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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야곱과 에사우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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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석 [fedepedro] 쪽지 캡슐

2008-07-21 ㅣ No.3227

본글은 이사악의 나이 관련해서 답글을 달았던 내용인데 부득이 따로 옮기게 되었으므로

질문없이 글을 올리게 된 점 양해를 구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분심이 드는 대목 중에서 으뜸가는 내용을 찾으라면

야곱이 어머니인 레베카와 공모를 해서 늙어서 눈이 침침해진 이사악을

속이고 에사우의 축복을 가로채는 부분입니다.(사실은 이미 에사우가 창세기 25장

33절에 나온대로 맹세까지 하고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아먹은 것임)

 

1.구약의 하느님을 부인하면 삼위일체 신앙을 부인하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함

야곱과 관련된 부분을 읽고 많은 분들이 생각하기를 하느님은 야곱과 같은 사기꾼을 축복해주시는

분이신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되며 이러한 의문이 분심이 되어 하느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아니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예수님을 연결하여 삼위일체의 하느님으로

믿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급기야 구약은 믿을 게 못된다 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될 수

있는데 이는 중대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중대한 문제란 우리의 핵심신조인 삼위일체를 부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신앙을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즉 삼위일체 하느님의 세 위격으로 세례를 받은 것인데 사실은 세 위격을 지니시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하느님(성부)을 신약의 예수님(성자)과 달리

공의롭지 못하다느니, 잔인하다느니, 사랑이 없다느니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신약의 예수님과는 다른

하느님으로 오해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부정하는 중대한 문제를 스스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구약에 계시된 창조주이시자 섭리주이시고 심판주이신  하느님으로써  신약에

메시아이시자 다윗의 후손으로써 구약의 예언 내용대로 사람의 몸으로 오신 성자하느님이신 예수님과 오순절에

강림하시어 믿는 이들을 한 몸(교회)으로 만드신 성령하느님과 함께 모두 세 위격이시지만 한 본체를 이루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신구약에 나타나는 구약의 야훼 하느님, 그리고 신약의 구속주이시자

구세주이신 성자 하느님 그리스도, 또한 오순절에 강림하시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비체(교회)를 이루시는 성령 하느님, 세 분 모두가 비록 구원의 경륜을 위해 세 위격으로

나타나시고 세 위격으로 오늘날에도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지만 본질인 천주성에 있어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심을 믿어야만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함에 있어 한 분이신

하느님을 먼저 이해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세분으로 잘못 이해하게 되면 삼신론, 즉 다신론자가

되어 저절로 우상숭배자가 되므로 만일에 성경에 계시된 구약의 하느님, 신약의 예수님,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을 세분의 하느님으로 이해한다거나 구약의 하느님은 잔인해서 신약의 예수님과 다르다 라고

이해한다면 우리의 핵심신조인 삼위일체에 대해 충분한 깨달음이 없는 상태이므로 신앙의 선배및

신부님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또한 주님께 기도로 깨달음 주시기를 청해서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앙이 필요합니다. 구약의 야훼하느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바로 천주성에 있어 한 분이신

하느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미사 봉헌시에 저희가 바치는 신앙고백(니체아 신경)이 바로 이러한 세 위격을 지니신 한 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미사를 봉헌하며 신앙으로는 이와 같이 고백하면서도 글을 쓸 때에는 구약의

하느님은 공의로우신 하느님으로 믿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불신이 생기는 이유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읽게 되면 구약의 하느님이 공의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심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구약의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반쪽 짜리 신앙이 되지 않도록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 성경에 나온 그대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상상 속의 하느님이 아닌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으로 온전하게 신앙하고

올바르게 흠숭지례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저역시 과거에는 구약의 하느님을 부인하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마침 이런 주제로 몇일 전에 올린

글을 일부 정리를 해서 다음과 같이 과거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눔차원에서 올리게 되었으니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2.부르심에 응답한 죄인을 축복(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먼저 야곱같은 사기꾼을 축복해주시는 하느님이시기에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음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에 일관적으로 흐르는

내용은 우리가 의인이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라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사기꾼이었는데 축복을 받았듯이 우리가 죄인임에도 구원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축복을 원했던 야곱은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고 죽 한 그릇에

장자권(축복)을 팔아먹은 에사우는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똑같은 죄인인데

부르심에 응답했는가? 아니면 거절했는가? 라는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한 죄인(야곱)에게는 성화의 길을 걷게 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품성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십니다 . 이와 같이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섭리를 야곱의 고난(20년간 타향살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을 받은 야곱은 그 축복으로 인해 에사우로 부터 도망쳐서 장장 20 년에 걸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14년간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 품삯없이 종살이를 하고

그 다음 6년은 점이 있고 얼룩이 있는 양과 염소를 품삯으로 받기로 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며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견디며 힘든 고생을 하게 됩니다.

