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7일 (수)
(녹)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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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부님의 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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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무 [incloud] 쪽지 캡슐

2001-06-12 ㅣ No.21150

사제관 일기 66  

종일토록 특강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신자 재교육을 목적으로 또 한번의 특강을 준비 중입니다.

신앙의 질을 높이겠다는 차원 높은 명분은 아니래도,

적어도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가르침은 줘야 하겠기에,

힘들지만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머리로는 한달을 꼬박 걸려야 하나의 강의가 겨우 나오니,

이만 저만한 고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신학교 시절에 들었던 은사님의 말씀이 절실히 생각납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신부생활 3년만에 바닥이 나버린다 하셨습니다.

삼 년이면 익힌 것도 동이 난다는데,

그래도 저는 그렇저렇 오년간은 버티며 살고 있으니,

이 또한 하느님의 은혜인 줄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지식도 언젠가는 동이 날 텐데, 정말 앞 일이 걱정입니다.

벌써부터 강론 하나도 버거워서 머리를 싸매며 낑낑대니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무슨 힘으로 버텨낼 것인지 내심 고민입니다.

아무래도 말씀의 은혜를 기도에서 찾아야 함이 옳음 직한데

저는 도무지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말만 무성한 껍데기 신부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

기도하지 않는 사제의 모습....

그것이 제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도

저는 그 위태로운 길을 지금까지 걸어왔습니다.

제 지식, 제 능력 하나만 믿고 까불어 왔으니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제 영성은 바닥이 나고, 제 신앙마저 무너져 버릴 겁니다.

그것이 두렵습니다.

사제가 사제의 본질을 잃을 때, 모두를 잃게 된다는 건 차마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오늘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 사제의 언변이 인간적인 지식에서 나오지 않고,

하느님의 지혜에서 나오는 말씀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해주십시오.  

이 사제의 말씀이 힘을 잃지 않고,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하느님의 능력이 될 수 있도록도 빌어주십시오.

하면, 이 사제의 무능함도 능히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

공연히 기도의 짐 만을 지워드리는 것 같아 송구합니다.    

그렇지만, 저 역시도 저를 위한 기도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나날이 새로워지는 말씀의 선포자가 되어

그 은혜를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그 한 가지의 약속을 걸고,

오늘밤 제 무능함을 여러분 앞에 조용히 내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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