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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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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희 [kohthea] 쪽지 캡슐

2012-03-14 ㅣ No.5

[정욱식의 '오, 평화'] 비극과 희망의 땅 오키나와를 가다(상)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10월 5일부터 7일까지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일본 평화헌법 9조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종교인 회의'에 다녀왔다. 이 회의는 종교와 국경을 초월해 세계 각국의 종교인들이 일본 평화헌법의 정신을 기리고 이를 아시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보존·확산시키자는 취지에서 4년 전부터 격년으로 개최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100여명의 종교인들과 활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세 번째 회의가 오키나와에서 열린 이유는 오키나와의 비극을 평화로 승화시키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한국 내에서는 오키나와가 일본의 일부이자 관광지 정도로 간주되지만,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않게 알 수 있다. 오키나와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지역 못지않은 비극을 경험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미국의 아시아 전초기지로 강요받고 있다.

▲ '일본 평화헌법 9조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종교인 회의' 장면ⓒ정욱식

류큐 왕국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오키나와는 1609년 일본에 점령당했다. 이후 일본 속국이면서도 자치를 유지했던 오키나와는 1879년 일본의 하나의 현으로 강제 병합되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일본군과 미군에 의해 차례로 군사기지로 전락했던 오키나와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미국령으로 복속되었다가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되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핵심적인 발진기지이기도 했다.

오키나와의 '강제 집단 죽음'

오키나와의 비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일본에 의해 강요된 '강제 집단 죽음'이다. 이제 80대의 노인이 된 당시 생존자의 증언은 당시의 만행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강제 집단 죽음'이 발생한 1945년 3월말 당시 고교 2년생이었던 긴조 시게아키 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 비극을 증언하는 긴조 시게아키 씨 ⓒ정욱식

그리고 오키나와 전체가 미군의 수중에 떨어진 6월 18일 일본군은 '해산 명령'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해산 명령에 당황한 여고생들과 교사들은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포탄에 맞아 죽거나, 일본군이 나눠준 수류탄으로 '자결'을 선택했다. 그들의 뇌리에는 '미군에게 잡히면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한다'는 일본군의 말이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40명 가운데 생존자는 10여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증언을 해준 사람들은 일본군에게 '악귀'라고 각인된 미군에게 잡혔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미군이 일본 본토 상륙에 앞서 오키나와를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던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동원해 곳곳에 비행장과 참호를 만들었다. 그러나 미군이 가공할 공습과 함께 오키나와를 신속히 점령해나가자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악귀에게 죽느니 자결을 선택하라'며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미군의 포로가 되면 군사기밀을 알려줄 우려가 있다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던 탓이다.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한 후에 일본군들과 동사무소 직원들은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줬습니다. 그것은 자결 명령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곳곳에서 수류탄의 폭음과 비명, 통곡 소리가 뒤섞여 그야말로 아비규환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철저하게 황민화 교육을 받았던 오키나와 주민들은 '군관민 공생공사(軍官民 共生共死)', 즉 '군인도 공무원도 주민도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는 정신을 강요받았다. 또한 일제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남자는 가랑이 찢겨 죽고, 여자는 능욕을 당한 후에 죽는다'며 미국을 악마화했다. 비참한 꼴을 당하느니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자결하라는 것이었다. 긴조 시게아키 씨의 증언을 계속 들어보자.

"불발탄이 많았던 탓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돌과 죽창을 들고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형과 함께 어머니를 돌로 내리쳤고, 여동생과 남동생도 때려 죽였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청년이 외쳤습니다. '이대로 죽느니 미군을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자!' 그런데 저를 포함해 5명의 청년들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군관민 공생공사'라고 했는데, 일본군은 멀쩡히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히메유리 평화기념 자료관에는 또 하나의 비극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미군이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계시한 1945년 3월 23일, 일본군은 여고생 222명과 교사 18명을 동원해 오키나와 남부의 한 육군 병원에 배속시켰다. 일본군이 패퇴를 거듭해 남부로 쫓기자 이들도 일본군을 따라 남하하면서 치료와 간호, 그리고 식사와 시신 처리를 맡았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일본 정부는 역사 왜곡이라는 또 다른 만행으로 오키나와 주민들을 분개시키고 있다. 5년 전까지 교과서에 '강제 집단 죽음'이라고 기술되었던 표현을 '집단 자결'로 바꿔버린 것이다. 천황과 군대에 의한 '강요된 죽음'이 아니라 천황을 위해 자발적으로 집단 자결했다는 것이다. 분개한 오키나와 주민들은 도쿄로 상경해 항의 집회를 하고 수만명이 나하시에 모여 집회를 해도 일본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그들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은 달랐다

