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7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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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사중에 크게 운적이 두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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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우 [pmw911] 쪽지 캡슐

2002-03-23 ㅣ No.31262

  

=== 나는 미사중에 크게 운적이 두번있다 ===

  

  

2002.3.4 월

 

제목과같이 나는 미사중에 흐느껴 운적이 여러번 있는데 그중에서 크게 운적이 두번있었고 나머지는 미사의 은혜를 느끼며 소리없이 눈물흘린적이 여러번 있었다.

 

첫번째로 떠오르는 기억은 논산훈련소에서의 일인데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집을 떠나왔기에 낮선환경과 주위에 아무도 아는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2주만에 낮익은 성당분위기와 귀에익은 성가와 미사전례가 너무나 반가왔었던 모양이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친후 약간 힘들것 같았던 대구상고 진학이 의외로 되었고 대구 삼촌집에서 3년간 공부하느라 집을 떠나왔지만 삼촌가족들과 같이 있는지라 별로 낯설은 느낌은 없었고 졸업후 8개월간 직장생활을 했는데 고졸과 대졸의 격차가 심한것에 갈등을 느끼다 퇴사한 두사람몫의 일까지 나에게 다 넘겨주기에 2개월간 버티다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며 대학진학을 구실로 회사를 뛰쳐나왔다.

 

시골로 내려가 대학입시준비를 했으나 취업을 목적으로 공부를 한데다 삼촌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공부하라는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어 농땡이 친결과 성적은 바닥을 기었던터라 가로늦게 3개월가량 공부한것으로는 좋은성적이 나올리 없었고 행여 미달이라도 될까 눈치보며 지원했지만 그런행운은 내게 오지않았으며 부모님의 성화에 마지못해 전문대에

진학하여 2년동안 다시 대구삼촌집에서 생활하면서 용돈이라도 벌려고 직장을 다니며 야간대학을 다녔다.

 

졸업하기가 무섭게 입영통지서가 날아왔고 입대하는날 아침일찍 시골에서 불알친구로 지내던 친구가 다른곳에 이사가 살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대구까지 동행해 주겠다며 찾아왔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는 집밖에 나오시지도 않았고 아버님은

골목 어귀까지 따라나오시며 몸조심하고 잘다녀오라고 하셨다.

 

친구와 대구까지 가서 고속버스편으로 논산으로 갈려고 버스에 오르는데 친구가 손에 뭔가를 쥐어 주며 잘다녀 오라고 했다.  손을 펴보니 조그만 1단짜리 묵주였다.  

군대가는 친구를 그렇게 생각해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논산에 도착에 택시를 타고 연무대로 갔으며 집합시간이 되자 가족이나 연인과 같이온 사람들이 헤어지기 아쉬운 표정 들로 몸조심하라는 인사를 하며 발길을 돌렸고 조교들의 안내로 정렬을 한후 입대를 환영한다는 훈련소 소장님의 환영사(?) 를 들은후 내무반에 들어가서는 군복과 일체의 생필품을 배급받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5분도 채안되는 시간에 사회의 때를 씻어낸다는 의미의 목욕(샤워라는 표현이 맞을듯 하다)을 한후 입대할때 입고온 모든 사제품(신발,겉옷,런링.팬티까지)을 벗어 차곡차곡 개켜서 포장지에다 포장을 했고 고향주소를 기재했다.  그 소포를 받아보는 부모님들의 느낌은 흡사 군에간 아들이 전사해서 유품을 정리해 보내주는것을 받을때의

그 느낌과 같다고 했는데 실제로 내 부모님도 그 소포를 받아들고서는 한참을 우셨다고 했다.

 

그렇게 한달가량의 논산훈련소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누구하나 안면있는 사람들도 없고 남자들끼리만 모여 생활하는 집단이다 보니 내무반 분위기는 다소 삭막했고 시도때도없는 집합구령에 이리뛰고 저리뛰었으며 훈련도중에 부상을 당해 군대병원으로 실려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어서 옆자리에 누워자던 동료가 어느날 갑자기 보이지 않은적도 여러번

있었다.