라반을 섬기며 일했던 20년 동안 야곱이 얼마나 힘들게 고생했는지에 대해

야곱을 뒤쫓아 빼앗으러 온 라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창세기 31장40절)

40 낮에는 더위가, 밤에는 추위가 저를 괴롭혀,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의 기후는 한국과는 달리 낮에는 참기 힙들게 덥고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하여 무척 춥습니다.

낮에 찌는듯이  더운 가운데 양과 염소를 치느라 그 고생을 하고도 밤에는 추워서 오돌오돌 떨면서

눈도 제대로 못부치며 20년을 고생한 것입니다. 축복은 어떤 면에서 고생을 통해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고난이 축복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편, 야곱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속이고 빼앗던 야곱이 열번에 걸쳐서 급료체계가 바뀜으로써

라반에게 오히려 속임을 당했음을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이야기합니다.(31장41절)

41 이 이십 년을 저는 장인 어른 댁에서 지냈습니다. 그 가운데 십사 년은 어른의 두 딸을 얻으려고, 그리고 육 년은 어른의 가축을 얻으려고 일을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장인 어른께서는 저의 품값을 열 번이나 바꿔 치셨습니다.

품삯을 열번이나 바꿔쳤다는 이야기는 야곱에게 불리한 조건이 되도록 라반이 야곱에게

강요함으로써 야곱이 속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속이던 야곱이 이렇게 속임을 당하는 사람이 되어서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아마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대부분 자기가 당해서 아픔을 느껴야

과거에 그와 같은 죄를 저지른 자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20년간의 고된 타향살이를 통해 야곱은 변화된 인간으로 다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었고,

게다가 야뽁 건널목에서 에사우에게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밤을 새워가며

하느님을 붙잡고 매달리던 씨름(기도)를 통해 드디어 하느님으로부터의 축복이 사실은 20년전에

에사우를 피해 도망치던  그 때 베텔에서 이미 언약으로 주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개인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로만 가능한 것임을 야곱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음에 기술하는 내용은 하느님께 항복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이기는 사람이라고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심에 있어서 야곱의 체험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문자적인

내용의 이면에 담겨진 영적인 체험을 근거로 풀어 쓴 것이므로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야곱 관련한 성경말씀은 사실 야곱이라는 한 인간(죄인)을 하느님께서 택하시어

장기간의 훈련을 통해 하느님의 품성을 닮은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점차 성화시켜

속이던 야곱이 종국에는 겸손하고 정직한 야곱이 됨으로써  에사우와도 화해가 일어나게

하시는데 이러한 화해는 야곱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내신다

라는 것입니다.  이하 기술하는 내용은 야곱의 변화와 관련해서 야뽁 건널묵에서의 하느님과의

씨름이 함의한 영적인 상징에 근거하여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3.야곱의 두려움을 치유하시는 하느님(창세기 32장 33장)

야곱이 두려움으로 가족과 가축은 야뽁 건널목을 건너게 한 후, 자신은 뒤에 남아 밤새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여 축복을 얻게 되는 과정이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 성경에서는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하여

이겼다 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영적으로 바라볼 때, 임박한 두려움(에사우가 자신과 가족을 죽일지도

모른다 는 두려움임)으로 인해 죽기 살기로 하느님께 매달려 씨름한 것으로써 영적으로는 씨름하듯이

죽기 살기로 기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내용을 보면 환도뼈를 다쳐서 절뚝거리게된 야곱이 진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창세기 32장

29절에서 이야기하듯이 야곱이 이긴 것이라고 인정해주며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줍니다.(이스라엘에는 "하느님 자신을 드러내신다" 는 의미가 있으며 이후로 야곱의 품성이

변화되어 하느님을 닮아간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주신 영적인 의미는 하느님께 항복한 사람에게서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신다 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느님께 항복한 사람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능력(성령)으로 그 사람 안에서 나태내시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하느님을 표현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은 표식으로 할례와 돌에 새긴 율법을 받아

