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 확실한 믿음으로 그분 사랑과 평화를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인쇄

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8-03-23 ㅣ No.11919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한 말이다.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였다고,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라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한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을 것이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요한 10,31-36 참조)’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철저한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삶에서 따뜻한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종교적 율법주의에 빠진 이라 할 게다. 이런 이들은 마음마저도 차가울 게다. 유다인들은 돌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그분을 모르기에. 주님을 섬긴다고 수없이 말했지만, 사실은 섬긴 게 아닌것이었다. 메시아의 출현을 노래했지만, 정작 오시니까 거짓 예언자란다. 억지 논리로 만든 메시아를 고집하고 있었던 게다. 그렇지만 엄격히 말한다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모르기에 돌을 던진 게 아닐 게다. 알려고 하지 않았기에 돌을 던졌으리라. 그들의 무지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초래하게 했다. 종교 때문에 살인을 기획했다면 그건 분명 광신이다. 미친 믿음이다.

 

우리 삶에서도 이런 요소가 참 많다. 남의 종교를 비난하지 말자. 타인의 종교에도 지킬 예의는 있다. 종교를 떠나 해석하여도 다른 이의 문화요 삶이기에. 따라서 그것을 무시하려 드는 것은 참 신앙인 모습이 아니다. 유럽 종교가 얼마나 우수한 문화를 말살시켰는지 역사는 잘 알게다. 타 종교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꼈다면 이제는 벗자. 그렇게 하지 못하면 예수님께 돌을 던지는 유다인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사실 모르기에 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했다. 그들의 오만과 독선이기에 어쩜 범죄행위나 다름없다. 그건 미친 광적인 사이비 믿음이다. 사랑이 없다면 분명 사이비일 게다. 내 종교가 아니면 무조건 달리 보는 자세를 바꾸자. 자신 것만 앞세우지 말자. 제 것으로만 홀로서기는 우리도 예수님께 돌을 던지는 저 유다인들의 행위와 결코 다르지 않기에.

 

성주간이 어느덧 코앞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집어 던지려 했다. 그들 안에 신앙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의 파괴적 행동에서 율법주의에 빠진 종교적 모순을 본다. 종교는 사랑 실천과 평화를 위한 것이기에, 그릇된 편견과 고집으로 꽉 찬다면 그것처럼 무서운 게 없다. 폭력으로 자신들의 신념과 종교를 지키려는 것은 진정한 자세가 아니며, 오히려 커다란 재앙만이 되리라.

 

신앙은 우리 곁에 존재하시는 분을 알아보고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를 당신 삶으로 초대하시는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신앙은 이념이나 특출한 행동이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그분과 인격적으로 만날 때, 행복을 느끼고 작은이들과 늘 함께하시는 주님께 기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게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하지만 예수님도 단호하고 당당히 맞섰다. 조금도 망설이거나 주저함도 없었다. 우리도 이처럼 믿는 대한 확신을 가진다면, 우리도 저런 용기가 솟을 게다. 그렇다면 혹여 누군가가 돌을 던지더라도 감히 그 어떤 흔들림도 없으리라.

 

구원의 진리는 예수님 믿음에 근거한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는 우리이다. 예수님에 관한 그릇된 편견을 가진 이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자. 내 신념이나 주관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다른 이의 생각이나 주장을 존중하는 자세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인간의 주장과 판단은 때로는 한계를 지닌다. 이를 인정하는 순간 예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우리 신앙인은 온유와 겸손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자.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분 사랑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게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832 0

추천 반대(0) 신고

믿음,사랑,평화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