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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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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이십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동생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2년 후 6학년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당시 명문학교로 통하던 서울중학교와 서울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갑작스럽게 아버님께서 별세하시자 저는 집안의 장남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지만, 워낙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앞길을 향하여 열심히 내달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진학한 저는, 전공은 물론, 외국어 습득과 각종 과외활동도 열심이었으며 학우들 간의 친교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앞서고자 노력하였으며 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통역 장교로서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대기업 무역부에 입사하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면서 동료들은 물론 상급자나 부하 직원들로부터 전도유망한 사원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하여 다시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예상대로 입사한지 몇 달 만에 경영진으로 부터 저의 능력을 인정받아 초고속 진급을 거듭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여러 동료들의 시기와 부러움을 받으면서 능력주신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기 보다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나 된 것처럼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1980년 12월, 제 나이 스물여덟 살 때, 지금의 아내 크리스티나를 만나 혼인성사로 성가정을 이루었으며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저는 천하를 얻은 듯 기쁨에 넘쳤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이라 생각했으며 세상이 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와 형제는 물론 친척들과 친구들의 축복과 기대를 받으면서 그 모든 것은 제가 충분히 받을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받을 것을 받고 있다는 참으로 교만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명석한 두뇌와 강한 의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치던 저는 직장의 더 높은 자리도 금방 손에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자만심으로 가득 찬 제 안에는 하느님께 내어드릴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던 제게 1982년 3월 25일, 제 운명을 바꿔놓은 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날은 마침 회사 동료 직원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자랑스럽게 아들의 백일잔치를 벌인 다음날이었습니다. 마침 저희 회사에서 많은 양의 상품을 수입해가는 일본인 바이어가 저희 계열회사에 찾아왔는데 본사에 근무하던 제가 일본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그 바이어를 접대하게 되었습니다. 접대는 강남의 어느 호화로운 룸살롱에서 이루어졌고 늦은 밤 바이어 접대가 끝나자 택시를 타고 피곤한 몸을 뒷자리에 기대자 금새 잠이 들었습니다. 야심한 밤길을 무섭게 질주하는 택시는 말 그대로 총알 택시였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한 순간 제 몸은 날카로운 충격과 극심한 고통으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강북 쪽에서 오던 자가용이 음주운전으로 잠수교 중간쯤에서 미끄러져 제가 탄 차에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었습니다. 사고 현장에 달려온 교통경찰은, 경찰 생활 십여 년에 그렇게 참혹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 하였고, 순천향 병원 의사는 제가 살 가망이 없다고 하였답니다. 당시 제 상태가 어떠했는가는 막내 여동생 마리아가 쓴 병상일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제 동생의 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1982년 3월 25일 새벽 0시 10분, 순천향 병원 중환자실에 오빠가 입실하다. 온몸에 깁스를 하고, 산소마스크를 쓰고, 수혈을 한 다음, 링거주사를 맞다. 심전도를 비롯한 각종 테스트 기구가 오빠의 몸에 연결되어 있다. 많은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이 흰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들어와, 혼수상태의 오빠를 걱정하고 돌아가다. 3월 26일 개신교에 다니는 외사촌 언니께서 목사님을 모시고 와서 가족과 함께 철야기도를 하다. 하느님만이 오빠를 살리실 분이다. 4월 16일 사고가 난 지 오늘로 23일째다. 외사촌 언니께서 오빠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던 중, 오빠의 얼굴에 웃는 표정이 지어지며,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뺨 위로 흘러내렸다. 이제 오빠가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을 주님께 감사드리다.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착실히 따르며 우리 가족 모두 하느님의 참다운 가족이 되어야겠다. 오늘 이런 기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4월 27일 사고가 난 지 34일째다.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눈을 뜨라고 하자, 오빠는 왼쪽 눈을 뜨고, 손을 잡으라니까 손을 잡았으며, 눈동자를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라고 하자 그렇게 하였다. 글씨도 서툴게 쓰기 시작하였다. 