이러한 표식으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백성임을 주장한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하느님을 표현하는 믿는 이들은 세례와 마음에 새긴 성령의 법을 받게 되는데

이는 외적인 표식이 아닌 내적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성령)을 모셔야만 비로소 신약의 성도들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백성이 됨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외적인 표시로 할례와 율법을 받았지만 신약의 이스라엘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적으로 주님과 함께 죽는 세례와 내적으로 살아계신 성령의 법에 따라 순종하고 인도됨으로써 하느님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32장과 33장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보면 하느님과의 씨름 전에는 야곱은 자신은 뒤로 빠진 채 선물과 가족을

32장에 보면 앞에 내보냅니아. 이는 에사우의 보복이 있을 때 마지막으로 자신이라도 살아남겠다는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에 있는 자기 보존 본능을 나타냅니다. 인류역사는 자기 보존 본능을 지닌 

인간들 사이에서의 충돌과 전쟁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뽁 건널목에서 밤새 하느님을

체험(씨름)하고 축복을 받은 후에 야곱의 삶은 일대 전환이 일어납니다.  33장에 보시면 야곱이

앞장서서(가족은 뒤에 따라오게 하고) 에사우 앞에 나가며 일곱번을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게 나타나고

야곱과 에사우가 함께 껴안고 울면서 화해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에사우를 두려워했던 야곱은 변화되어 가족보다 앞서 에사우 앞으로 일곱번에 걸쳐 땅에 엎드려 절하며

형제 앞에 자신을 낮추며 환도뼈를 다침으로 인해 절뚝거리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에사우에게

나아갑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늙고 절뚝거리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늙은 동생이 과거와는 달리

겸손해져서 무려 일곱번에 걸쳐 땅에 엎드리며 자기 앞에 나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자신의 축복을

사기로 가로챈 동생에 대해서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에사우의 미움은 눈녹듯이 사라지고 그의 심령에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을 지난 20년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라는 회한이 떠올랐을 것이며, 축복을

야곱이 가로챈 것은 사실은 죽 한 그릇에 축복을 자기가 스스로 야곱에게 팔아먹은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못난 동생을 죽이려하여 동생이 도망을 가서 이십년이나 밤의 추위와 낮의 더위로

고생하며 (창세기 31장 40절) 등이 휘도록 일하며 타향살이 하다가 폭삭 늙어 이제서야 돌아온 야곱이

다리까지 절뚝거리며 무려 일곱번씩이나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지

않을 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33장 4절에 보면, "에사우가 먼저 야곱에게 달려가서 야곱을 껴안고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추었다."

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용서를 베푼 것이 에사우인데 이러한 에사우의 용서가 일어난 것은 바로 야곱의

 변화에 근거한 것입니다. 야곱은 하느님으로부터 야뽁 건널목에서 치유를 받았는데, 그 치유로

에사우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형제 앞에 자신을 진정 낮추는 겸손으로 형제를 섬기겠다는 내적인

변화를 얻은 것입니다.

 

이후에 야곱에 대한 창세기 내용을 보시면, 속이고 빼았던 야곱에서 오히려 자식에게까지 속임을 당하는

야곱으로 극적인 변화가 보여집니다 (요셉을 팔아먹고 죽었다고 거짓말하는 것에 속아넘어감).

또한 영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원숙해져서, 딸 디나 강간사건이 있었을 때에도 하느님의 징계임을

깨닫고 가족과 함께 우상들을 버리고 정결하게 하느님 앞에 과거에 서원했던대로(28장 22절) 베텔로

나아가 제단을 쌓고 하느님을 섬기게 됩니다(35장).  이렇게 변화된 야곱에 의해 에사우의  복수심까지

치유가 되게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것입니다. 야곱을 죽이겠다던 에사우는 야곱을 사랑하는 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변할 때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야곱이 변화되자 에사우가 동생을 사랑하는 형으로 변화되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이 변화될 때

세상도 변화될 것입니다.

 

4.하느님께 지는 것이 바로 하느님 보시기에는 하느님을 이기는 것이다.

