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는 성심에 예수를 잉태하고 품으신 것처럼, 바로 예수의 지체들을 자신의 자녀로 품고 사랑을 주신다. 아울러 모성적 사랑의 열매인 하느님을 주신다.
전례의 역사
교황 레오 13세와 비오 10세는 성 요한 유데스(1601-1680)를 기려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의 첫 사도이고 사제이며 교사”라고 칭송했다.
예수성심을 경축하기 20여 년 전인 1643년에 요한은 이미 2월 8일을 성모성심축일로 삼고자 동료들과 함께 계획하고 있었는데, 5년 후인 1648년에 오툰 교구에서 축일 거행을 공식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비오 6세가 팔레르모에서 축일을 거행토록 윤허했으며, 비오 7세는 다른 교구나 수도회에서 요구가 있을 시 축일 거행을 수락하되 미사경본은 성모대성전 봉헌(흰 눈의 성모, Our Lady of the Snow : 8월 5일) 축일의 것을 약간 변형시켜 사용토록 했다. 그러다가 1914년의 미사경본 개정 시엔 부록편에 삽입되어 지역축일로 하향 조정되기도 했다.
드디어 1942년에 이르러 비오 12세가 세계를 원죄 없으신 성모성심(The Immaculate Heart of Mary)께 봉헌하면서 축일의 단계를 보편교회의 축일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성모승천 제8부인 8월 22일을 축일로 정했다.
그러나 1969년의 전례개혁 때 등급이 하향 조정되어 선택기념일이 되었고 성령강림 2주 후 토요일로 날짜가 정해졌다. 즉, 성령강림 후 삼위일체 대축일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거행한 후의 금요일, 예수성심 대축일에 이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기념하도록 한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
마리아 공경 8 (MC : Marialis Cultus, 바오로 6세의 문헌, 1974)
“오늘날 부각되고 있는 신심 경향을 드러내는 축일들도 있습니다.”
(예 : 예수성심대축일 다음 토요일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인간의 구원자 22 (RH : Redemptor hominis, 요한 바오로 2세의 문헌, 1979)
“나자렛의 동정녀께서 피앗(fiat)을 말씀하셨을 때 마리아의 성심에 구원의 신비가 자리 잡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성령의 특별한 감도로, 그때부터 동정녀이시자 모친이신 이 성심은 언제나 당신 아드님의 활동에 따르셨고, 그리스도께서 껴안으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끝없는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게 되었다. 그러기에 마리아의 성심은 끝없는 어머니의 그것이다.”
성찰
티 없는 성모성심에 대한 공경을 개인적 영성의 한 축에 놓기란 사실 말처럼 쉽지 않다. 성모신심이 출중한 사람일지라도 그 뜻을 접해보지 못했거나 간과해버린다. 그래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예수성심께 대한 공경과 더불어 티 없으신 성모성심에 대한 공경이 교회의 당면문제와 다소 동떨어졌다고 여기는 사람들까지 있으리라 본다. 영성적으로 성심에 대한 신심 속엔 성심께 기도함으로써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는 보상과 치유라는 자못 감성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심의 ‘약속’에 대한 수많은 저작물들이 나돌기도 했다.
어쨌거나 티 없는 성모성심께 바치는 공경은 비교적 늦게 꽃피운 영성인데 중세와 라틴 교부들에게서 그 뿌리를 찾을 수도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우선 꼽을 수 있는데, 그분은 “성모께서 예수를 몸에 수태하시기 전에 먼저 마음에 잉태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성 암브로시오는 성모성심을 본받을 것을 이렇게 강조했다. “성모님은 동정녀시고 겸허한 성심이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성모성심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가르침은 요한 유데스의 다음과 같은 언급일 것이다
“때로 심장은 인간의 내면을 상징한다. 특히 사랑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리아 의 성심을 기리는 것은, 단순히 마리아의 행동이나 자질 또는 가장 값진 동정녀로서의 신비를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거룩함을 칭송하는 것이다. 이처럼 출중하고 완벽한 마리아의 성심은 우리가 귀감으로 삼는 모범이고 마리아의 성심을 닮고자 하는 우리네 가슴이 이루어야 할 소망이다. 마리아는 성심에 예수를 잉태하고 품으신 것처럼, 바로 예수의 지체들을 자신의 자녀로 품고 사랑을 주신다. 아울러 모성적 사랑의 열매인 하느님을 주신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신구약을 통틀어 마음(심장, 가슴)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도덕적? 종교적 관계의 뿌리라고 가르친다. 곧, 마음은 생명체의 심리적?도덕적?종교적 중심이 되고 선악의 단초를 여는 장소라 하겠다. 현대적 용어로 보면 양심이라든가 내면성 또는 개성적 자아를 판가름하는 곳이 곧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을 바꾸는 일은 사람 전체가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새 마음이 일도록 해주리라. 그들의 몸에 박혔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피가 통하는 마음을 주리라.”(에제 11, 19-20)
사도 바오로는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라고 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다고 언급했다(2고린 4, 6). 이러한 하느님의 빛을 받아 그 뜻을 깨달은 성모성심은 성령의 궁전이고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의 궁전이 되셨다. 그러니 우리 역시 그분을 본받음이 마땅하다 하겠다. 성모성심수도회 창설자인 뻬르 장 갤락(Pere Jean Gailhac)은 이렇게 적고 있다.
“여러분은 구속사업에 밀접히 협조하시는 성모성심의 딸들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 하고 다른 이들의 성화를 위해 부름받은 여러분의 이 호칭은 여러분의 봉헌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안중한 베다 수사
마리아회ㆍ인천 제일고등학교 교장
(윗글은 옥수복님의 글에서 발췌했습니다.)
파리 기적의 메달 성당에 발현하신 성모님이 카타리나 라브레 성녀께 요청하신 기적의 메달에는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이 나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파티마의 발현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자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이 예수님의 거룩한 성심과 나란히 공경 받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 루도비꼬 성인은 가정에 성모성심과 예수성심의 상본을 모시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모님과 예수님의 성심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셔져 있는 모습을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나란히 성모성심을 예수성심과 함께 공경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신자분들이 있습니다. 나란히 라는 의미는 똑같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상식적인 이야기 이지만 쉽게 오해하고 의심하는 분들을 위해 말씀 드리는 것 입니다. 나란히의 의미를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오해가 없으리라 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예수성심과 성모성심 앞에서 성심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성심을 바라보며 공경하고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여겨 집니다.
가시에 둘러쌓인 예수성심은 한 마디로 하느님 아들의 인류 구원을 위한 수난과 그분의 영원한 자애심이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티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을 바라 보면 원죄 없으신 어머님의 하느님과 인류에 대한 사랑과 아픔이 표현 되어 있습니다.
어머님의 티없으신 성심은 인류의 잃어버린 본 마음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 마음의 고향이고 닮아야 할 참 나의 모습입니다. 깨끗한 참 자아입니다.
물질 문명 안에서 혼란스런 현세를 살아가며 방황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과 성모님의 성심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갈 길을 비춰주는 등대와도 같습니다.
성모신심을 염려하는 분들의 염려하시는 바는 이해가 되지만 거기에 지나친 기우도 있습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습니까?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을 통해 많은 은혜의 체험을 받으시길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