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 (목)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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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길 위의 행복을 찾아서/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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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숙 [michelleoh] 쪽지 캡슐

2012-02-05 ㅣ No.70991




일주일 동안 회의가 열리는 칭다오靑島에 다녀왔다. 중국 동부의 해안도시 칭다오는 내가 살고 있는 스자좡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 보였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깨끗하고 시원한 바람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20세기 초, 독일인들이 총독부를 설치하고 지배하던 시기에 지어진 독일풍 건물들이 즐비한 해안가 거리는 언뜻 보면 유럽의 어느 작은 해안가 마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자아내게 했다. 새로 조성된 신시가지의 건물들은 하나 같이 세련된 얼굴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파란색 깃발들이 걸려있는 가로등은 깨끗하고 시원한 도시의 이미지를 더해 주고 있었다. 시내 곳곳에서 한글 간판이 걸려있는 한국음식점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인천의 어느 골목쯤을 지나다니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개인적으로 꼭 한 번 다시 들르고 싶은 도시다.

그 모든 것들이 낯설게만, 그리고 부럽게만 느껴졌다. 지난 반 년 동안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던, 뿌옇고 바짝 마른 화베이 평원의 내륙도시 스자좡에서 온 나는 막 서울역에 내린 촌놈처럼 약간 주눅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세련되고 깨끗한 도시 이미지보다도 나를 더욱 낯설게 느껴지는 한 가지가 있었다. 회의가 끝나던 날, 칭다오에 거주하는 한인 신자들과 함께 며칠 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을 위한 연도와 미사를 바칠 때였다. 반 년 만에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는 동안 내 맘에는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일어났다. 누군가 그 많은 생각들을 굳이 한 마디로 정리해 보라 한다면 나는 결국 이렇게 이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부러움!

오랜만에 오르간 반주에 맞춰 성가를 부르고, 주례사제와 신자 들이 계응을 주고받고, 줄을 지어서 성체를 모시고 하는 일상의 미사 드리는 풍경이 내게는 이미 낯설게만 느껴졌다. 회중을 향해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면서 양팔을 벌리는 주례사제의 모습, 선포된 주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준비한 강론을 신자들과 함께 나누는 모습, ‘그리스도의 몸’을 신자들에게 쪼개어 나눠주는 모습 등, 신자들과 함께 하는 본당 신부의 모습은 너무도 부럽게 느껴졌다. 선교사이지만 그 이전에 한 사제로서 착한 신자 분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본당신부를 부러워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래, 솔직히 너무 부러웠다. 너무 부러워서 살짝 화가 날 정도였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베이징을 경유해야만 했다. 베이징을 경유하는 짧은 일정 동안에 나는 중국에 온 뒤로 첫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가까운 형제로 지내 온 친구였는데도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라서 나는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 동안 살짝 긴장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결국 우리는 만났고, 그날 밤 꽤 늦은 시간까지 그 동안 나누지 못했던 대화가 이어졌다. 대화의 내용이 별 다른 게 있었을까. 한국에서 제법 큰 도시 본당을 맡고 있는 그 친구의 주된 대화 내용은 ‘어떻게 하면 본당신부로서 더 잘 살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그의 분명하고 진실된 언어로부터 그가 얼마나 자기가 맡고 있는 본당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일하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노년 신자그룹부터 초등부 그룹까지 본당의 전체 신자들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각각의 그룹에 적합한 사목적 배려를 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하고 노력하는 본당신부였다.

“형! 그 동안 방치되어 있다시피 한 중고등부 아이들이 가장 문제예요. 학업에 지쳐서 신앙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현실에서 의무적으로 성당에 왔다가는 이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이게 요즘 제 가장 큰 숙제예요.”
“본당신부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살다보니까 어떤 문제는 ‘해야’ 풀어지는 것도 있지만 어떤 문제는 ‘안해야’ 풀어지는 것도 있는 것 같고, 또 어떤 문제는 내가 직접 풀어야 풀리지만 또 어떤 문제는 상대방이 스스로 풀게 나둬야만 풀리는 문제도 있더라고. 공을 아이들에게 던져 줘보는 건 어때?”