오빠 친구인 한의사로부터 어렵게 구한 웅담을 석 돈이나 받아 복용하기 시작하다. 5월 13일 오늘은 사고가 난 지 50일째다. 오후 6시. 오빠가 목사님을 따라 말을 하기 시작하다. 첫마디는 '아멘!'이었다. 모든 기억이 생생한 듯하였다. 이상이 제 동생의 일기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제가 얼마나 큰 사고를 당했는지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지 일주일 후 처음으로 엎드려서 죽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지만, 육신의 고통은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우선 호흡을 해야만 살수가 있는데 가래 때문에 숨이 막혀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자, 가래를 뽑기 위해 목구멍을 뚫어야 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간이라지만, 졸지에 당한 불행은 너무도 큰 그것도 하필이면 제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일찍 아버지를 여윈 저를 잘 키워 주신 어머님, 사랑의 결실인 첫아들을 얻어 행복해 하던 아내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적이란 바로 이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나간 남편을 한밤중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대하게 될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혼이 나간 듯 허둥거리는 어머니와 함께 제발 남편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하느님께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리고 차츰 정신이 들자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내 남편이 이런 사고를 당해야 하지. 이런 얘기는 신문의 사회면 한쪽 구석에나 나오는 얘긴데….이런 걸 두고 청상과부가 된다는 거였구나.라고 온갖 생각으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냉철하고 현명했습니다. 젖먹이 어린것의 눈동자가 그날따라 유난히 애처롭게 보여, 이 어린것을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아이로 크게 할 순 없지 않은가? 무슨 수로 남편의 의식을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그저 하루 밤을 더 자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번쩍 눈을 뜰 것 같은 남편, 아니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아내 크리스티나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었답니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의 제일 큰 의문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었습니다. 이렇게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안긴 저는, 사고 34일 만에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떴습니다. 아주 생소한 분위기에 의구심부터 들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내가 왜 이런데 누워 있을까? 여긴 우리 집이 아닌데,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저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 팔과 손을 주무르고 있는 아내와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여보, 나 알아보겠어요? 내가 누군 줄 알겠어요? 아내는 저의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는지 궁금해 다그치듯 물었습니다. 내가 어째서 여기 누워있는 거지?” 모든 기억력을 동원해 한 달쯤 전, 그날 밤 저 자신에게 닥친 그 일을 퍼즐 맞추기 게임처럼 조각조각 맞춰보기 시작했습니다. 맞아! 그날 난 일본 바이어를 접대하고 자정이 넘어서야 택시를 집어탔지. 들어가면 빈 택시로 나오기 십상이라는 운전기사의 툴툴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뒷좌석에 기대어 피곤한 눈을 감았었어. 그리곤 얼마 안 가서 택시는 무서운 소리를 내며 무언가에 부딪혔어. 자고 있던 나는 사고가 나는 걸 눈치 채지도 못한 채 그 충격으로 의식을 잃었던 거야. 그제야 제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어머니를 통해 그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던 경위를 들었습니다. 제가 기약 없이 치료받고 있을 때, 하루는 같은 병동에 있는 자매님이 저를 방문했습니다. 이 날 자매님은 `묵주의 9일기도` 책을 주시면서 저희 부부에게 계속 기도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아내 크리스티나는 그날부터 한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중에 좋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휠체어를 타고 지내야만 했었는데 제대로 중심을 못 잡기는 하였지만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해 9월 12일에는 묵주기도 책을 주신 자매님의 안내를 받아 사고 후 처음으로 가회동 성당에 갔습니다. 주님의 성전에서 미사 참례를 하며 저는 감격에 겨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시 돌아와 주님의 품에 안긴 저는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끌고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의 모습처럼 울고 또 울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속된 말로 아주 잘 나가던 시절, 1981년 일 년 동안은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미사참례조차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영세한 지 이십 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리고 하느님 대전에서 우리 부부가 혼인성사를 받았음에도, 또한 저희에게 귀한 자식을 선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저희 부부는 까마득히 주님을 잊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통사고라는 큰 고통은 세속 일에 눈이 멀어버린 저희 부부를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11월 초, 사고 발생 여덟 달 만에 저는 퇴원을 하여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저를 위하여 한 달 간에 걸쳐 계속 기도해 주신 레지오 단원들의 기도와 권유에 따라 저희 부부는 1983년 봄 성령 세미나를 받게 되었고, 세미나 중 심령기도의 은사를 받아 뜨겁게 하느님을 체험하고 열심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던 여러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되었는데 그 해 11월에는 신정동 본당에 계셨던 신부님 영명축일을 맞이하여 저는 영적 선물로 십자가의 길 365번을 봉헌한 후, 일과표를 작성하여 그에 따라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일과가 얼마나 바빴던지 길을 가면서, 목욕탕에서, 이발소에서도, 식사 때에도 저의 삶의 모두가 기도였습니다. 