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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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렬신부(합당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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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9-21 ㅣ No.114871

 

"합당한 예배"

+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도 많은

보물이 묻혀있지만,

오늘은 제2독서의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

여러분들이 2독서 때

들었던 말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합당한 예배!

오늘 여러분은 합당한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물론 친교와 나눔도 중요하지만,

성당에 온 제일 중요한 이유는

예배입니다.

하느님께 예배를 빠트리고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구약에 흐르는 하느님이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합당한 예배의 조건이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거룩한

산 제물로 여러분의 몸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수가 없기에

유대인들은 자기 대신에 양이나

비둘기, 염소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이 ‘거룩한 산 제물’

이라는 것이 피를 흘리는 짐승을

바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느님이 받아주시는 거룩하고

합당한 예배가 되려는

세 가지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로 하느님은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제물’만 받으셨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은 비둘기,

죽은 염소는 받지 않았습니다.

피가 끓고 있는 살아있는

 제물을 제사장들은

제단 위에 봉헌했습니다.

 신약적인 의미로 살아있는

제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미사도 보면 죽은 미사가 있고

살아있는 미사가 있습니다.

기도도 보면 죽은 기도가 있고

살아 움직이는 기도가 있습니다.

봉헌할 때도 죽은 봉헌이 있고

살아 있는 봉헌이 있습니다.

봉사할 때도 죽은 봉사가 있고

살아 움직이는 봉사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교회에 순명할 때도

죽은 순명이 있고 반대로

살아 있는 순명이 있습니다.

희생을 바칠 때도

죽은 희생이 있고 살아 있는

희생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죽은 미사가 뭐겠습니까?

미사시간 내내 성당에 앉아서

몸은 제대를 향하고 있지만,

머릿속은 딴 데 돌아다니는 게

바로 죽은 미사입니다.

의학용어로 혼수상태다,

다른 말로 뇌사에 빠졌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심장은 뛰고 있지만

머리는 죽은 겁니다.

몸뚱이는 앉아 있지만

미사 시간 내내 하느님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온통

세상 걱정합니다.

그런 죽은 미사는 하루에

열 번을 바쳐도 하느님께

안 받으신다 그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은 미사와

산 미사의 차이입니다.

 죽은 기도가 있고

산 기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루에 묵주 신공을 20단,

40단을 드려도

 죽은 묵주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손은 자동으로

묵주 알을 굴리지만 머릿속은

온 동네 다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하다가 텔레비전도 보고

달력의 날짜 보면서 ‘보자,

계돈 낼 날짜 며칠이냐?’

이런 죽은 묵주기도는

하루에 백단을 바쳐도

절대로 하늘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죽은 봉헌이 있고

산 봉헌이 있다고 했습니다.

죽은 봉헌은 아무런 정성이

 들어가 있지 않은 봉헌일 겁니다.

살아있는 봉헌은 마음과 뜻과

 내 모든 것을 바쳐서 시간의 봉헌,

물질의 봉헌, 그리고 봉사의

봉헌을 하는 것입니다.

 죽은 순명이 있고

살아있는 순명이 분명히

있다고 그랬습니다.

죽은 순명은 겉으로는

순명하는 척하나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습니다.

마지못해 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순명은

나에게 주어진 이 과업이

무슨 뜻인지 내 머리로는

헤아리고 깨달을수 없지만,

로마서 8장 28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좋고 나쁜 일이

상호작용을 하여

선한 결과를 맺게

해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한마디로 야훼이레!

주님은 나의 길 선하게

예비하실 거라는 것을 믿고

알아들을 수 없는

명령이지만 따릅니다.

아브라함이 가라고 할 때 갔고,

자식을 죽이라 했을 때 정말

죽이려고 했던 것을 어찌

이성으로 따질 수 있었겠습니까?

살아있는 순명을 기적을 낳습니다.

그러나 죽어있는 순명은

상처만 계속 남습니다.

 두 번째 거룩한 산제물이

되기 위한 조건은 ‘제물의 흠집이

 나있으면 안 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염소 뿔에

금이 가 있거나, 비둘기 날개에

깃이 빠져있으면

퇴짜를 놓았습니다.

바치는 제물에 흠집이 나있으면

구약의 제사장들은 절대 제단 앞에

 제물을 바칠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흠집이 나있다’고 하는 말은 뭐냐?

첫 번째, 죄를 뜻합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으면

우리 영혼에 흠집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그 흠집을 깨끗이

지우고 미사를 드리게 하게 위해

고백소에서 기다립니다.

 흠집이 나있다고 하는

두 번째 뜻은 정성과 감사,

사랑이 빠져있는

 봉헌을 뜻입니다.

예전에 있던 본당에

가난하게 사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토요일 오후가 되면

가지고 있는 돈 중에서 제일

깨끗한 것을 골라서 정성스럽게

 빳빳하게 다림질을 합니다.

