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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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눈먼자 (요한9: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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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6-24 ㅣ No.121398

 

 

 

 

공동번역성서

 

참으로 눈먼자

 

(요한9:8~41)

8 그의 이웃들과 그가 전에 거지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은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9 어떤 이들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을 닮기는 했지만 그 사람은 아니라고도 하였다. 그 때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10 사람들이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11 그는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시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기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띄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2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었으나 그는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13 사람들은 소경이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이번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또 그에게 눈을 뜨게 된 경위를 물었다. 그는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발라 주신 뒤에 얼굴을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는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는 사람도 있었고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을 보일 수 있겠소?' 하고 맞서는 사람도 있어서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17 그들이 눈멀었던 사람에게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니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다시 묻자 그는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8 유다인들은 그 사람이 본래는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마침내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19 '이 사람이 틀림없이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물었다. 20 그의 부모는 ', 틀림없이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저희 아들입니다. 21 그러나 그가 어떻게 지금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눈을 뜨게 하여 주었는지는 모릅니다.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제 일은 제가 대답하겠지요' 하였다. 22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23 그의 부모가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24 유다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 놓고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 하고 말하였다. 25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못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26 '그러면 그 사람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했소?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했단 말이오?' 하고 그들이 다시 묻자 27 그는 '그 이야기를 벌써 해드렸는데 그 때에는 듣지도 않더니 왜 다시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28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29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그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30 그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분명히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셨는데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도 모른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 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32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찌기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33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34 유다인들은 이 말을 듣고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 하며 그를 회당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8 '주님 믿습니다' 하며 그는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 39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41 예수께서는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회개, 새로운 창조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우리는 7장과 8장을 통해서 예수님의 객관적 진리 선포에 사람들이 전혀 반응을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9장은 그러한 마른 뼈와 같은 죄인들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게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러한 내용들을 훑으면서 구원은 인간 측에서의 열심과 자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열심과 하느님의 주권에서 기인한 것임을 확실하게 배웠습니다. 그렇게 이 요한복음 9장은 단순히 예수님의 질병치유나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십자가 복음이 그대로 용해되어져 있는 상징적 사건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역시본문을 통해 구원의 시작과 끝, 즉 구원의 서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구원의 즉각적이며 점진적인 다소 이율배반적인 양면도 함께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35절과 36절을 보겠습니다. (요한9:35-36) 35 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하고 대답하자

 

날 때부터 눈이 멀어있던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죄인의 대표로 선 그가 부르심(소명)을 입은 것입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부르심(소명)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부르심을 입은 상태를 구원이 완성된 구원받은 상태로 봅니다. 맞습니까? 어떤 면에선 그래요 하느님의 부르심은 실수나 실패 없이 그 부르신 자를 하느님 나라에 반드시 세우고야 마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 있어서 시작은 곧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그 상태가 구원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원의 완성처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구원의 즉각성 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보시는 바와 같이 이미 눈을 뜬 그 소경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주어서 감사는 해야겠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 자신을 위해 일을 하고 계실 때에는 그가 여전히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36절을 보시면 눈 뜬 소경이 내가 믿고자 합니다.’하고 말을 합니다. ‘믿습니다.’도 아니고 믿겠습니다.’도 아니고 믿고 싶습니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눈을 떠서 이제 그 눈을 뜨게 해 준 대상을 믿고 싶은데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매니안 주의 를 지지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인간의 선택으로 보기 때문에 주장이 옳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순 제 4 주일-자신감의 두 종류 / 김찬선 신부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많이 다르지요? 지금 눈을뜬 소경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보고 그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에페2:1)상태에서, 우리를 살려주신 분이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통해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눈을 뜬 소경이 내가 그를 믿고 싶은데 그가 누구입니까?’라 고 물은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에야, 다른 말로 눈을 뜬 후에야 예수에 대해 배우고, 인식하고, 이해하고, 깨닫 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결국 마지막에 내가 믿습니다.’라는 온전한 신앙고백을 함으로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는 것 입니다. 그러한 성숙되어지는 과정을 신학은 구원의 점진성 이라고 부릅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구원을 즉각적이며 점진적이라고 하는지 아시겠지요?

