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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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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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3-18 ㅣ No.110808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

 

- 윤경재 요셉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17~24)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아주 먼 길을 단숨에 달려가는 일이 결코 없다고 합니다. 달리다가 가끔씩은 말에서 내려 지금까지 자기가 달려온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면서 사색에 잠긴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말에 올라 타 갈 길을 재촉한다는 인디언들. 그 이유는 앞만 보며 너무 빨리 달려가느라 자신의 영혼이 미처 따라 오지 못했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만큼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자신의 영혼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수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이 이 비유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쓰고 만들었습니다. 심리학자들도 여기서 등장하는 아버지와 두 아들을 대상으로 연구하여 나름의 이론을 정립하였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밖의 세부 사항에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본래 유다인 율법에 장자가 아닌 사람은 재산상속을 요청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장자가 어떻게 처분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카복음12.13절에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구절이 나올 정도입니다. 잔머리 굴리기를 잘하는 작은아들은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집회서33,20절에는 아들과 아내에게, 형제와 친구에게 네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에 대한 권리를 넘겨주지 말고 네 재산을 남에게 넘겨주지 마라. 그렇게 하면 후회하면서 그것들을 간청하게 되리라.”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재산상속을 요청하자 두 아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큰 아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작은아들은 아버지와 큰 형을 떠나 먼 고장으로 도망치듯 달아났습니다. 그가 인디언의 충고를 알았다면 잠시 길을 멈추고 자기 영혼을 불러들였을 것입니다. 그는 오로지 집에서 멀어지는 것만이 자기가 살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혹시 돈을 돌려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해서 그랬습니다. 그의 행동은 영혼의 자리에 돈을 채워 넣는 짓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영을 귀찮고 자신의 길을 훼방하는 방해꾼이라 여기고 자신의 집에 던져버리고 떠난 셈입니다. 그 텅 빈 영의 자리에는 욕심과 무모함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막연함만이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하였습니다.

 

무모함과 막연함은 욕심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가장 허약한 먹잇감입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두 눈을 부라리고 선 유혹자들의 세상에서 이처럼 나약한 먹잇감은 한 입 거리도 안 됩니다. 나만은 다를 것이라 생각하고 세상에 뛰어드는 심리를 막연한 긍정이라고 부릅니다. 은퇴자나 주식투자자들이 제일 처음 고배를 마시는 원인이 바로 나만은 다를 것이다.’라는 심리 때문이라는 것을 작은아들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

 

막연한 긍정 심리는 삶의 낭비를 투자라고 스스로 합리화 합니다. 절제라는 것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폐해가 중독입니다. 알코올 중독, 도박중독, 담배중독 등등 모든 중독의 첫 출발은 막연한 긍정에서 출발합니다.

 

작은아들은 영을 집에다 버리고 나왔기에 가지고 나간 돈을 다 잃자 또 다른 죄까지 지으려 합니다. 배고프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를 포기하고 이방인의 붙이가 되어 부정한 동물과 접촉하는 죄를 짓습니다. 그는 율법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어긴 셈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방인조차도 그를 거절하였습니다. 돼지 치는 열매 꼬투리조차 먹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죄마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야가 좁아질대로 좁아져 다른 돌파구를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매몰되고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에야 이방인과 접촉하고 돼지 치는 게 무슨 죄가 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언급하시는 까닭은 그의 인격이 완전히 무너져 더는 사람이기를 포기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반전이 생겼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니 오히려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만큼은 자신을 내치시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용서를 구하면 최소한 먹을 것은 주시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결단을 내리니 돌아오는 길은 아주 쉬웠습니다. 한 생각을 고쳐먹으니 길이 보였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한창 잘 나가던 위치에서 갑작스런 몰락을 체험했습니다. 부인과 아들을 잃고 병까지 얻었으며, 전 재산을 잃어 파산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런 밑바닥의 체험을 녹여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죽음과 가까울 정도로 고통의 심연 속에서 그는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탕자와 동일시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네덜란드 출신 헨리 나우엔 신부가 지은 책이 절창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잘 나가던 교수이며 심리학 박사였습니다. 그는 렘브란트의 이 그림을 보고 회심하여 가톨릭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림에서 아버지의 양손을 감동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양손은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왼손은 거칠고 투박하며 남성적 힘이 느껴집니다. 다시는 너를 놓치지 않겠다는 표현이 드러납니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 세련되고, 부드럽고, 대단히 다정합니다. 우아한 분위기가 납니다. 아들의 어깨에 사뿐히 올려놓았다고 해야 할까요?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어머니의 손입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심리적 욕구가 채워져야 건강한 자아가 생성된다고 합니다. 사랑 받고 존중 받으며 인정받는 욕구인 반영 욕구가 하나입니다. 또 보호 받으며 안전을 느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욕구인 이상화 욕구가 두 번째입니다.

 

너의 존재는 축복이며 선물이다. 내게 큰 기쁨이다. 너는 존귀하며 사랑스러운 피조물이다!”라는 확신을 주는 이가 있을 때 아이는 자신의 마음 안에 자존감과 꿈을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너를 지킬 것이다. 너는 안전하다. 나는 너를 위해 버티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존재가 있을 때 아이는 크고 높은 이상을 지닌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다섯 명이 등장합니다. 두 명의 방관자와 세 명의 가족입니다. 가장 크고 뚜렷하며 당당한 자세를 지닌 큰 아들, 그는 붉은 망토를 걸친 채 사태를 거리를 두고 바라봅니다. 허리는 움츠러들고 두 눈은 초점을 잃어 사시 같은 느낌을 주는 아버지, 그러나 그의 양손은 빛의 조명을 받아 관객의 시선을 모아줍니다. 작은아들은 머리는 빡빡 깎아 죄수와 같고 옷은 홑겹에 잠옷처럼 남루하고 헤졌습니다. 무릎을 꿇은 발에는 낡은 슬리퍼마저 벗겨졌습니다. 두상은 핏줄이 선명하여 간난아이처럼 보입니다. 새로 탄생하였다는 상징이 나타납니다. 기둥 옆에 숨듯 서있는 여자는 세상을 떠난 셋째 부인을 그렸을 것이라 합니다. 거들먹거리며 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은 죄인인 세리를 비유했다고 합니다. 시기와 질투, 단죄를 바라는 심정을 그렸습니다. 왼쪽 상단 구석에는 죽은 첫째 부인의 혼을 흐릿하게 그려놓아 돌아온 자기 아들을 지켜보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을 찾지 않고 잃었다가 방황하던 작은아들을 늙어 지친 아버지는 양손을 벌려 따뜻하고 힘차게 맞아줍니다. 그 양손의 온기를 통해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전달되고 이제부터 온전히 보존될 것입니다. 말에서 내려 달려온 길을 되돌이켜 보았을 때 집에 버려두고 온 줄 알았던 영혼이 어느새 그를 따라잡은 것이었습니다.  

 

 

 

  

 
▲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9, Oil on canvas, 262 x 206 cm, The Hermitage, St. Petersbur
 

ⓒ2005 Rembrandt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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