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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아픔' 간직한 독도 바다 밑 폭탄> (독도=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지난달 24일 독도 동도선착장 인근 부채바위 아래 수심 약 15m 지점에서 연합뉴스 사진부 수중취재팀 카메라에 포착된 불발 폭탄.오키나와에 주둔하던 미공군 93폭격대대가 1948년 6월 독도에서 실시했던 폭격연습 때 사용됐던 1천 파운드짜리 AN-M-65 범용 폭탄으로 보인다. 당시 폭격으로 적게는 십여명, 많게는 수백명에 이르는 무고한 어민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국가적 차원의 진상조사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사회부 기사참조 >> jihopark@yna.co.kr |
1948년ㆍ1952년 미군폭격 추정 폭탄 발견
"미군의 독도폭격, 일본이 유도" 주장도
(독도 서울=연합뉴스) 박지호 임형섭 기자 = `독도폭격 사건을 아시나요?'
독도 앞 바다에서 60년 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포탄이 최근 연합뉴스 사진부 수중취재팀 카메라에 잇따라 포착되면서 '영유권' 문제와 결부돼 어민 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간 독도의 슬픈 역사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일본 중등 교과 해설서의 발간으로 온 나라가 독도 이야기로 들끓고 있지만 사실 지금도 60년 전 독도가 폭격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연합뉴스는 지난달 독도의 동도 선착장 옆 부채바위 뒤편(24일)과 동도∼서도 사이 촛대바위 인근 바다(25일) 밑에서 1948년 6월 미군의 독도 폭격 당시 사용된 무게 450㎏짜리 AN-M-65 불발탄으로 추정되는 2개의 폭탄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해 8월에도 서도 땅밑에서 길이 40cm, 지름 20cm 규모의 폭탄이 발견된 일이 있다. 하지만 파편이 아닌 온전한 형태의 폭탄이 발견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독도 땅밑과 바닷속에서 잠자고 있는 이 폭탄들은 대개 1948년 6월8일 독도 상공에서 벌어진 미군 공군부대 폭격의 흔적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날 동도와 서도 주변 바다에서 평화롭게 조업중이던 한국 어민들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최소 10여명에서 최대 수백명까지 숨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주로 울릉도와 강원도에서 배를 타고 와 독도 수역에서 고기잡이와 미역채취에 열중하고 있다가 영문도 모른 채 미군 비행기에서 투하된 폭탄과 기관총 사격에 희생됐던 것이다.
당시 미군과 한국 경찰은 폭격으로 어민 14명이 숨지고 어선 11척이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1948년 월간 `신천지' 7월호에는 이 폭격 사건의 사망자가 16명(중상 3명, 침몰 선박 23척)으로 보도됐고 1952년 울릉도ㆍ독도학술조사단은 사망자를 30명으로 집계했다.
특히 `푸른울릉독도가꾸기모임'과 한국외국어대 독도문제연구회는 1995년 생존자 3명의 증언을 종합해 150∼32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무고한 어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독도 폭격에 대해 미군 측은 `B29 폭격기가 고도폭격 연습을 하면서 어선들을 바위로 잘못 알고 연습탄을 투하한 것으로 판명됐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태극기와 손을 흔들거나 바다로 뛰어들어 도망치는데도 폭격을 계속했다"고 증언했다.
1952년 9월에는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울릉도ㆍ독도 학술조사단 36명의 독도 방문 무렵에도 수 차례 미군기가 독도 주변을 폭격하는 사건이 재발했다.
이는 1947년 9월 연합국 최고사령부 명령인 SCAPIN 제1778호에 따라 독도가 미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된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군이 일본에만 폭격연습 계획을 사전에 알리고 독도를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한국 어민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는 것이 독도문제 전문가인 동북아역사재단 홍성근 연구위원의 설명이다.
독도가 미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된 것은 독도 영유권을 확보하기 위한 일본의 개입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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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아픔' 간직한 독도 바다 밑 폭탄> (독도=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지난달 24일 독도 동도선착장 인근 부채바위 아래 수심 약 15m 지점에서 연합뉴스 사진부 수중취재팀 카메라에 포착된 불발 폭탄.오키나와에 주둔하던 미공군 93폭격대대가 1948년 6월 독도에서 실시했던 폭격연습 때 사용됐던 1천 파운드짜리 AN-M-65 범용 폭탄으로 보인다. 당시 폭격으로 적게는 십여명, 많게는 수백명에 이르는 무고한 어민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국가적 차원의 진상조사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사회부 기사참조 >> jihopark@yna.co.kr |
1952년 7월 미일합동위원회에서 독도를 주일미군의 공군 훈련구역으로 지정하기로 합의했다가 이듬해 3월 독도를 훈련구역에서 제외했다는 사실이 일본 개입설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미일합동위원회 협의대상이 `일본국내 시설 또는 구역'이었던 만큼 일본이 독도를 미군의 훈련구역으로 제공했다가 해제될 때 돌려받는 형식으로 영유권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했다는 해석이다.
홍 위원은 "일본은 지금도 미일합동위원회에서 독도를 사격연습장 지정에서 제외한 점을 영유권 주장의 강력한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며 "정황상 미군이 독도를 폭격장으로 사용하도록 일본이 유도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52년 2차 독도 폭격이 하필이면 울릉도ㆍ독도 학술조사단의 독도 방문일에 맞춰 진행됐다는 점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홍 위원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출항 날짜와 시간을 잘 맞춘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고 꼬집었다.
1948년 독도 폭격에 참여한 전직 미 공군 장교 존 깁슨의 "작전지역에 선박들이 있었으나 그 선박들은 마약수송선이었으며 섬을 은신처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는 증언 내용도 일본 개입설을 뒷받침한다.
일본이 미군의 폭격연습장 지정을 통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려고 `독도에 마약운반선이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약 관련 증언은 미국인 교사 마크 로브모가 쓴 `1948년 6월 8일 독도폭격 사건에 대한 심층적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에 소개돼 있다.
그러나 당시의 폭격으로 숨진 피해자 유족과 생존자들은 `돼지 한마리 값'의 배상금만 받고 가슴 속에 사건을 묻어버린데다 더 이상의 생존자도 없어 진실규명이 쉽지 않은 형편이다.
`푸른울릉독도가꾸기모임' 이예균 전 회장은 "생존자를 만나 배상이 제대로 안된 이유를 물어봤더니 `왜 그런 걸 지금 알려고 하느냐'며 말을 꺼렸다. 미군정 시절이었으니 온갖 압력을 받았던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ji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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