신문이나 TV를 볼 시간도 전혀 없이 기도와 성경읽기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필립비서 1장 21절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말씀이 바로 저에게 해당되는 말씀처럼 여겨졌습니다. 매일 구약성서 석 장과 신약성서 한 장 이상씩을 읽어 1983년에서 1985년까지 구약성서를 세 번, 신약성서를 다섯 번 읽었고, 저와 저희 집안에 베푸신 주님의 크신 사랑에 알맞는 성시 28군데를 시편에서 발췌 암기 인용하여 주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시편 구절들을 인용하여 주님께 찬미 드리고 있습니다. 그중 일부를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 죄 많은 저를 죽음의 문턱에서 건지시어 사랑을 가득 부어 주신 자비로우신 아버지, “지난날이 눈에 선합니다. 주님의 은덕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손수 베푸신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시편 143, 5) 저에게 오늘이 있다는 놀라움, 저와 저희 집안에 베푸신 그지없이 크옵신 사랑, 이 모든 신비들, 그저 주님께 감사합니다.(시편 139,14 참조) 주님의 사랑, 이 목숨보다 소중하기에 이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이 목숨 다하도록 주님을 찬양하며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주님의 크신 사랑, 만방에 모두 전하리이다. 앉거나 서거나 걸을 때나 누울 때나 주님 생각,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 생각 뿐, 저를 도와주신 일 생각하면서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몸은 행복합니다. 이 몸, 주님께 포근히 안기면 주님 오른팔로 온전히 저를 붙들어 주십니다.(시편 63, 3 -8 참조)
그 즈음에 신정동 본당에 계셨던 신부님이 주일 미사 강론 중에 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 말씀은 오래도록 저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이웃, 특히 저의 가족, 아내와 아들을 통하여 저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부어 주심을 느낄때가 많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살 반 밖에 되지 않은 저의 아들을 통해서도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셨는데 제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여 준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화장실에 가려고 방에서 일어서면 그 어린 것이 얼른 저에게 지팡이를 가져다주었고, 제가 지팡이를 짚고 현관을 향하면 아들은 먼저 달려와 운동화를 챙겨 주곤 하였습니다. 제가 운동을 하고 방에 앉아 있노라면 아들이 제 발바닥이 더러운 걸 보고 아빠 지지하며 저를 화장실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변기를 가리키며 여기 앉아합니다. 제가 변기 위에 걸터앉으면 아들은 세숫대야에 물을 받고,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제 발에 비누질을 하고 말끔히 닦아 줍니다. 그 순간, 저는 주님께서 손수 저의 발을 씻어 주시는 듯이 느껴졌고 매우 행복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의 발을 씻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겸손을 저에게도 주십시오.하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저의 기도 시간에 아들 친구들이 놀러오면, 아들은 친구들에게 아빠, 기도!하면서 친구들을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또 제가 외출 전후에 성모님께 꼭 인사를 드렸는데 어쩌다 제가 잊은 경우에는 아들이 성모상 앞에 가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하여 제에게 인사 안 드린 사실을 깨우쳐 주곤 하였습니다. 저는 아들의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기도생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시성되기 직전의 한국순교복자 103위 각 위를 호칭하며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기도 하고 저의 치유와 저처럼 어려움에 처해있는 이웃들을 지향하며 매일 묵주의 기도 5단, 십자가의 길, 15기도 등을 꾸준히 바쳤습니다. 이와 같은 저의 간구에 주님께서는 저를 조금씩 고쳐 주셨으며, 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저를 완치시켜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육신의 치유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의 건강 상태가 조금씩 회복되고 젖먹이 큰아들이 네 살이 될 무렵, 저희에겐 둘째 아들 재호가 태어났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가장 역할을 대신 짊어지게 된 아내는 세를 놓았던 점포 문방구를 인수받아 직접 경영하였는데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가게를 보아야 했으므로 아내는 정말 힘들게 지내야 했습니다.