 

특히나 성질더러운 조교를 만나 훈련을 받는날이면 왜 그렇게도 시간은 더디 가는지. 더구나 논산지역의 날씨는 이상하게도 짖꿏어서 비가 자주왔으며 그렇다고 훈련을 멈출수는 없는지라 비름 맞아가며 훈련을 받아야 했고 고된 훈련중에 잠깐씩 휴식을 취할때면 여기저기 앉은 동료들의 입에서 왜 우리 부모님이 나를 낳았는지 원망스럽다는 얘기에서부터 남자로 태어난 죄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냐며 여자가 부러워 죽겠다며

내가 이다음에 장가가서 아들을 낳으면 그자리에서 밟아 죽여버리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힘든 훈련을 2주정도 받고 겨우 익숙해져 가는중에 일요일날 종교활동 행사를 실시한다며 각 종교별로 집합을 시켰는데 개신교가 제일많았고 불교.천주교 순이었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개신교에서 먹을것을 가장많이 준다는 말에 신자가 아니어도 그냥 따라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과적으로 천주교에서 제일 먹을것을 작게 준다는 얘기였다.

 

훈련소안의 성당은 어떤모습일까 기대를 하며 줄을 맞추어 행진해 갔는데 지금기억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법 나무들이 많이 둘러싸인곳에 있는 조금 오래된 조그만 건물이었던 것같다.  신부님 오실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며 밖에서 한참을 앉아 대기하다 시간이 되어 성당안으로 들어갔고 눈에 익은 십자고상과 제대며 몇몇 성상들이 보였고 사병이 치는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입당성가가 시작되면서 사제가 입장하자 그때부터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는데 미사가 끝날때까지 그 눈물은 멈출줄을 몰랐다.

 

남자는 일생동안 세번만 울어야 된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별나게 눈물이 많은 편인데 지금도 미사중에 어릴때 좋아했던 성가가 오르간 반주와 더불어 미사 분위기에 알맞게 잘 불리워지면 가끔씩 눈물이 핑돌때가 있는데 성찬전례때 미사집전 신부님이 정성을 다해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실때면 그 느낌을 받아 눈물 흘릴때도 있지만  그보다 곡이 좋다거나

의미심장한 가사의 성가를 부를때면 자주 눈물을 흘리곤 한다.

 

그렇게 미사내내 눌물을 흘리며 훌쩍거리고 있으려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덩달아 같이 눈물을 흘리며 교리교사 하다 오셨냐고 물어왔는데 아니라며 그냥 미사분위기가 좋아서 그런다고 하니까 자기는 교리교사를 하다가 왔는데 담당했던 아이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눈물이 난다며 한참동안 같이 울었다.

 

그렇게 미사시간 내도록 실컪울고 밖으로 나오니까 왜 그렇게 마음이 평온하고 좋은지.  성당문을 나서며 받아든 쵸코파이 하나와 우유한팩을 성당옆에 퍼질러 앉아 맛나게 먹었다.  그 뒤로는 아무리 훈련이 힘들고 고되어도 주일날 성당에 갈수 있다는 사실에 어느정도 위로가 되었지만 한달남짓 동안의 훈련소생활중 훈련소내성당을 가본것은 고작 두세번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뒤 2주간 다른곳에서 특별교육(?)을 받고 강원도 철원군 서면 신수리 3사단 백골부대

관할 지역에 위치한 지원부대로 배치를 받아 군생활을 계속했고 상병정도가 되어서야 간부들 눈치를 봐가며 종교행사를 계속할수 있었다.  그때 그 부대로 나보다 한참늦게 배치받아온 신병이 있었는데 사법고시 준비를 하며 입대를 연기하다 가로늦게 온사람이었는데 나이는 나보다도 한두살 많았었다.  그런데 천주교에 관심이 많아 몇번이나 영세를 준비하다 무슨 사정이 생겨 영세를 못받곤 했다기에 군대있는동안 통신교리를 받으라고 권했고 나와 같이 종교행사를 다니며 군종신부님께 말씀드려 내가 제대하는 날 몇일후에 영세를 받게 되었는데 나보고 대부를 서달라고 요청을 하기에 기꺼이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대하고 한달도 채 안되어 8.15일 성모승천대축일 하루전날 시골고향에서 다시 그 부대로 찾아가서는 성당관사에서 군종병사와 하루밤을 자고 다음날 영세식에 참여하고 왔었다.

