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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구할 것인가?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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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11-20 ㅣ No.116305



 

무엇을 구할 것인가? - 윤경재 요셉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35-43)

 

 

 

복음서를 연관시켜 읽어보면 동일한 사건을 언급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내용들을 통합해서 한꺼번에 읽어보면 뜻하지 않게 소중한 정보를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복음 내용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수난 예고를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오르시는 도중에 예리코를 지나가시다가 어느 눈먼 이를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이 사람을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라고 그의 실명을 구체적으로 적었습니다.

 

성경에서 주인공을 익명으로 언급할 때는 그 주인공에게 성경을 읽는 자신을 대입해보면 그 뜻이 감동적이고 선명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살아있는 책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 됩니다. 이와 달리 주인공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될 때에는 저자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자는 그 숨어 있는 의도를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르코 저자가 바르티매오라고 그의 이름을 거론한 이유는 첫째 길가에서 구걸하는 눈먼 거지라도 한 사람으로서 인격이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바르라는 단어는 셈어로 아들이라는 의미이며, ‘티매오존경, 명예라는 뜻이 담겼습니다. 그러므로 바르티매오는 명예의 아들’, ‘존경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눈먼 거지였던 그의 이름엔 실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자가 되기를 바랐던 부모의 염원이 담긴 것입니다.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이 장면에서 강조되는 점은 눈먼 소경이었던 그가 예수님의 자비를 입고 두 눈이 열린 다음, 주님을 따랐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 치유와 은사를 받고 주님을 따랐다고 칭찬을 받는 경우가 생각보다 드믑니다. 대부분 자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고 적혀 있습니다. 심지어는 감사할 줄도 몰랐다고 책망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두 눈이 열리자 자신의 겉옷을 벗어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즉 결연히 옛 삶에서 벗어나 새 삶을 선택한 자로 존경 받는 사람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바르티매오가 인간적 명예를 구하였을 때에는 눈먼 채로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처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으나, 올바른 방향을 찾아 주님께 자비를 구하였을 때 그가 비로소 두 눈이 열리는 은총과 함께 참된 명예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루카저자는 이 대목 앞에 따름과 보상이라는 주제로 예수님 말씀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를 예로 들은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디서 어떤 명예와 존경을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제 삶을 되돌아보면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하였을 때가 더 많았으며 그때마다 결과가 좋지 못하였다고 후회하게 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적 이기심과 명예욕과 욕망이 기준이 되었던 적이 더 많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현명해져야 하는데 욕심만 늘어가는 것 같아 더욱 가슴을 치게 됩니다. 뒤돌아보면 주님을 따랐을 때 처음엔 손해를 보는 듯했지만, 갈수록 마음이 여유로와 지고 뿌듯했던 기억이 남았습니다. 맹자가 말했던 호연지기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주님을 향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보게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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