그리고 하얀 봉투에 넣어

정말 가난한 과부의 헌금처럼

봉헌합니다.

그 할머니는 돈을 다리는 것은

아니라 일주일 동안 구겨졌던

마음을 다린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돈을

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 미움과

자식들에 대한 섭섭함,

같은 신자들에게 받은 상처,

이런 것을 깨끗하게 다려서

흠집이 없는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서 할머니는

헌금을 다렸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주일 헌금,

 집에서 제일 깨끗한 돈으로

 준비해 오시는 분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거드름피면서

내는 돈은 받지 않고 정말

가난한 과부의 돈을 받으셨죠.

그리고 뭐라고 했습니까? ‘

이 과부는 자기의

 전 재산을 바쳤다’

아마 그 과부는 저녁에 먹을

양식을 살 돈까지 냈을 겁니다.

그러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과부가 저녁을 굶게 했겠습니까?

 정성과 감사와 사랑이 빠져 있는

봉헌은 형식입니다.

미사의 시작은 엄밀히 따지면

미사오기 전 날 복음,

독서 미리 읽고 묵상하고

주님께 봉헌할 헌금을 정성

과 사랑을 담아서 미리

잘 챙기는 바로 그 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세 번째로 거룩한 제물의

 조건은 ‘제물을 들고 직접

제단 앞에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입원해 있거나 병중에 있어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는 사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취미생활, 세상 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제단 앞에

나오지 않는다면,

비록 그 사람이 성당 가는

부인에게 ‘나 대신에 가서

내 헌금 좀 내줘.’ 해서그 부인이

남편 대신에 헌금을 냈다

해도 ‘안 받는다.’ 그겁니다.

본인 자신이 제주가

되어야 합니다.

제주가 뭔지 아시죠?

본인 자신이 제물을 들고 와야지,

 택배를 시켜서 부치는 것

하느님이 안 받는다는 뜻입니다.

부인에게 배달시킨 봉헌금을

하느님 안 받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칼같이 받습니다.

돈 주는데 왜 안 받습니까?

나는 받지만 하느님은

 안 받는다 그 뜻입니다.

 아버지 생신에 아들놈이

가기가 싫어서 마누라한테

 ‘가서 아버지 생일상 차려드리고

어디 갔느냐 물으면

해외출장 갔다고 해’ 하고

그날 골프 치러 나갑니다.

이런 자식을 우리는

후레자식이라고 그럽니다.

당연히 주일 주님 앞에 자식 된

도리를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세상 재미에 빠져서

그런 후레자식들 많습니다.

제물은 본인이 재물을

직접 들고 제단 앞에 와서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하느님은 그런 제물을 받지

 누가 대신해 주는

제물을 받지 않는다.

 다시 정리 드립니다.

구약과 신약에 흐르는

 하느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

첫째, ‘살아있는

제물을 바쳐야 된다.’

 둘째, ‘바치는 제물에

흠집이 나있으면 안 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제물을 들고 직접 성전 앞에

본인 자신이 나와서

직접 봉헌해야 된다.’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빠지면 그 예배는 거룩한

예배가 아닙니다.

 합당한 예배가 되기 위하여

이 세 가지 중

나는 어느 점이 부족한가?

나는 미사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봉헌할 때마다,

봉사할 때마다 살아있는

 제물을 바쳤는가?

죽은 제물을 바친 적은 없었던가?

두 번째로 늘 죄 속에 살면서도,

나중에는 죄 지은 것조차

잊어버리는 죄의 불감증에 빠져서

흠집이 나있는 채로 제단 앞에

나오려고 한 적은 없었던가?

정성과 감사과 사랑이 빠져있는

헌금을 한 적은 없었던가?

교무금을 바친 적은 없었던가?

마지막으로 제물을 들고

직접 성전 앞에 나와야

된다는 것을 잊어버린 적은

없었는가?

 내 두 다리가 성당 문턱을

넘어서기만 해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병들고 늙으면

성당에 오고 싶어도 못 옵니다.

그럴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단 한 번이라도 더 성전 앞에

나오려고 기를 쓰고,

한 번이라도 더 주님의

 성체를 영하려고 애를

쓰셔야 될 것입니다.

워낙에 마귀가 들끓는

세상이기에 주일 한 번 모신

성체로는 일주일 못 버팁니다.

고혈압 환자들, 아침에 눈뜨면

혈압 높아지지 않게

약 챙겨 먹지 않습니까?

 오늘 미사 때 사제도

여러분과 함께 제주가 되어

예배를 드려야 될 것이요,

여러분들 각자도 사제가 되어

이 미사에 거룩한 제물로

봉헌할 수 있도록

기도드립시다. 아멘

 2017년 연중 제22주일(09/03)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서운동성당 -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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