처참했던 오키나와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약 20만명 정도이다. 이 가운데에는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동원된 12만명의 오키나와 주민들이 포함되어 있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 오키나와 평화공원 묘비 ⓒ정욱식

그런데 오키나와 주민들의 전쟁에 대한 기억은 남다른 점이 있다. 뼛속까지 사무친 일본군과 미군에 대한 증오를 승화시켜 진실 규명과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평화의 정신으로 오키나와 전쟁을 극복하고 있었다. 오키나와 본섬 최남단에 있는 평화공원에 가보면 이러한 정신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수백개의 묘비에는 오키나와 주민과 '공생공사'하겠다던 일본군뿐만 아니라 침략자 미군과 강제 징용된 조선인 등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20만명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비극과 희망의 땅 오키나와를 가다(하)

 

오키나와를 바라보는 현지 주민의 염원과 미국의 야심이 극적으로 엇갈리는 표현이 있다. 오키나와 최남단에 있는 평화공원에는 태평양을 향해 "평화의 초석"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약 2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미군 기지가 들어선 이후에는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전 및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르기까지 오키나와가 미군의 발진기지로 전락한 것을 한탄하면서, 앞으로는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증진하는 초석이 되어야 한다는 염원을 담고 있다.

▲ 오키나와 평화공원에 있는 '평화의 초석' 조형물 ⓒ정욱식

반면 미국의 전략가들은 오키나와를 "아시아-태평양의 군사적 중추"라고 부른다. 서울, 타이베이, 상하이, 홍콩, 마닐라, 도교 등 아시아의 핵심적인 도시들이 이 섬의 반경 1500km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와 대만해협 등에서 유사 상황이 발생하면 오키나와는 미국의 신속한 군사 대응 및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섬이다. 일례로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공군기가 한반도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불과 2시간이 걸리는 반면, 괌에서는 5시간, 하와이에선 11시간, 미국 본토에서는 16시간이 걸린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의도를 잘 보여주듯, 미국은 오키나와 점령 이후 곳곳에 군사 기지를 만들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공군기지인 가데나 기지부터 최근 오키나와-미국-일본 본토 3자 관계의 핵심으로 부상한 후텐마 기지에 이르기까지 오키나와 전역에는 미군 기지들이 깔려 있다. 이로 인해 일본 영토 총면적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는 미군기지 74%가 몰려 있고, 주일미군 4만명 가운데 2만 5000명 가량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미군기지의 섬"이라고 부르고, "미군기지 안에 오키나와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지의 소유 형태도 유별나다. 오키나와 현에 있는 미군기지의 소유 형태를 보면, 사유지가 32.7%, 시(市) 소유지가 30.4%, 현 소유지가 3.5%로 전체의 66.6%가 민·공유지이며, 국유지는 33.4%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 면적의 87%가 국유지이고 민 공유지는 13%인 것과는 매우 차이가 난다. 본토의 미군기지 대부분이 태평양 전쟁 전의 일본군 기지를 그대로 사용해온 것에 비해,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의 대부분은 민·공유지를 강제로 점유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강정마을, 헤노코

오키나와 나하시 동쪽 해안에는 헤노코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10월 5일 이곳을 찾았을 때, 8년(2639일)간 기지 건설 반대 집회를 해오고 있다는 팻말이 서 있었다. 헤노코는 여러 모로 강정마을과 흡사하다. 마을 주민들이 천혜의 자연환경과 평화로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오키나와가 더 이상 군사 기지의 섬이 아니라 "평화의 초석"이 되어야 한다는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오랜 기간 비폭력적인 저항 운동을 전개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 8년간 미군기지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헤노코 주민들 ⓒ정욱식