야뽁 건널목에서 야곱의 체험을 보면 사실상 환도뼈가 부러짐으로써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이는 야곱이 하느님 앞에 항복하게 된 것을 영적으로는 상징합니다. 즉 그러한 항복(자신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함)을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이겼다 라고 표현해

주십니다.(31장 40절) 

사실상 환도뼈를 다침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된 야곱이 하느님께 진 것이지 하느님이 야곱에게 진 것이

아님에도 하느님 스스로 야곱이 하느님을 이겼다 라고 창세기 31장에 표현하십니다. 야곱이 밤새

씨름(기도)으로 하느님께 매달림으로써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내어 에사우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환도뼈가 다쳐서 혼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된 야곱이 어떻게 씨름으로 하느님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에는 영적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있는데, 야곱은 그동안 자기 스스로 서있을 수 있고 자기 스스로

걸어다닌 것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주님께서 은혜로 깨달음을 주시어 다음의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이 은혜로 붙잡아 주시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고 걸을 수도 없었다" 라는 사실을

영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 보시면 베텔에서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라고 언약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20년전의 약속에 의해 지금까지의 일이 일어났으며 앞으로도

하느님께서 그렇게 지켜주실 것임을 깨달음을 통해 알게 된 야곱은 드디어 하느님 앞에 스스로는 홀로

설 수 없는 자임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 항상 의지하는 사람이 된 것, 즉 스스로 제대로 설 수

조차 없는 사람임을 인식한 것을 바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이긴 사람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이며

환도뼈를 쳐서 절뚝거리게 된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과 같이 스스로 하느님 앞에 제대로 서있을 힘도 없는 사람임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신

손(은혜)으로 우리를 잡아주시어 비로소 우리가 제대로 걸을 수 있게 은혜주시기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5.항복한 사람 만이 하느님 안에서 안식하게 되고 평화를 얻는다.

이렇게 주님 앞에 항복해야만이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어 세상의 두려움과 증오, 탐욕으로부터

자유함을 입고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찾고 심령에 평강과 기쁨이 샘솟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항복할 때 주님께서 우리대신 능력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가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코린토 2서12장에 보시면 바오로 사도에게 주님께서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주님께 항복하는 자에게 주님이 능력이 되어주심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묵시록에 수차례에 걸쳐 나타나는 표현인  "이기는 사람", 즉 최종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이기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느님께 항복한 사람임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된 자아를 이기시도록 우리가 그리스도께 항복할 때 바로 우리는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항복한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성경에서 하느님을 이긴 사람이라고 표현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항복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성경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하느님께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편견이나 잘못된 세상적 지식을 가지고 성경이 맞네 틀리네 주장한다면 그런 사람은 성경말씀을

믿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믿지 못할 때 당연히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되므로 그러한 사람은

하느님을 섬길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 만이 하느님 이신데 성경말씀을

못믿게 되면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을 믿지 못하면 하느님 마저도 믿지

못하게 되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이란 대부분 하느님께서 직접 계시해주신 공적계시의 말씀이고 또한 성령의 감도로 여러 시대에 걸쳐

장구한 세월 동안 40 여명이 넘는 저자들을 통해 서로 다른 문자로 기록되었음에도 일관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구원 열망을 다루고 있는 바, 성경말씀은 거짓 없으신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임을 믿고 의심없이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성경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순종할 때 성령하느님께서 성경의 하느님 말씀에 있는 문자적 의미 이면의 영적인

의미를 알게 해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믿는 이의 믿음과 순종이

점차로 강해지게 하십니다. 믿음조차도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허락하셔야만 우리가 제대로 믿을 수 있음을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은사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은사를 기도로 청하시면 주님께서 즐겨 들어 주실 것입니다.

믿음도 은사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에 믿음의 은사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은사를 받으면 하느님의 섭리와 하느님의 뜻, 성경말씀을 믿음으로 받게되고

깨달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주님께서 믿음의 은사를 더해 주시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추신:

위에 적은 내용은 제 개인적인 묵상이므로 정통적인 성경해석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중에 하나가 "야곱과 에사우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사우는 미워하셨다" 라는 성경말씀을 두고 절대 예정론으로 해석하여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애시당초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하느님의 예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예지(미리아심)입니다. 즉 하느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털어서 통시적으로

전지하시기 때문에 누구는 구원으로 응답하고 누구는 응답하지 않고 멸망당하는지 미리 아신다 라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옳은 것이지 누구는 아예 멸망당해 지옥으로 가도록 예정했다 라고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희 가톨릭의 교리서 또한 제가 설명드린 대로 하느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지옥을 예정하시지

않으심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교리서 1037).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 자유의지로
하느님께 반항하고 (죽을 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함으로써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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