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4일 (수)
(자)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인생고백/강 영 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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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형 [largo7a] 쪽지 캡슐

2001-04-21 ㅣ No.3341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일으키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더 크고 좋은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이미 열린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이 신체적인 장애를 갖게 된 것도 이미 하나의 문이 닫힌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문이 닫힌 바로 그 때가 하느님께서 더 크고 좋은 문을 여시는 때임을 내 인생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축구시합을 하던 중, 상대측이 찬 공이 내 눈을 강타하여 그 후유증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시각장애인이 되기 2년 전, 내가 열 세살 되던 해 아버지는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내가 맹인이 된지 1년만에  아들이 시력을 영구히 잃게 된 충격적인 말씀을 들은 어머니는  뇌일혈로 돌아 가셨다.

어머니는 목사가 되겠다던 내가 안마사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될 것을 걱정하신 나머지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셨던 것이다.

또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 4개월만에 가장이었던 누나마저 세상을 떠났다.

난 고아가 되었다.

의지할 곳 없었던 나는 아홉 살 된 여동생과 열 세 살 된 남동생을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불과 4년이란 짧은 세월에 양친과 누나와 시력을 모두 잃고 어린 두 동생을 껴안고 절망에 몸부림치며 울고 또 울었다.

 

주위에서는 우리 집안이 예수 님을 믿었기 때문에 재앙이 닥쳤다고 말했다.

남동생은 철물점에서 먹고 자며 심부름을 하며, 저녁에는 학교에 다녔다.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난 맹인 재활원에 입소하여 점자와 타자를 익혀 서울맹학교에 입학하였다.

낮에는 맹학교에서 안마술과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다.

웅덩이에 빠져 다치기도 하고, 맹인이라 재수 없다고 버스 차장이 밀쳐버리는 등 어려움이 겹쳐 도저히 학원을 계속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으로 눈물겹게 대입준비를 할 수 있었다.

맹인이라는 사실하나 때문에 받아야만 하였던  수많은 수모와 편견을 극복하고 연세대학교 교육과에 입학을 하였고, 4년 후에는 2등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지난 1972년에는 장애인은 유학할 수 없다는 법적 불평등 조항에도 불구하고, 여권과 비자를 받아 3년 8개월만에 미국의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 및 심리학 석사학위 그리고 교육전공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여 한국최초의 맹인박사가 되었다.

내가 시각장애인이 된 것은 이미 하나의 문이 닫힌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고난 속에서 주님을 보았고, 절망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실명은 장애가 아니라 하느님의 도구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간에 교량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감사하면서 주님이 부르시는 날 기쁘게 가리라 다짐해본다.

 

현재 강 영 우 박사는 미국 "노드이스턴 일리노이 대학" 특수교육국장 및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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