 

제대후에 그 대자와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다가 결혼을 한다기에 관면혼배 받을때 증인이 필요하다며 나에게 다시 요청을 하기에 3사단 군종신부로 계시다 다른사단으로 옮겨가신 그 신부님을 찾아가서 관면혼배를 받았고 나는 증인을 서주었다. 그뒤로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다가 어느때부턴가 소식이 끊어져 지금은 안부를 알수가 없다.  내가 대자를 잘 돌보지 못한 탓이라 생각하며 요즘 출퇴근시 전철안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며 가끔씩 여러명의 대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또 한번 크게 운것은 제대후 직장을 구해 간곳이 태백아래 도계지역이었는데 경동탄광 전산실에 근무할때였다. 제대후 대구에서 2개월간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전산계통은 아무래도 서울로 가야 제대로 일을 배울수 있겠다는 생각에 서울에 직장을 알아보느라 6개월간이나 시골에서 시간을 보내다 겨우 한곳에 취직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는데 여행용가방에 옷가지 몇개 챙겨 가방하나 달랑들고 서울로 왔었고 영등포에서 하숙생활을 하며 여의도소재의 직장을 다녔는데 주일이면 여의도성당을 갔었다.

 

이곳 성당은 조금 독특한게 성당구조가 원형돔처럼 생겨서 성가대의 합창이 성당안을 골고루 울려퍼지는것 같았고 정오가 되면 천장의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제대로 쏟아지게 설계가 되어있었으며 십자고상이 아닌 예수님 몸의 형체를 한 조형물이 나무십자가 없이 양팔을 벌린채 매달려 계시는 모습이었다.  또한 교중미사때 성인성가대도 훌륭했지만 청년 미사때의 성가대원들이 정말로 수준급의 단원들이었는데 각종악기들을 다루는 솜씨나 평소에 잘듣지 못하던 미사곡을 합창할때면 무슨 음악회에 와있는 기분이었으며  미사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신부님이 그렇게 허락하셨는지 성체와 성혈을

축성한후 신부님께서 ’신앙의 신비여’ 하는 대목을 듣기에 기분좋은 음성을 가진 청년성가대원 한명이 성가로 그부분을 멋들어지게 선창했고 시작이 좋으니까 뒤따라 이어지는 일반신자들의 목청도 좋아져서는 성당안이 떠나갈듯이 큰소리로 함께 부르곤 했었다.

 

이때도 나는 가끔씩 울었지만 크게 울지는 않았고 미사분위기가 좋아 미사가 끝난후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서울에 혼자 있었지만 크게 외롭다는 생각은 못했으며 가족이 보고싶으면 한달에 한번꼴로 시골을 다녀왔었다.

 

그러나 서울생활은 3개월을 채 못넘겼는데 고등학교때부터 전산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알게 되신분의 소개로 탄광촌 도계로 가게되었다.  중학교 수학여행때 기차를 타고 그냥 지나치면서 본기억이 있는 그곳. 기차가 달리다 멈춰서는 뒤로 뒷걸음질 쳐서 산을 내려가서는 다시 앞으로 달리는 바로 그곳 도계가 내 근무지가 될줄이야.

