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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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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17 -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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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10-17 ㅣ No.115493




2017
10 17 () 가해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Memorial of Saint Ignatius of Antioch, Bishop and Martyr
Tuesday of the Twenty-eighth Week in Ordinary Time

로마서 1,16-25 / 갈라티아서 5,1-6
루카복음 11,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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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16-25

형제 여러분,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5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Reading 1


Rom 1:16-25

Brothers and sisters: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It is the power of God for the salvation of everyone who believes: for Jew first, and then Greek.
For in it is revealed the righteousness of Go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The one who is righteous by faith will live."

The wrath of God is indeed being revealed from heaven against every impiety and wickedness of those who suppress the truth by their wickedness.
For what can be known about God is evident to them, because God made it evident to them.
Eve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his invisible attributes of eternal power and divinity have been able to be understood and perceived in what he has made.
As a result, they have no excuse; for although they knew God they did not accord him glory as God or give him thanks.
Instead, they became vain in their reasoning, and their senseless minds were darkened.
While claiming to be wise, they became fools and exchanged the glory of the immortal God for the likeness of an image of mortal man or of birds or of four-legged animals or of snakes.

Therefore, God handed them over to impurity through the lusts of their hearts for the mutual degradation of their bodies.
They exchanged the truth of God for a lie and revered and worshiped the creature rather than the creator, who is blessed forever.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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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5,1-6

형제 여러분,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2 , 나 바오로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3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다시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5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Reading 1


GAL 5:1-6

Brothers and sisters:
For freedom Christ set us free; so stand firm and do not submit again to the yoke of slavery.

It is I, Paul, who am telling you that if you have yourselves circumcised, Christ will be of no benefit to you.
Once again I declare to every man who has himself circumcised that he is bound to observe the entire law.
You are separated from Christ, you who are trying to be justified by law; you have fallen from grace.
For through the Spirit, by faith, we await the hope of righteousness.
For in Christ Jesus, neither circumcision nor uncircumcision counts for anything, but only faith working through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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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11,37-41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Gospel