 

이렇게 구원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천년 만년 이 땅에 살면서 계속해서 가르치시지 왜 죽으십니까? 7장과 8장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열심히 십자가 복음에 대해 설명을 하시는데 듣는 이들이 하나도 못 알아듣지 않았습니까? 구원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소경을 찾아오셔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주님이 신랑이 되어서 신부를 아무리 끌고 가려해도 신부가 말을 안 들어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신부 속으로 들어가 그 신부와 한 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에레31:31-33) 어떻게요? 자신 이 죄인들과 이겨지셔서 물에 빠져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신부인 우리 성도 안에 거처를 잡고 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소경의 눈이 빛을 보게 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7장과 8장은 십자가 사건 이전인 구약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9장은 십자가와 그 십자가로 인해 눈을 뜨게 되는 교회의 모습인 신약, 즉 새 계약의 성취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 한 힌트가 나옵니다

 (요한9:35) 35 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눈을 뜬 그 소경을 만나셔서 당신을 인자라 칭하시며 네가 人子를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거기서 쓰인 人子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인자는 구약의 어딘가에서 인용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단 어는 다니엘 서 7장의 에나쉬 바르’‘인자를 받는 말이지요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그분을 받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단어를 쓰실 때 항상 십자가를 예시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인자의 들림 받음이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합니다. (3:14, 8:28, 12:32,34)

(요한3:14)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리고 공관복음은 주님의 죽으심을 인자의 넘겨짐, 혹은 버려짐으로 표현을 합니다.(마르8:31, 9:9,12,31, 10:33,45, 14:21)

(마르8:31) 31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이렇게 인자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하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왕으로 등극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昇歸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죽어야 할 자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르10:45) 45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이렇게 인자라는 단어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기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눈뜬 그 소경에게 너에게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사건인지 아느냐?’는 질문을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그 다니엘서 7장의 人子에 대해 잘 알고 있었거든요.

네가 바로 그 人子의 대속의 죽음에 의해 살아나게 되는 하느님 백성들의 표본이라는 것이지요. 39절을 보시면 조금 더 분명해 집니다

 (요한9:39) 39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당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오신 인자라 말씀하신 주님께서 당신은 심판을 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심판이라 하면 좋은 것이 나빠지고 성한 것이 망가지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주님의 심판의 내용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는 것이 심판이 될까요? 물론 보지 못했던 자들에게 보게 되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恩惠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은혜가 입혀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신 심판을 받아야만 합니다. 바로 인자이신 주님께서 소경들 대신에 심판을 받으시고 소경들의 눈을 뜨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내용 중에 보지 못하는 자들이 눈을 뜨는 것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뜬 사건은 예수님의 대속 죽음으로 죽음에서 살아나게 되는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12월13일(화) 聖女 오틸리아 님

그런데 오늘 본문은 소명과 중생 뿐아니라 성화와 영화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그 성화의 부분과 영화의 부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눈을 뜨게 된 소경은 그 때부터 신앙생활이라는 구원의 여정에 돌입하게 됩니다. 잘 보시면 처음에는 눈을 뜬 그가 예수님을 가리켜 예수라 하는 그 사람(11)’이라 부릅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예언자(17)’라 부릅니다.

그런데 33절에 가서는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온자라고 고백을 하고 38절에서는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눈을 뜬후 점차적으로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에 대해 이해하고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의 신앙의 성숙은 다름 아닌 고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유다인들이 몰려와 그의 눈뜸을 시기합니다. 그리고는 그를 바리사이인들에게 끌고 갑니다. 그는 바리사이인들과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준 분에 대해 설전을 벌입니다.

그는 난 다른 건 모르겠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에는 내가 안보였는데 지금은 보인다는 사실이다라고 하며 31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 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32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찌기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33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충고를 했습니다. 이제 눈을 뜬 그 소경 이 세상과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에게서 출교를 당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출교는 가족과 친지와 이웃과의 이별을 의미했으며 직업도 가질 수 없는 잔혹 한 벌이었습니다. 출교당한 자와 함께 식사를 하면 그 사람도 죄인으로 정죄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교당한 자들 중 많은 이들이 자살을 하거나 나그네로 이리저리 떠도는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그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 아버지로부터도 외면아닌 외면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부모는 자기 자식이 아침에 눈먼 상태로 나갔다가 저녁에 눈을 뜨고 들어온 것을 분명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출교가 무서워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로 전가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모르니 아들에 게 물어보라고요 아들이 모든 걸 뒤집어쓰고 출교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들은 살겠다는 것이지요.

보세요. 그냥저냥 동냥이나 하면서 한가롭게 살던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자마자 그의 삶에 폭풍이 몰아칩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향에서 쫓겨납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쫓겨나서 가게 된 곳이 어디였습니까? 예수님의 품이었습니다

