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일 세바스티아노 보도위원
☞ '요한 복음 17장은 모든 사제의 공통된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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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다마는 당구 용어다. 흰 공으로 붉은 공의 뒤쪽을 때리는 기술이다. 여기서 ‘뒷다마 깐다’는 말이 나왔다. 우리말로 ‘뒤통수치다’와 비슷한 뜻이다. 이때만 해도 어감이 좋지 않은 비속어였다. 언제부턴가 ‘뒷담화’라는 말로 순화돼 쓰인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칭찬보다는 험담이 주를 이룬다.
뒷담화는 뒷다마보다 듣기 좋지만, 본질은 똑같다. 신앙인의 적이고 고해성사 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준엄히 경고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화들짝 놀라 뒷담화 금지령을 내렸다. 벌써 몇 해 전인데 아직도 이 악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루를 마감하며 눈을 감는다. 오늘도 몇 사람을 입에 올렸다.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겠다. 이 많은 죄악을 어찌 다 씻을까?
뒷담화의 심리는 질시 또는 열등감이다. 강자보다는 약자에게서 나타난다. 나보다 나아 보이는 동료나 상사를 깔아뭉개며 묘한 쾌감을 느낀다. 내가 좀 낫다는 우월감에 젖는다. 사실은 자신의 좌절과 굴욕을 감추려는 서글픈 자위다.
옳고 바르다면 당당히 맞담화로 나설 것이다. 논리와 명분마저 약하니 뒷담화에 기댄다. 그러므로 뒷담화는 곧 패배 선언이다. 권위 앞에 위축되지 않는 사람은 굳이 뒷담화를 하지 않는다.
뒷담화는 종종 외로움의 표현이다. 멀리 있는 사람을 희생시켜 눈앞에 있는 사람과 친밀감을 느껴보려는 시도다. 그러므로 그것은 위로받고 싶다는 가엾은 고백이다.
상처받은 영혼의 부끄러운 낯가림이다. 뒷담화 하는 사람은 흔히 착각한다. 불만스런 현실을 남 탓으로 돌린다. 사실은 그 원인의 상당 부분이 자신에게 있다. 이를 애써 외면하려는 몸부림이 뒷담화다.
뒷담화는 영혼의 원수다. 나를 파괴하고, 남을 해친다. 뒷담화가 솟아나는 그 우물은 맑아 보여도 이미 독물이다. 스스로의 독으로 남을 적신다. 독이 안개처럼 퍼지면서 공동체의 화합과 평화가 무너져 내린다.
좋은 뒷담화는 드물다. “그 어떤 미사여구에 완벽한 논리로 조언을 한다 해도 그 안에 진심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저 난도질이자 뒷담화일 뿐입니다. 더욱이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 우리는 내 이웃의 생명에 대해서만 폭력을 가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독을 쏟아 내거나 험담을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교황의 말씀이 가슴을 친다.
우리는 흔히 정치인의 막말을 탓한다. 어쭙잖은 글로 점잖게 꾸짖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의 막말은 적어도 뒷담화는 아니었다.
격렬하긴 해도 정면으로 퍼붓는 맞담화였다. 수시로 뒷담화에 빠지는 나는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고상한 척하며 훈계할 수 있을까? 막말과 뒷담화는 둘 다 악덕이지만, 굳이 더 나쁜 것을 고르자면 아마도 뒷담화일 것이다.
이제 정치인에게 주었던 조언을 스스로에게 돌리련다. 영국 의회에서는 다른 의원을 지칭할 때 반드시 그 앞에 ‘존경하는’을 붙인다.
그렇다면 너도 그렇게 하라. 누군가를 말해야 할 때 꼭 ‘사랑하는’을 붙여 말하라. 그 말을 붙일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뒷담화의 유혹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될까? 언감생심 성인을 꿈꾸랴. 그저 잠들기 전에 부끄럽지 않고 싶을 뿐이다.
☞ 오늘보다는 내일을
☞ 가난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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