Lk 11:37-41

After Jesus had spoken, a Pharisee invited him to dine at his home.
He entered and reclined at table to eat.
The Pharisee was amazed to see that he did not observe the prescribed washing before the meal.
The Lord said to him, "Oh you Pharisees!
Although you cleanse the outside of the cup and the dish, inside you are filled with plunder and evil.
You fools!
Did not the maker of the outside also make the inside?
But as to what is within, give alms, and behold, everything will be clean fo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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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10 17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우리 인간은 수많은 법률과 규정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는 곧 사람은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려면 서로 간에 지켜야 할 규범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규범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을 규정한 것이지 어떤 권력이나 권한을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시대의 율법이나 오늘날의 종교적 법률들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까지 규정합니다. 하느님께도 사랑과 예의를 올바르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법이 우리 인간들이 숨조차 쉴 수 없도록 세세하고 장황하게 규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을 탐하는 이들의 욕심일 따름입니다.
“가장 완벽한 법은 가장 완벽한 불의이다.(Summum ius, summa iniuria)라는 로마의 법률 격언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 중심에 하느님과 인간이 빠지고, 법 자체만을 위한 법률은 오히려 불의가 되고 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자신의 온 마음을 담아서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율법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지침입니다. 법률은 인간의 외면적인 관계들을 정해 주지만, 그 진짜 본질은 인간의 마음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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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0 11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
성 요한 23세 교황 기념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그리스도 신앙이 할례를 받은 유다인의 율법 신앙과 분명히 다른 점입니다. 진심이 없는 형식적인 의무감이나 관습과 전통에 집착하여 본디의 복음 정신을 잃어버리는 완고함은, 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덫입니다.
교회는 이런 위선적 신앙에 대하여 교회 헌장 14항에서 다음과 같이 훈계합니다. “교회에 합체되더라도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교회의 품 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평생을 성당에 다녔어도 주일 미사 참례나 판공성사의 의무를 채우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에게는, 섬뜩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해 놓고, 그분이 유다인의 관습대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모습을 불편하게 쳐다본 바리사이를 향해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라고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치 주일에 미사 참례로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거나, 교회에서는 헌신적이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속되기 짝이 없는 표리부동한 삶을 사는 나 자신을 향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한 성직자, 수도자들 역시 위선의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삶의 이상이 높을수록, 현실의 자아와의 괴리감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내 못난 모습을 감추려고 더 화려하게 나를 포장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자비롭고 거룩한 척해야 하는 이중적인 삶의 유혹은, 평신도들보다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더 큰 것이 사실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의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며,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것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임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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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 13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로마서의 첫 부분은 로마서의 핵심을 요약하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교회 역사 안에서 열띤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 첫째 주제는 ‘믿음을 통한 의화’입니다.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던 루터는 로마 1,17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가 답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간을 단죄하시는 의로움이 아니라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의로움, 인간을 구원하시는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의 핵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구원을 위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불의한 인간을 의롭게 하신다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그 실천의 관계에서 좀 더 생각할 부분은 있지만, 근본적으로 구원이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통찰입니다. 내가 열심히 무엇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어 내겠다는 생각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니지요.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점을 지적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의 공통된 믿음을 확고히 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둘째 주제는 피조물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우주의 질서와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성경의 인격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그분께로 인도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워낙 비중이 있는 본문이라 짧게 요약하거나 묵상하기는 오히려 어렵습니다. 앞으로 로마서를 묵상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깊게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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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0 14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성 갈리스토 1세 교황 순교자 기념일)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시어 자유로운 존재로 변화시키셨다고 강조합니다. 사도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깊은 체험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신원을 올바로 깨닫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너무나 자주 여러 가지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어떤’ 자유에 가장 큰 의미를 두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결론을 체득할 때까지 우리는 듣고 배우며 체험하는 다양한 자유의 경험을 꾸준히 관찰하고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이러한 과정의 결정적인 인도자인 것은, 인간의 자유가 그 한계를 하나씩 넘어설 때마다 더욱더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자유와 사랑으로 나아가고 개방되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의 한 현대 가톨릭 철학의 거장은 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자유롭고 사랑으로 가득 찬 신의 자유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통해서 스스로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인간의 자유는 해방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자유의 해방자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잘 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절대적 자유의 조건 속에 놓이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신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데 투신함으로써, 또한 이 놀라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에게 도움을 호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인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바티스타 몬딘, 『자유인』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권위 속에서 자유로운 존재의 모습을 잃고 있는 바리사이들에게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해방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또한 위선이나 가식의 껍질을 벗는 사랑의 몸짓이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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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10 15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시선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느 바리사이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바리사이는 외적인 것을 통하여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는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적인 것을 통하여 판단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마음속에 탐욕과 사악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그들을 위선적이라고 나무라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시선은 외적인 것에만 머무르기 때문에 형식적인 율법 준수가 중요합니다. 그 반면, 예수님의 시선은 내적인 데에 있기 때문에 내적인 변화에 주목하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시면서도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포하시고, 과부의 보잘것없는 헌금 속에 있는 ‘헌신’을 두고 칭찬하십니다.
외적인 시선을 갖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저 주어진 것,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판단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시선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것,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시선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적인 시선은 하느님의 시선이며, 다른 피조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인간에게는 허락된 시선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창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손수 하신 일을 경탄합니다. 낮이 낮에게 거는 말과 밤이 밤에게 전하는 지식이 온 땅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압니다(시편 1918,2-5 참조).
인간이 내적인 시선을 간직하려면 하느님과 함께 호흡해야 합니다. 겉모습을 중시하는 세상으로 흐르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내적인 시선으로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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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10 16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녀 헤드비제스 수도자 기념일)
(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동정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겉으로는 의인처럼 행세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사악함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의 위선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정작 자신들은 말한 바를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운 채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내면의 추한 모습을 가리고자 겉만 화려하게 꾸민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기어(綺語)의 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기어’란 ‘비단 같은 말, 번드레하게 꾸며 낸 말, 교묘하게 꾸며서 겉과 속이 다른 말’이라는 뜻입니다. 진정성이 없는 말을 많이 해, 이 죄를 가장 많이 범하는 사람이 바로 종교인들, 그중에 지도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인들이 이런 ‘기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 가는 곳이 있답니다. 그곳은 한시도 고통이 멈추지 않는, 혀가 뿌리째 빠지는 형벌을 받는 곳입니다. 비록 불교에서 말하는 이야기이지만 사제로 살아가는 저의 등이 서늘해지는 느낌입니다.
말로써 신앙을 고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으로 자신의 믿음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일 것입니다. 사제로 살면서 신자들에게 강론이나 훈화 등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 한 말을 제 자신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신자들에게 말은 그럴듯하게 하여 무거운 짐을 지워 놓고 정작 저 자신은 잘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저 자신의 모습을 냉정히 들여다보라는 말씀으로 아프게 다가옵니다. 사제인 저에게 위선과 이중적인 삶을 극복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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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011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
성 요한 23세 교황 기념일)