 (9:35) 35 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쫓겨남과 외면당함의 수난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고 자기에게 일어난 일의 진의를 알게 되어 결국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며 내가 믿나이다.’라는 성화의 완성의 자리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서정은 稱義 (하느님의 은혜로 죄인이 구원을 받음)에서 聖化(믿음 이후 올바르게 사는 삶)로 성화에서 靈化(신령스럽게 됨)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며 그러한 성숙에 긴요하게 쓰여 지는 것이 바로 고난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쫓겨난다는 것이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으로부터 구별된다는 것을 성경이 거룩(separate)’이라 부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이제 눈을 떠 진리를 인식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하느님나라를 보게 된 이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적대시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지고 양육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멤버들 중에 조금 더디게 가는 사람이나 아직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淨罪하거나 가짜로 매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 너희 아빠가 누구야? 이 중에서 골라봐내지는 밥 먹을 때는 쩝쩝 소리 내면 안 된다는 식의 요구를 하는 것과 똑같이 우매한 짓인 거죠. 우리는 설사 그가 가짜라 할지라도 끝까지 기다려 주고, 이해해 주고, 감싸주고, 안 아주며,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내용이 담긴 마르코복음 8장으로 가볼까요?

(마르8:22-26) 22 예수의 일행이 베싸이다에 이르렀을 때에 사람들이 소경 한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대어 고쳐 주시기를 청하였다. 23 예수께서는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라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좀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러자 그는 눈을 뜨면서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 다니는걸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예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시자 눈이 밝아지고 완전히 성해져서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26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 가지 말아라' 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

  사순 제4주일 "태생소경" - 빛은 누군가를 보게 하지만 누군가는 눈멀게 하기도 한다.

역시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는 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눈을 뜬 그 소경이 사람들을 보면서 나무 같은 것들이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안수해 주시니까 그가 비로소 만물을 밝히 볼 수 있었습니다.

눈을 뜨는 것과 눈을 떠서 본 것을 인식하는 작업과의 사이에는 단계가 있으며 그 단계의 과정 간에는 상당한 시간상의 차이가 있다 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혜로 영의 눈을 뜬 사람이 자기가 보는 것, 즉 이 세상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것들을 인식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배워 서 스스로 믿어주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게 언어도단이지요. 이 이야기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칠병이어(七餠二魚)4000명을 먹이시자 바리사이인들이 또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한탄하십니다.

(마르8:11-12) 11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12 예수께서는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에 보여 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 하시고는

 

12절의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는 어구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죽겠다는 결연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대에게는 절대로 하느님이 표적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선포를 하시는 것입니다. 표적이 뭡니까?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표적은 십자가 복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미 충분하게 그러한 표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표적들을 단순히 신기한 이적의 수준으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들은 표적조차도 분간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표적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표적은 보여주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구원은 무엇을 보고, 경험하고 배워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전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적을 한번 멋지게 보여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아닙니다. 죄인들은 하느님의 은혜로 눈이 뜨여지지 않으면 그 무엇으로도, 어떤 방법으로도 하느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대에게 표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한탄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제자들 더러 바리사이인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 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조금 전에 바리사이인들이 예수님에게 또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신 것을 경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해로운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여주면 믿을 수 있다는 바리사이인들의 교만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룩 이야기를 하시니까 자기들이 빵을 한 개밖에 안 가져 와서 나무라시는가 보다 하고 자기들끼리 수군 거렸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면서 그 소경을 고쳐 주시는 사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나 칠병(七餠) 이어로 많은 군중들을 먹이신 것은 바리사이인들이나 제자들의 생각처럼 이제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게 해주실 메시아 왕국의 전주곡이 아니라 참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영적 굶주림이 해결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려 했던 것인데 제자들이 여전히 이 땅의 빵으로 다투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아니 우리 교회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데 역시 침을 뱉어서 그 눈에 바르시고 (그 죄인과 연합 되셔서) 그 눈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소경이 잘 보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고도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간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안수해서 또 치료해 주십 니다. 그제 서야 잘 보이게 된 것입니다.

바리사이인들은 그렇다치고 눈을 떴다고하는 주님의 제자들도 바리사이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에 주님께서 하나의 를 들어서 그들에게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괜찮다는 것이지요. 눈을 뜬 자들도 실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 방 다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매하고 더딘 제자들의 영적 진보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을 환하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진리 앞에 세우실 것을 천명하시는 사건입니다.

그처럼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눈을 뜬 성도들은 실수와 넘어짐을 반복하면서 점점 오롯하게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배워가는 것이며 복음에 대해 깊이 이해를 하게되고 비로소 주관적 믿음을 토해내게 되는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믿어서 구원 받았다는 말이 어떻게 가능하냐구요?

(이사53:1-11) 1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 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2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4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5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6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7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9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10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하리라.

