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월)
(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자유게시판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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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08-08-08 ㅣ No.122870

연중 19주일  2008년 8월 10일


마태 14, 22-33.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호숫가 산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나, 육지에서 멀리 떨어지자 역풍을 만나 시달리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서 배에 오십니다. 제자들은 그분을 유령으로 착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청해서 물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자 그는 무서워하였고, 물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아 주셨고,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초기 신앙 공동체가 그들의 믿음을 알리기 위해 기록한 문서입니다. 복음서의 이야기들 안에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알리는 것도 있지만, 예수님 혹은 하느님에 대해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전하는 것도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빌려 각색하여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정확한 보도가 아니라,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문서를 기록하는 양식과는 아주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사실의 정확한 보도가 우선입니다. 사실을 보도하는 사람의 해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정확한 사실의 경위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실에 대한 해석은 듣는 사람 각자가 할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도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려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구약성서에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신 분이었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헤어져 자기들만 배를 타고 떠났던 제자들은 물 위에서 바람과 파도에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오십니다. 같은 물 위에서 제자들은 시달리며 위험에 처해 있고, 예수님은 그 위를 태연하게 걸으십니다. 제자들은 세파에 시달리고 예수님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으십니다. 


팔레스티나 주변에는 광야가 많습니다. 게다가 강우량이 적어 물이 아주 귀합니다. 이런 여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생명수의 강’(요한 7,38)이라는 표현은 이런 여건에서 쉽게 이해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많은 물은 두려움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바다라고 불릴 정도로 넓고 깊습니다. 그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고, 사람이 빠지면 생명을 잃습니다. 따라서 넓은 호수나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것은 의심, 무질서, 죽음 등을 의미합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노아홍수 이야기가 있고, 이집트 탈출기에는 홍해바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물은 생명이지만, 바다나 큰 호수는 의심과 불안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제자들은 물위에서 거센 파도를 만나 불안에 떨고 있고, 주위는 어둡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겪는 불안과 어둠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제자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안에 떨기도 하고, 헤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 어둠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일들은 많습니다. 태풍이나 폭우와 같은 자연 재해(災害)가 있고, 테러나 전쟁과 같은 인간이 원인인 인재(人災)도 있습니다. 그 외에 우리를 늘 불안하게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질병과 각종 사고들이 있습니다. 이런 위험들이 우리를 늘 불안하게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불안도 있고, 가족들을 위한 불안들도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그런 불안과 어둠의 바다를 딛고 그 위를 초연하게 걸으셨다는 오늘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알아봅니다. 그 말씀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불안과 불행을 기적적으로 극복하도록 비법(秘法)을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앙인은 그런 불안과 공포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에게 신뢰하면서 해결책을 찾습니다. 오늘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청해서 물위를 걷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에 시선을 빼앗기자, 자기의 안전을 의심하였고, 그는 곧 물에 빠져듭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걷는 신앙인이라고 해서 불안과 공포에서 완전히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거센 바람을 만나고, 비록 자기를 삼킬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있어도,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기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걷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는 베드로의 비명은 불안과 공포 앞에서 하는 신앙인의 외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불안과 공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겪는 불안과 공포를 겪으면서도, 주님을 부르면서 사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함께 불안과 공포를 극복합니다.


신앙은 불안과 공포와 불행이 있는 이 세상을 무사히 살기 위한 안전대책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으로부터 기적적 보호를 받는다고 믿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나의 존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이 모두를 하느님이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도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안고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같이, 기도하며, 사람들이 세파에 시달릴 때, 찾아가서 격려하고, 그들이 절망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해 주는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용기를 내시오. 두려워하지 마시오.’ 신앙인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들이 용기내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잡다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잃을 것을 걱정하고, 일이 잘못 될 것을 두려워하며 불안에 가슴조리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나 한 사람이라는 나무만 보지 않고 숲을 보게 하십니다. 나무는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지지만 숲은 있습니다. 우리도 받았듯이 잃고, 또 태어났듯이 사라집니다. 태어남이 은혜로운 것이었듯이, 사라짐도 은혜로운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은혜로움을 실천하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나무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숲이 있습니다. 그 숲은 소리를 냅니다. 하느님은 베푸셨고,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신다고.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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