맥스 비어봄(Max Beerbohm)이 쓴 『행복한 위선자』라는 짧은 소설이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조지 헬(Hell: 지옥)은 이름자 그대로 부도덕하고 탐욕스럽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가 어느 날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제니 미어’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납니다. 그러나 방탕하고 흉측한 그의 얼굴로는 그녀의 마음을 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에 빠져 그녀를 포기할 수 없게 되자 밀랍으로 성자(聖者)의 마스크를 맞춥니다. 이 마스크는 매우 정교해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의 본디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마스크를 만들어 준 사람과 마스크 가게에서 나오다 마주친 옛 연인 ‘갬보기’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조지 헬은 이름도 조지 헤븐(Heaven: 천국)으로 바꾸고 성자의 마스크를 쓰고 사랑하는 제니 미어에게 다가가 사랑을 고백하여 혼인을 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복한 혼인 생활 뒤에는 자신의 흉측한 내면, 자신의 과거 모습이 탄로 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성자처럼 자신의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착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가짜 얼굴과 마주하는 자신의 사랑하는 제인 미어에게 미안함과 무거운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정체를 아는 옛 연인 갬보기가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들의 혼인 생활이 행복할수록 질투심에 가득 찬 갬보기는 그들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행복하게 사는 제인 미어를 만나 남편의 정체를 폭로하며 그녀가 보는 데서 그의 마스크를 벗기고 맙니다. 그런데 마스크가 벗겨진 순간 옛날 흉측했던 조지 헬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고 오히려 그의 얼굴은 성자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가면 뒤에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성자의 얼굴을 닮으려고 애써 노력하여 그의 얼굴이 바뀐 것입니다. 성자의 얼굴이 된 그는 이제 자신의 진짜 얼굴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진실한 사랑의 입맞춤을 하며 소설이 끝납니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누구나 이런 가면을 쓰고 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에게 보이는 가면을 나의 진짜 얼굴로 착각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겉과 속이 다른 나’를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약함과 죄스러움을 주님께 고백하고 꾸준히 선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월과 함께 자신이 쓰고 사는 성자의 얼굴 마스크는 나의 진짜 얼굴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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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 12)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자유는 진리이신 분만이 누리실 수 있는 특권입니다. 진리이신 분은 곧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주님만이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자유로우신 분이 죄와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풀어 주시려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유로우신 주님을 닮아서 주님의 일을 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삶을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안에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 속에 머무르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집니다. 사랑으로 온전히 자유롭게 행동하며,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삶을 삽니다. 이중적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모순에 빠져 자유롭지 못합니다. 겉은 깨끗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실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 또한 이중적 삶을 사는 바리사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더라도, 자유로우신 분께 속한 사람답게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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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 13)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하찮은 일로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드신다며 놀라워한 것입니다. ‘손 씻는 행동’이 손님보다도 중요한 일일까요? 아무튼 당시 바리사이들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교육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판단합니다. 자신의 수준을 쉽게 넘어서지 못합니다. 시야가 넓은 사람은 ‘넓게’ 보지만, 눈높이가 낮은 사람은 ‘낮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람을 괴롭힙니다. 손 씻는 행동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준이라면 한심한 일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핵심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안과 밖을 다 만드셨는데 어찌 겉만 보고 판단하느냐는 꾸중입니다. ‘마음을 열면’ 많은 것이 보입니다. 자신의 수준을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을 여는 첫 행동은 ‘이득과 손실’을 따지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려는 노력입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입니다. 그런 사람은 분명 ‘주님의 힘’을 만납니다. ‘좋게 보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삶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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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14)
(
성 갈리스토 1세 교황 순교자 기념일)


식사 전에 손 씻는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할는지요?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문제 삼습니다. 율법을 거스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감사에 있었습니다. 귀한 음식을 주셨으니까 감사의 표시로 손을 씻게 했습니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근본은 외면한 채 손 씻는 행위에만 매달린다면 껍데기를 붙잡는 것과 같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익지 않은 벼는 고개를 숙이고 싶어도 숙일 수가 없습니다. 알맹이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맹이가 차면 낟알은 자동적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빈곤하기에 겉모습에 매달립니다. 내적으로 허전하기에 법을 따지고 듭니다. 감사하고 만족하는 삶이라면 너그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손 씻는 것은 율법의 핵심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씻은 손으로 먹는다고 영혼까지 정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씻지 않으면 아무리 손을 씻고 또 씻어도 그저 형식일 뿐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겉과 속을 함께 다독거리라는 말씀입니다. 속은 변변치 못하면서 겉치레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언제라도 중요한 것은 겉이 아니라 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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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16)
(
성녀 헤드비제스 수도자 기념일)
(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동정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어떤 바리사이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면서 식사 전에 손 씻는 유다인의 관례를 생략하셨습니다. 바리사이는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놀랍니다.
예수님께서 그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겉치레를 질책하신 것입니다.
그날의 식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쳇말로 예수님께서 초를 쳐도 단단히 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 씻는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다는 말인가? 정작 중요한 것은 마음을 씻는 일 아니냐?’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은 엄격하게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왜 지켜야 하는지 그 목적은 소홀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점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 각자는 어떠한지 가만히 돌아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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