여기에 하느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일을 시키신 하느님과 그 일을 수행하신 예수님 말고 다른 등장인물이 있나요? 우리는 6절의 말씀에 단 한번 나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그게 우리가 한 것이고 나머지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태생 소경 이야기 2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확실히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에 대해 온전히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는지, 어떻게 그 분이 물위를 걸으셨는지, 어떻게 그 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지, 언제 어떻게 그 분이 천지를 창조하셨는지 수많은 회의와 의심속에서 믿음의 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때로 의심이 들기도 하고 때로 회의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뜹니다. 그러나 그 아기가 그 뜬 눈을 가지고 무언가를 보게 되는 것은 며칠이 걸립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알게 되는 것은 평생이 걸리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듣는 이 마이크로폰도 실은 볼 수 없는 빛을 이용한 것이고 라디오나 티브이 방송도 볼 수 없는 빛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우리 눈에 빛이 보인다고 해서 다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밤에 밖에 나가 하늘을 쳐다보면, 수많은 별들이 반짝입니다. 그 별빛을 보고 우리는 ", 저 멀리에 어떤 행성(planet)이 있겠구나!"라고 추측합니다만, 천문학자들 (astronomers)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별들 중 적지 않은 별들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행성으로부터 우리 지구까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행성에서 출발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올 때가 되면 이 미 그 행성은 소멸되어(destroyed)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 이렇게 보면, 우리 눈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무엇이 허상(phantom)이고 무엇이 실상(reality)입니까?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입니까? 우리 눈의 능력이 이렇게 제한된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실상과 허상을 가려낼 수 있단 말입니까? 과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이 옳은 태도입니까? 그리고 눈에 보인다고 해서 존재 한다고 단정하는 것을 옳은가요?

그러니까 우리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많으며 보고 있는 것이 실상인지 허상인지도 잘 알 지 못하는 수준에 있는 것입니 다. 그리고 보고 있는 실상이 담고 있는 내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인식하는 데에도 아주 긴 시간이 걸립니다. 하물며 그것이 영적 인 것일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구원의 과정이 그러합니다.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 하느님의 성령 침투작전에 의해 눈을 뜨게 됩니다. 그제서야 그의 눈과 귀가 열려 하늘의 비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보이는 하느님 나라의 상을 또렷이 보기위해서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며 그 과정 또한 아주 서서히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뉘우치고 의심하며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하나하나 배우고 경험하며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진보가 이렇게 더딘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눈을 뜬 후에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 분을 믿고 싶었음에도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구원을 얻은 후에 예수님에 대해 너무 모를 수 있습니다. 그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확신이 가능할까 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구원을 못 받은 것이 아닙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주님을 배우고 알아가게 되는것이며 결국에는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9:38) 38 '주님 믿습니다' 하며 그는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

  9. 교리수업 제5과 성경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의 例話들을 잘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대할 때 그 표면적인 사건에만 머물지 말고 그 속에 상징을 담아 전체 구원의 서정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略圖속에 그려져 있는 각 지점들은 하나의 상징적 표시일 뿐입니다. 그리고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의 거리 또한 실제 거리의 몇 백분의 일, 혹은 몇 천분의 일에 해당하는 축약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소경이 눈을 뜨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내가 믿나이다.’라고 한 것은 그 고백이 나오게 되는 순서와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고백까지의 시간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내가 믿나이다.’라는 참 고백이 나오기 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날 때부터 눈이 먼 소경이 눈을 뜨고 결국에는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은 우리의 시작과 결국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자기를 찾아오신 주님에 의해 눈을 뜨게 된 성도가 그에게 맡겨진 신앙의 여정을 통과하여 두 번째 주님을 만나는 그 부활과 영화의 자리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고전13:12)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소경이 두 번째 예수님을 만나 내가 믿나이다.’하고 그 분을 온전히 믿은 사건은 바로 이 영화의 자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열심에 의한 객관적 믿음을 부여받아 내가 믿나이다.’라는 온전한 고백을 하는 주관적 믿음의 완성의자리는 우리 주님의 재림 때, 다시 말해 우리 몸의 구속이 완성되고 우리의 몸이 새로운 것으로 부활이 될때인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신앙고백을 하겠지만 우리가 이 죄의 몸에 갇혀있는 동안에는 그 고백이 불완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성경을 통하여 또한 인생에 닥쳐오는 여러가지 사건들과 경험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배우고, 하느님 나라를 배우며, 죄로 인해 소경된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날 때부터 소경된 자리에서 누가 어떠한 일을 통해 우리를 건져내었는지를 배우며 내가 믿나이다.’라는 온전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영화의 자리로 한발 한발 걸어가면서 참된 주님의 종으로 지어져 가게 되 는 것입니다. 거기에 세상으로부터의 출교와 외면과 공격과 위협이 수단과 방법으로 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로서의 삶을 기꺼이 살아내며 오로지 목표는 내가 믿나이다.’라는 온전한 고백을 하는 완성된 하느님의 백성의 자리여야 합니다.

 

오늘도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일 되세요.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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