이와 같은 구호로 요약되는 엠마우스 운동의 정신 아래, 오늘날 전 세계 50여 개 국가에서 500여 개 조직이 각종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내가 내일 아침에 죽는다고 해도, 모든 것이 잘 조직되어 있기에 아무런 문제없이 잘 굴러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피에르 신부의 말이다. “엠마우스가 ‘피에르 신부’라는 신화적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피에르 신부가 죽는 순간, 엠마우스도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피에르 신부가 죽고 난 뒤를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엠마우스 운동에는 과거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 계속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전보다 더 힘들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1989년에는 피에르 신부의 활약을 각색한 영화 <54년 겨울>이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이 영화에서는 램버트 윌슨이 피에르 신부 역할을 맡았다). 1988년에는 빈민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한 피에르 신부 재단이 설립되었다. 피에르 신부는 마지막 20년 동안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자신의 주 관심사인 노숙자와 주택 보급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2007년 1월 22일, 94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하기 직전에도, 그는 휠체어를 타고 국회에 나가서 주택 문제에 대한 정부의 안이한 법안을 비판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영화 <54년 겨울>의 포스터 앞에 선 피에르 신부. 1989년. <출처: 게티이미지>

 

 

 

“악 앞에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짓밟히고 착취당한 약자를 이용하는 행위 앞에서 분개하지 않는다면, 구원이고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은 있을 수 없다. 분노는 당신이 사랑한 대상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분노는 당신의 사랑이 어디 있는지를 나타내준다. 나이가 들었다고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늙었다고 분노가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늙으면 덜 적극적이고 에너지가 줄어들 수는 있다. 하지만 젊었을 때 가졌던 열정과 반항심과 분노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가 죽기 전까지 투사로 남았던 이유도 그래서였으리라.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한 ‘벼룩’으로서의 삶

피에르 신부는 평생 반골 기질을 드러내며 살았다. 가톨릭 사제이면서도 신앙인에게는 정의가 사랑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며, 교회 안팎의 불합리를 보면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교회를 짓는 것보다 주택을 짓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는 생전에 반(反)교권주의자로서의 태도를 명확히 했으며, 심지어 교황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비판적인 의견을 서슴없이 내놓았다. 또한 피임 기구 사용, 사제의 결혼, 여성의 성직 참여 같은 극도로 민감한 문제에서도 찬성 의견을 표시해 종종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빈민을 선동하는 빨갱이 사제”라는 비판을 받을 때마다, 피에르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나더러 좌파라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면 웃음이 나온다. 나는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은 모른다. 다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자는 것이 나의 선택이다.” 또 자기 이익만 좇는 좌우파 모두를 질책하기도 했다. “우파에서는 오직 개혁을 거부하기 위해서 선행을 이야기하고, 좌파에서는 궁극적인 혁명을 서두르기 위해서 선행을 장려한다면 (…) 분명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피에르 신부는 자신이 얻은 명성을 평생 거북하게 여겼다. “나는 식탁 밑에서 놀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스위치를 누르는 바람에 원자폭탄을 터트린 아이와 같았다.” 하지만 불의에 맞서는 데에는 서슴없이 자신의 명성을 이용했다. 가령 2002년 대선에서 극우파인 르펜이 돌풍을 일으키자, 인종차별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시라크에게 한 표를 던지라”며 “90년을 산 사람”의 이름으로 대중에게 호소했다. 나중에는 노숙자와 주택 문제에 소극적인 시라크 정부를 통렬히 비판하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거부했다.

 

1999년 노벨평화상 수상 단체인 ‘국경 없는 의사회’(MSF)의 공동 창립자인 베르나르 쿠슈네르(왼쪽),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달라이 라마(가운데)와 자리를 함께 한 피에르 신부(오른쪽). 1991년. <출처: 게티이미지>

 

 

 

물론 피에르 신부에게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삶에서 가장 큰 시련을 두 가지 꼽았다. 하나는 1958년에 엠마우스의 내분으로 축출될 뻔한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1996년에 반유대주의자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사건이었다. 당시 피에르 신부는 한 친구가 쓴 이스라엘 비판서를 공개적으로 칭찬했는데, 알고 보니 그 책은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는 내용이었다. 뒤늦게야 책을 꼼꼼히 살펴보지 않은 실수를 인정했지만, 이 사건은 “노망이 들었다”는 소문과 함께 피에르 신부의 경력에서 옥의 티가 되었다.

 

한때는 핍박을 당했던 유대인을 돕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처럼, 나중에는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핍박하는 이스라엘을 서슴없이 비판했던 것 역시 피에르 신부다운 일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를 무척이나 존경했고, 해마다 인기투표에서 자크 이브 쿠스토지네딘 지단 같은 국가적 영웅들과 함께 최고 유명인사로 선정했다. 하지만 피에르 신부는 사람들이 자기를 영웅시하면서도 일회적인 자선에만 만족한다는 사실(롤랑 바르트가 지적한 ‘피에르 신부 신드롬’의 한계)에 항상 불만을 표시했다.

 

“나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하긴 해도, 듣고 나서는 그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상하지요?” 물론 피에르 신부도 혼자 힘으로 세상을 뒤바꿀 수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본인의 역할을 ‘벼룩’에 비유했다. 즉 자기는 정치가들을 끝없이 괴롭히고 성가시게 만들어서 결국 행동에 나서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정의와 분배의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관심을 끄는 지금, 이 한 마리 ‘벼룩’의 삶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아베 피에르(피에르 신부), [당신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2000; [단순한 기쁨], 2001; [피에르 신부의 고백], 2002;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 2004; [하느님... 왜?], 2006; [피에르 신부의 유언], 2006; 아베 피에르와 베르네르 쿠슈네(르), [신과 인간들], 1995; 피에르 뤼넬, [하느님의 투사 피에르 신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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