그러나 강정마을과 헤노코는 중대한 차이점도 갖고 있다. 제주도의 우근민 지사가 정부와 해군 눈치보기로 일관하고 있는 반면, 오키나와 현지사는 주민들의 입장을 존중해 미국과 일본 정부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작년 11월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나카이마 히로카즈 오키나와 현지사는 선거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군 해병대 기지인 후텐마를 헤노코로 이전하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선 직후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밖으로 이전해야 한다며 주민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는 재선 직후 "오키나와는 이 섬을 위해서 미군 기지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전체를 위해 수용하고 있다"며 "일본 본토는 후텐마 기지 재배치에 대한 해법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본토가 오키나와를 희생양으로 삼아 더 이상 미일동맹에 무임승차할 것이 아니라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밖으로 이전하는데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참고로 후텐마 기지를 헤노코 등 오키나와 내로 이전하기 위해서는 현지사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올해 들어 나카이마 현지사의 행보는 더욱 과감해지고 있다. 그는 9월 말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해 미국이 후텐마 기지 이전을 "총검과 불도저"로 밀어붙이고 있다며 미국 정부의 태도를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또한 미국의 밀어붙이기식 태도에 "오키나와 지방정부와 주민들은 강력히 저항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미국도 오키나와를 더 이상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그러자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의 유력 인사 3명도 오키나와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군사위원회 위원장인 칼 레빈,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 동아시아-태평양 소위 위원장인 짐 웹은 오키나와의 고초를 이해한다며, 앞으로 미국과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입장을 충분히 검토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 수 있는 방법으로 기지 재배치를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들의 이와 같은 입장 표명은 후텐마 기지를 헤노코로 옮기는 것과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 병력 8000명을 괌으로 옮기는 것이 막대한 비용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도 깔려 있다.

미국과 일본 정부는 1960년대 후반부터 헤노코에 군사 기지를 만들려고 했다. 헤노코 바로 옆에는 미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가 있는데, 헤노코 해안을 매립해 지상-해상 복합형 기지를 만들면 시너지 효과를 크게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헤노코 주민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표류했다. 그러나 '노후한' 후텐마 기지 대신에 '새로운' 기지를 희망해온 미국의 압력에 따라, 양국 정부는 2006년 후텐마 기지를 헤코노로 이전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 후텐마 미군기지 ⓒ정욱식

오키나와 중부 기노완 시(市)에 있는 후텐마 기지는 노후했을 뿐만 아니라, 기지 주변을 주택이 둘러싸고 있을 정도로 인구 밀집 지역에 위치해 있다. 오키나와 지방법원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군사 기지"라고 불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주민들은 군용기의 이착륙 때 발생하는 소음으로 수십년간 고통을 받아왔고, 2004년에는 해병대 헬기가 오키나와 국제대학에 추락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당연히 기지 반환 요구가 비등해졌다. 그러나 미일 양국 정부가 오키나와 주민들의 요구에 답한 방식은 후텐마 기지 '반환'이 아니라 헤노코로의 '이전'이었다.

한편 2009년 무려 55년만에 정권 창출에 성공한 민주당은 대등한 미일관계를 주창하면서 "후텐마 가지를 오키나와 밖으로 이전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기존 합의를 지켜라"며 노골적인 압력을 행사했고, 이에 따라 민주당 정권은 오키나와와 미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후텐마 문제로 파열음이 커진 미일동맹을 봉합한 것은 천안함 침몰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위협이 거듭 확인된 만큼, 미일동맹 강화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며 하토야마 정권을 압박했고, 하토야마 총리도 "기존 합의를 존중하겠다"며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오키나와에선 약속을 저버린 민주당 정권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재선에 성공한 나카이마 오키나와 현지사도 주민의 편에 서서 미일 양국의 압력에 맞서고 있다.

미국, 오키나와는 한반도의 '단일 전장'

기실 후텐마 문제를 포함한 오키나와의 미래는 한반도 평화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오키나와 주둔 미군은 한미합동훈련에 참가하는 미국의 군사력의 핵심 전력이다. 이는 한반도 유사시 오키나와가 미군 증원 전력의 발진기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은 오키나와는 한반도의 단일 전장(戰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도 오키나와 방어에 기여를 해야 한다면서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미사일방어체제(MD)에 참여할 것을 요구해왔다. 안타깝게도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다"라는 이상득 의원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MB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연결된다. 가데나 공군기지를 비롯한 미국 동아시아 전력의 핵심 거점인 오키나와로 향하는 탄도미사일을 중간에 요격하는데 제주도만큼이나 적합한 전략적 요충지도 없기 때문이다. 하여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강행되면, MD 기능을 탑재한 미국의 이지스함이 들락날락거릴 것이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도 그만큼 위협받게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창을 보유한 미국이 상대방의 창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패까지 갖게 되면 그 창을 휘두르기가 더욱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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