 

나는 비록 전산실에서 깨끗하게 근무했지만 사무직원도 체험삼아 들어가본 땅속 600미터 아래의 갱도생활 하루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폭약장전을 위해 개구멍같이 뚤어놓은 탄더미속을 기어들어가 모자에 달린 전등에 의존해 폭약을 장전 하고 각종개스로 인해 예기치 못한 폭발의 위험속에서 탄더미를 폭파하고 그 탄을 끌어내기 위해 기계를 가동시키자 자욱하게 탄가루가 일어 내 손끝조차도 볼수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보고는 이런생활끝에 진폐증 환자가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한 갱도속의 생활은 밤과낮이 없었으며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며 근무하다 보니 밤낮이 뒤바뀐 갱원들의 생활과 집에 있는 가족들과의 생활리듬이 맞지 않았고 남편이 일하러 나간 낮시간동안 주부들은 여기저기 휩쓸려 다니다 춤바람이 나고 눈맞은 사람들은 돈을 챙겨 도망가기도 했으며 갱속에서 힘들게 일하다 각종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수시로

생겨났다.  숙소 문을 열고 나오면 앞산 뒷산 여기저기에 탄더미가 작은산을 이루었고 개울물은 온통시커멓게 변해 흐르고 바람이 불면 탄가루가 날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야 했는데 이러다 보니 이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다소 거칠은 면이 없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지역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대단했었고 특히 혼기에 다다른 처녀들은 도시에서 온 사무직원들과 사귀어서 다른지역으로 시집가는게 소원일 정도였다.

 

이러한 지역에서 근무하면서도 주일날은 꼭 읍내의 성당을 찾아갔는데 건물은 제법 큼직했으나 조금 낡은듯했고 생활여건이 그렇다 보니 신자들의 옷차림이나 얼굴 표정들도 별로 밝아보이지 않은듯 했다.  그렇게 몇주정도 지난뒤 어느날 미사중에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주체할수가 없었고 미사가 끝날때까지 계속 훌쩍거렸다.  미사가 끝나고 신자들이 하나둘씩 나가는데도 나는 자리에 앉아 계속 훌쩍거리고 있으려니 앞자리에 앉아 계시던 어떤 부부가 다가와서는 이곳생활이 힘들어서 그러느냐며 우리집에가서 잠시 얘기하며 차라도 한잔 마시겠냐고 물어오셨는데 나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지금생각하면 그때는 무었때문에 그렇게 울었는지 나자신도 잘 이해가 안되지만 아무튼 그때 한참을 울었다.  아마도 낯설고 거친사람들과 생활한다는 사실과 그런곳에 있는 나자신이 초라하다고 생각되었으며 얼마나 더 오래 있어야 할지 모를 어떤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군대에서의 일도 그렇고 탄광지역에서의 일도 생각해보면 완전히 낯선곳에 나혼자 내동댕이 쳐진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성당을 가면 모든 분위기가 익숙하니까 나도 모르는 반가움에 눈물을 쏟은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 탄광지역에서 겨우 일년정도 일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지금까지 계속 생활하고 있는데 앞서도 얘기했듯이 지금도 가끔씩 심하지는 않지만 미사중에 눈물흘리는 경우가 있다.

 

불광동성당에 다닐때 한번은 포이동성당 신부님께서 오셔서 미사집전을 하시며 성전건립기금마련을 위해 특별강론을 하신적이 있는데 강론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면서도 신자들이 감동을 받게끔 멋지게 하셨고 성찬전례식때는 특유의 굵직한 음성으로 마이크의 기능을 적절히 활용하시자 그분의 정성어린 마음을 그대로 전달받아 나를 비롯한 일부 신자들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았고 다음주에 본당신부님의 발표로 건립기금신입총액이 1억이 넘게 나왔다시며 불광동성당 생긴이후로 처음있는 일이라고 하셨다.

 

또한 견진성사때 주교님이 강복을 주시며 입장하실때는 어느성당에서건 가슴이 뭉클해지며 뭔가가 와닿는 느낌을 받으며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

  

 

왜 그럴까 ?  단지 내가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 그럴까 ?

 

내 생각으로는 하느님이 한없는 은총을 가득 부어주심에 감동되어 그런걸로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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