그때 저희 부부는 1985년 7월 말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던 2박3일의 피정에 참석하였는데, 그 피정에서 제가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제가 좋아하는 기도나 묵상이 이웃의 생각이나 이웃이 원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아내와 어머니는 아침에 동생들 출근시키랴, 집안 청소하랴, 그 해 태어난 둘째 아이 돌보랴, 기저귀 빨래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기도에 미친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피정을 통하여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뜻을 존중하고 일치해야 함을 알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가족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저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불편한 몸이지만 무언가 우리 가정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안방 이불과 요를 개어 옷장에 얹는 일을 시작했고 방도 제가 쓸며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 눈에 하찮은 일처럼 보이겠지만, 저로선 가정을 위해 일한다는 보람과 기쁨이 컸습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집안 살림을 거의 도맡아 해주셨고, 틈틈이 가게도 지켜 주시는 덕택에, 아내는 문방구점을 잘 꾸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문방구가 제법 자리를 잡아갈 무렵, 어머니의 신경통이 도져서 더 이상 가게 일을 도와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파트타임으로 아르바이트생을 쓸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가족들이 고민할 때, 불쑥 그 일을 제가 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반신반의였습니다. 자유롭지 못한 몸으로 진열대 꼭대기에 있는 학용품을 꺼내 주기도 힘들 것 같고, 말이 빨라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이 잘 될지 의문스러웠던 것입니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판단력이나 정신력은 아직도 어린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제가 돈을 받고 거슬러주며 물건을 팔 수 있을까 아내는 걱정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별다른 해결책도 없었으므로 아내는 마지못해 허락했습니다. 어머니는 전적으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시고, 문방구 일은 우리 부부가 전담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내는 혹시 물건을 사러온 아이들이 제 불편한 모습을 보고 놀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아내의 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에게는 기억력이나 판단력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자극제가 필요했습니다. 그저 방에서 가만히 있는 것으론 전혀 변화가 없었고, 무엇인가 부딪혀서 자기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길 때 저의 의식세계는 날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지 2년이 지났을 때 아내 크리스티나는 자기에게 의지하던 남편이, 이젠 자기가 남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이처럼 모든 걸 아내한테 의지했던 어린애 같은 제가 어느새 든든하고 믿음직한 남편 본래의 모습으로 아내 곁에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크리스티나를 도울 수 있게 되자, 부부가 함께 있으면서 사소한 일로 서로 다투는 일이 자 주 생겼습니다. 한번은 손님이 찾는 상품을 얼른 못 찾아 아내에게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는데 아내는 몇 번씩 이야기해 주었는데 또 물어본다고 화를 내었습니다. 저는 문방구 보면서 기도를 열심히 하느라 그런데 신경 못써서 그런 건데 그것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아내가 야속했습니다. 아내도 가리켜줘도 매일 몇 번씩 물어보는 남편이 참으로 미웠을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주님께서 축복해주신 이 문방구에서 당신의 선물이고 저의 행복인 아내와 함께 영업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가 크리스티나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아내와 호흡을 잘 맞추어 살 수 있게 도와주세요.'하고 기도하며 저 자신을 순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일치가 없는 최선보다 일치를 이룬 차선이 아름답다는 생각으로 항상 하느님의 뜻을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게다가 문방구점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워지자, 아내는 남대문 새벽시장 옷가게에 점원으로 일하러 다녔습니다. 저 역시 신체적으로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남아 있었지만, 정신력을 완전히 되찾게 되자 문방구 일 대신 좀 더 부가가치가 있는 자신만의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저의 화려한 졸업장들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명문이라는 서울중학교와 서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한 저 자신의 머리를 살려 중고등학생들 수학 과외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중학교와 고등학교 수학 참고서를 꺼내 들었습니다. 학창시절 학급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수학 실력이 다시 되살아 주기를 바랐습니다. 아내는 그렇지 않아도 다른 업종으로 전환을 하려고 하던 참이라 저의 그런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마침 꾸리아 단장을 지낸 형제님께서 입원하여 있었기에 문병하였을 때, 제가 중고생 수학 과외를 하려 한다 이야기하였더니, 그 형제님께서 기꺼이 작은아들을 맡겨 주었습니다. 이때가 1991년 5월이었습니다. 저는 옛 기억을 되살려 열심히 가르쳤고, 그 후 이 학생은 학교 성적이 오르면서 저의 수학 실력이 괜찮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소문은 신자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번져나갔고, 이번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미 자신의 기억력을 완전히 회복한 상태이고 제가 못 푸는 문제가 나오면 매주 모임을 같이하는 고등학교 수학교사이신 형제님이 해결하여 주었으므로 걱정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고정적으로 그룹과외 한 팀과 단독 과외를 실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방구 일을 그만두면서 저는 정말 자신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경제적 독립까지도 이룬 셈입니다. 