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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수)
(자)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인생고백/강 영 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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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형 [largo7a] 쪽지 캡슐

2001-04-21 ㅣ No.3341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일으키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더 크고 좋은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이미 열린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이 신체적인 장애를 갖게 된 것도 이미 하나의 문이 닫힌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문이 닫힌 바로 그 때가 하느님께서 더 크고 좋은 문을 여시는 때임을 내 인생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축구시합을 하던 중, 상대측이 찬 공이 내 눈을 강타하여 그 후유증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시각장애인이 되기 2년 전, 내가 열 세살 되던 해 아버지는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내가 맹인이 된지 1년만에  아들이 시력을 영구히 잃게 된 충격적인 말씀을 들은 어머니는  뇌일혈로 돌아 가셨다.

어머니는 목사가 되겠다던 내가 안마사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될 것을 걱정하신 나머지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셨던 것이다.

또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 4개월만에 가장이었던 누나마저 세상을 떠났다.

난 고아가 되었다.

의지할 곳 없었던 나는 아홉 살 된 여동생과 열 세 살 된 남동생을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불과 4년이란 짧은 세월에 양친과 누나와 시력을 모두 잃고 어린 두 동생을 껴안고 절망에 몸부림치며 울고 또 울었다.

 

주위에서는 우리 집안이 예수 님을 믿었기 때문에 재앙이 닥쳤다고 말했다.

남동생은 철물점에서 먹고 자며 심부름을 하며, 저녁에는 학교에 다녔다.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난 맹인 재활원에 입소하여 점자와 타자를 익혀 서울맹학교에 입학하였다.

낮에는 맹학교에서 안마술과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다.

웅덩이에 빠져 다치기도 하고, 맹인이라 재수 없다고 버스 차장이 밀쳐버리는 등 어려움이 겹쳐 도저히 학원을 계속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으로 눈물겹게 대입준비를 할 수 있었다.

맹인이라는 사실하나 때문에 받아야만 하였던  수많은 수모와 편견을 극복하고 연세대학교 교육과에 입학을 하였고, 4년 후에는 2등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지난 1972년에는 장애인은 유학할 수 없다는 법적 불평등 조항에도 불구하고, 여권과 비자를 받아 3년 8개월만에 미국의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 및 심리학 석사학위 그리고 교육전공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여 한국최초의 맹인박사가 되었다.

내가 시각장애인이 된 것은 이미 하나의 문이 닫힌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고난 속에서 주님을 보았고, 절망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실명은 장애가 아니라 하느님의 도구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간에 교량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감사하면서 주님이 부르시는 날 기쁘게 가리라 다짐해본다.

 

현재 강 영 우 박사는 미국 "노드이스턴 일리노이 대학" 특수교육국장 및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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