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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사도20,2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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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6-05 ㅣ No.130196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사도20,28~38)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33-35)

 

 

 

사도행전 20장 33절에서 35절까지의 이르는 고별 설교 말미에서 바오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변호하면서 남에게 주는 삶이 복됨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깨우치고자 한다.

 

 

 

당시 바오로를 비방하던 자들의 비방 중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거둔 구제(자선)헌금 일부를 바오로가 자신을 위해서 유용했다는 것이었다(2코린12,17).

 

그러나 바오로는 분명히 에페소에서 자신의 직업 천막 만드는 일을 통해 자신의 필요를 충당했음을 밝혔다(사도18,3; 1코린4,12; 1테살2,9).

 

 

 

바오로는 낮에는 천막만드는 일에 종사하였고, 다른 사람이 쉬는 시간에는 티란노스(두란노: 개신교에서는 이렇게 부름)학원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쳤던 것이다(사도20,31 ; 사도19,9.10).

 

바오로는 하느님의 복음의 일꾼으로서 경제적 필요를 자신의 양떼들로부터 채움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권리마저 포기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에페튀메사'(ephethimesa)의 원형 '에피튀메오'(ephithimeo)금지된 것을 '갈망하다', '탐내다' 는 뜻이다.

 

여기서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을 뜻하는 부정(不定; Indefinit)과거형으로 사용되어 과거에 단 한번도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 본 적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은', '금', '옷'으로 일반적 재물의 종류를 나열하며 자신이 그 어떤 것 하나도 탐내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주어진 환경에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모든 욕심과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1티모6,5-10).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본절에서 자비로 자신의 필요를 채웠을 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의 필요도 채웠다는 사실을 회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여러분 자신이' 에 해당하며 주어를 강조할 경우에 사용하는 재귀 대명사 '아우토이'(autoi)를 문장 서두에 쓴 것은, 이 말을 듣고 있는  에페소 교회 원로들이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두 손으로' 해당하는 '하이 케이레스 하우타이'(hai cheires hautai)주격으로 사용되어 바오로 자신이 직접 노동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바오로는 에페소 뿐만 아니라 테살로니카나 코린토에서도 자신 및 자신의 동료들을 위해 육체 노동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1코린4,12).

 

 

 

여기서 '장만하였다'로 번역된 '휘페레테산'(hypheretesan)의 원형 '휘페레테오'(hyphereteo)는 일차적으로 선박의 맨 아래층에서 '노를 젓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비유적으로 '섬기다', '봉사하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된다(사도13,36 ; 24,23). 당시 선박의 맨 아래층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은 노예들이었다.

 

 

 

따라서 바오로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종으로 여겼음을 잘 보여준다. 즉 바오로는 배 맨 아래층에서 배의 진행을 위해 수고하는 지극히 비천한 노예처럼 자신도 선교 여행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재정을 자신이 스스로 섬기는 자세로 감당했다는 뜻이다.

 

 

 

바오로는 자비로 복음 전파 활동을 감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일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물질들을 기쁨으로 봉헌하며 섬겼던 것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본절에서 자신의 삶을 에페소 원로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 다시 한 번 더 자신있게 소개하고 있다.

 

'휘페데익사'(hypdediksa)의 원형 '휘포데익뉘미'(hypodeiknimi)는  '눈앞에서 직접 보여 주다', '실물 교육을 하다'는 뜻이다. 33절과 34절의 바오로의 행동은 에페소 원로들이 지난 3년간 친히 그들의 두 눈으로 목격하였다.

 

바오로는 에페소 원로들에게 물질에 대한 탐욕없이 동료와 교회의 필요를 채우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바오로의 삶은 자신과 함께 일한 동역자들에게 본으로 제시될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느님의 비밀인 복음을 깨달은 바오로는 그들에게 입으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직접 삶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하느님의 봉사자들은 말씀을 입으로만 전할 것이 아니라 늘 자신의 행동과 삶으로 가르쳐야 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바오로는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물질관의 원리가 되는 말씀이자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이 말씀에페소 원로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이 말씀은 복음서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구전되어 오는 예수님의 말씀이거나 바오로가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서 바오로가 간직해오다 에페소 원로들에게 들려 준 것으로 본다.

 

 

 

당시 속담 중에 '받을 때에는 손을 내밀고, 줄 때에는 주먹을 쥐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 비슷한 말이 있다. 이것은 받기를 좋아하면서 주기는 싫어하는 탐욕스러운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격언이었다.

 

바오로는 이러한 당시의 속담 대신에 자신이 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으로 에페소 원로들을 권면한 것이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6)

 

 

 

36절부터 38절까지는 바오로가 고별 설교를 마친 뒤 원로들과 이별하는 장면이다. 루카는 바오로와 에페소 원로들의 이별을 세 단계로 묘사했다.

 

첫째 그들은 함께 기도했고(36절) 둘째는 이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다 울었으며(37절) 마지막으로 배에 까지 바오로를 전송했다.(38절)

 

이러한 이별은 바오로에 대한 원로들의 사랑과 염려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교회에 대한 바오로의 사랑과 염려를 보여준다(38절).

 

 

 

본절에서는 바오로가 고별 설교를 마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내용이 나온다.

 

'theis ta gonata autu ~ proseyiksato '  (테이스 타 고나타 아우투 ~ 프로세익사토 ; he knelt down ~ and prayed )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당시 일반적인 기도의 모습은 아니었다. 많은 유다인들은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기도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새로운 기도의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고(루카22,41)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마지막 기도를 무릎을 꿇고 했으며(사도7,60),  베드로가 죽은 타미타를 살릴 때 간절히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사도9,40).

 

이렇듯 신약성경에서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는 아주 어려운 곤경을 만났을 때 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문맥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여기서 바오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것은 앞으로 당할 교회의 어려움들의 무게를 생각하고 그들과 맺을 사랑의 끈을 놓으려 할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슬픔을 간절한 기도로 하느님께 아뢰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몸은 서로 떠나 있지만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친교를 지속해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오로의 마음이 잘 느껴진다.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요한17,1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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