그 후 12년 동안 중고생 학생들의 수학과목을 전문으로 과외지도를 계속하였습니다. 아직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말이 부족한 저에게 학생들을 맡겨주셔서 가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신 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매일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모시고 성모님께 묵주기도와 삼종기도를 드렸습니다. 은총을 받은 덕분으로 학생들 성적이 많이 올라가 어머니들이 고마워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여기 일산에 이사 와서 수학 과외를 접었으나 마두성당에 다니는 자매님의 요청으로 작년에 수학 과외를 다시 시작하여 지금은 두 팀의 중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내 크리스티나는 남대문시장 일을 보면서 더욱 억척스러워졌습니다. 결혼할 때만 해도 수줍은 새색시였는데, 유능하고 건강했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로 중증 장애인이 된 데다 시어머님을 비롯한 모두 일곱 식구의 가장이 되어야 했던 크리스티나는 환경이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몸소 겪으면서 보여 주었습니다. 새벽 남대문시장은 지방에서 올라온 상인들로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곳입니다. 문방구를 운영할 때 물건 구입을 위해 자주 나와 보긴 했지만, 불야성을 이룬 새벽시장을 보게 된 건 아내가 옷 가게에서 점원 생활을 하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아내는 새벽 3시면 집을 나섰습니다. 아직 여명이 밝기도 전인 이른 시각에 가족들이 곤히 잠들어 있을 때, 크리스티나는 두툼한 옷을 걸친 채 새벽 어둠속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저는 아내가 현관문을 잠그고 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늘 미안함과 감사함을 금치 못했습니다. 새벽 3시에 나가 오후 5시경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아내, 고생이라고는 몰랐던 아내가 저를 대신해 고생한다 생각하니 마냥 가슴이 시렸습니다. 며느리를 생활전선에 내보내는 어머니의 심정도 저하고 같았습니다. 여느 시어머니 같으면 며느리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편히 지내실 어머니신데요, 아들이 교통사고로 온전치 못하니, 아들도 아들이지만 며느리가 여간 불쌍하지 않은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항상 즐겁게 며느리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주십니다. 이 자리에서 집안일을 맡아 주시는 어머니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옷 장사는 아내의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주님께 크리스티나에게 알맞는 품목으로 영업을 옮겨 주십사하고 한동안 계속해서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한 끝에, 악세사리 점포로 자리를 옮겼고, 아내는 미래를 준비하면서 여전히 점원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당시 아내가 받는 점원 월급으로는 세금과 보험료, 은행 이자를 내면 돈이 없었기에 제가 지도하고 있는 학생들 수학 과외비를 생활비로 충당했습니다. 때마침 마땅한 점포자리가 나왔기에 아내는 보증금 얼마에 월세를 주기로 하고 점포를 얻어 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점포도 좋은 자리였지만 악세사리 파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자 점포 주인은 아예 점포를 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아둔 돈은 없었지만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 어머님 칠순 잔치 때 들어온 축의금으로 점포를 계약하고 은행에서 융자를 받고 처제에게 돈을 빌려 마침내 점포를 사들였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새로 주신 삶을 산 지 어느덧 26년이 흘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저를 살리시어 영과 육을 치유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모든 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내는 이제 점포를 구입할 때 받은 은행 융자금은 모두 상환하고, 지금은 46평짜리 아파트에서 승용차로 출퇴근하며 영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발을 닦아주고 아빠의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준 큰아들은 대학을 졸업 후 직장에 근무 중이고 새로운 삶을 허락하신 후 선물로 주신 작은아들은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하여 공부중입니다. 저희가족들은. 늦은 밤 시간이면 아내가 부업장 에서 회수해오는 머리핀을 한자리에 둘러앉아 포장작업을 하면서 오순도순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저희 가정에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저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때나, 중고등학생들 수학 과외지도를 할 때나, 가족과의 일치, 두 아들 교육문제 등 생활의 모든 문제들을 미사성제와 성체에서 그리고 공동체의 형제들과의 사귐을 통하여 받은 은혜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아내 크리스티나 덕분입니다. 당신은 죽었었는데 주님께서 살려주셨으니 당신은 주님의 것이요, 따라서 가계는 내가 돌볼 테니 당신은 주님의 일만 하세요.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도 오늘도 하느님을 좀 더 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일을 잘 하기 위하여 신경을 쓰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직도 육신의 불편함은 완치되지 못하였지만 두 아들이 건강하게 자랐으며 어머님과 아내와 함께 사랑으로 일치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현재 저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작은 일에 감사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며, 차근차근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