어느 유명한 곳 한 군데 가보려는 생각도 없이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로 이틀 동안의 중국방문 기간을 보냈다. 이제 사순시기가 시작되면 또 정신없이 바쁜 시간들을 보내야만 한다면서 서둘러 공항으로 떠나는 그를 보내고 스자좡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마음이 훵하니 뚫린 것 같은 기분으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그렇게 앉아 있다가 그의 앞길에 항상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위해 기도했다. 젊은 시절,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애정과 열정을 신자들에게 쏟아 부으면서 바쁘게 사목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사제에게는 더 바랄 수 없이 크나큰 축복임을 잘 알고 있는 그 친구가 더욱 기쁘고 행복한 사제로 살 수 있기를 빌었다. 그런 그가 몹시도 부러웠다. 이제 다시 돌아가면 난 스자좡에서 뭘 한다지? 벽을 보고 혼자 드리는 미사는 벌써 너무 힘들게만 느껴지고...... 아마 그런 생각을 할 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기차는 어느 새 스자좡 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여느 때처럼 바글거리는 인파속을 비집고 스자좡 역 광장에 나섰다. 어? 그런데 이게 웬일이라지? 이 편안한 익숙함은 뭔 일이라지? 기차 안에서만 해도 스자좡으로 돌아오는 길이 썩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스자좡 역 광장 앞에서 저 앞에 보이는 뿌연 하늘을 마주하고 딱 서는 순간 마치 고향 땅을 밟은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몰려왔다. 사람은 하물며 전쟁터에도 익숙해 질만큼 그 어느 것도 사람에게 익숙해 지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은 없다더니 어느 새 스자좡은 내 마음 속에 고향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열흘 가까이 칭다오와 베이징을 돌아다닌 뒤 돌아온 스자좡이 이토록 편안하게 느껴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역 광장에서 근처 샨시성山西省 타이위앤太原으로 가는 승합차에 탈 사람들을 호객하는 아줌마들도 반갑고, 지도를 파는 낯익은 얼굴의 아저씨들도 반가웠다. 역 앞에서 1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내게 익숙한 간판을 단 상점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편안함과 안정감을 더해 줬다. 드디어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이사하고 싶으면 연락하라는 부동산 아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어! 그 동안 안 보이던데 한국에 갔었어?”
“아니요. 칭다오하고 베이징에 일이 있어서 다녀오는 길이예요.”
“아, 그렇구먼. 불편한 일이 있거나 이사하고 싶으면 연락해! 응?”

집 근처 팔십이 중학교의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나를 보고 달려든다.

“헬로우! 한국 사람으로서 봤을 때 우리 중에 누가 제일 잘 생겼어요?”
“없어 임마! 니들 담배 피우지 말라고 내가 그랬지? 정말 니들 엄마한테 이른다!”“일러요! 우리 엄마도 나 담배 피우는지 알아요. 참! 우리 이모 언제 소개받으실래요?”
“소개 안 받아! 너 담배 피우는 것 보면 니네 이모도 뻔해. 너 담배 끊으면 생각해 볼게.”

아이들과 몇 마디 더 옥신각신 하다가 집에 들어왔다. Home, Sweet home! 문 앞에 바쳐있던 녹색 자전거가 가장 먼저 나를 반긴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깨끗이 청소를 해 놓고 떠나면 꼭 돌아올 때 이렇게 큰 기쁨을 선물로 받게 된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바닥이며 사각형 무늬 줄까지 맞춰 펴놓은 이불이 너무 상쾌하다. 역시 내 고향, 내 집이 최고구나!

중국에서 제일 먼저 살기 시작한 이 곳 스자좡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선교사 삶의 고향이요, 집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살 때는 미처 몰랐는데 잠시 떠났다가 돌아온 이곳 스자좡은 내게 너무나 편안하고 익숙한 곳이 되어 있었다. 내가 의당 있어야 할 곳에 내 몸뚱이를 두고, 내 몸뚱이가 있는 곳에 내 마음까지 두고 사는 것! 이것이 행복의 첫째 조건 아니겠는가! 타인이 걸어가는 길을 부러워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부럽다는 것은 지금 내가 가지 않는 길에 대한 호기심어린 동경일 뿐,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에 서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이 걸어가는 저 길 위에 서도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이 길, 혹은 저 길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어느 길에도 있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이 길 위의 행복을 체험하는 것이 우리들 공부의 목적이다. 이 공부는 때로 한참을 기다려야만 우리를 밝혀주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기다림 자체가 공부일 수도 있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묵묵히 선교사로서의 내 길을 간다. 다른 이들이 걷고 있는 길을 부러워하면서도 나는 내 가는 길을 멈추지 않는다. 내 길 위의 행복을 찾아서......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http://cafe.daum.net/frcho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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