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자유게시판

★ 행복한 사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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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찬 [jesus_maria] 쪽지 캡슐

2019-09-19 ㅣ No.218718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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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 긴 고해를 하시는 분들은 명동성당의 상설고해소를 방문하세요 ]



행복한 사람이란



생활이 궁핍하다 해도 사람나고 돈났지 돈나고 사람 났느냐고 여유 있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누가 나에게 섭섭하게 해도 그 동안 나에게 그가 베풀어 주었던 고마움을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밥을 먹다가 돌이 씹혀도 돌보다는 밥이 많다며 껄껄껄 웃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밥이 타거나 질어 아내가 미안해 할 때 누룽지도 먹고 죽도 먹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대범하게 말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나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가를 미리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남이 잘 사는 것을 배아파 하지 않고 사촌이 땅을 사도 축하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자신의 직위가 낮아도 인격까지 낮은 것은 아니므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처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비가 오면 만물이 자라나서 좋고 날이 개면 쾌청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하루 세끼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비가 새도 바람을 막을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느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좋았던 추억을 되살리고 앞날을 희망차게 바라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받을 것은 잊어버리고 줄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은 돈으로는 살 수가 없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일것이다.


(청골산 봉서방)






뽈레 뽈레


다음은 오지 여행가 한비야 님의 이야기다. 
외국인 회사에 다닐 무렵 그녀는 마음이 늘 조급했다. 대학도 남들보다 5년이나 늦게 들어갔고 직장생활도 10년쯤 늦게 시작했으며 결혼을 한다 해도 보통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늦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그 늦은 시간을 보충하려면 늘 빨리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고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를 오른 뒤 그녀는 그 조급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섯 명의 사람들과 함께 킬리만자로 정상을 향해 출발하게 된 그녀는 오십대 후반의 깡마른 미국 아주머니와 함께 나란히 걸었는데, 그 아주머니가 어찌나 느릿느릿하게 걷는지 일행 중 그들이 가장 뒤처지게 되었다. 그녀는 아주머니에게 재촉하며 말했다.
“이러다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산에서 내려올 때쯤이야 올라가겠어요. 좀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 미국 아주머니는 “뽈레, 뽈레!”하고 중얼거리며 묵묵히 앞만 쳐다보고 걸었다. 옆에 있는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그 말은 “천천히! 천천히!”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속도에 신경쓰지 말자. 중요한 건 내가 지금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내가 가진 능력을 잘 나누어서 알맞은 속도로 가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그녀도 아주 천천히 걸었고, 마침내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날 함께 출발한 일행 중에서 그 아주머니와 그녀만이 유일하게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그날의 경험은 그녀에게, 목표만 뚜렷하다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 속도대로 가다 보면 언젠가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창골산 봉서방)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한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토록 변치 않는 꾸준함을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에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찬미예수님!~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 (루카 13,22-30)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실제로 구원의 문에 들어서는 사람이 적다는 어두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구원받을 자의 수를 예정하셔서가 아니라, 그들이 악행을 일삼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구원에 관한 다음 세가지 가르침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구원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은 현세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다 채우면서 후세에서도 첫 자리를 차지하려고 원하겠지만 그 때에는 말째가 될 것이라고 이르십니다.

둘째로,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신앙생활은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보여 주십니다.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좋은 말씀을 많이 듣고 또 그 말씀을 서로 자주 나누었을지라도(13,26), 그 말씀을 생활에 조금도 옮기지 않고 뒤에서 악을 일삼으며 회심을 미루고 죄악으로 흐르는 일생이었다면, 그는 실제로 하느님을 모르는 자요, 하느님께서도 그 날에 그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태오 7,23).

셋째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함을 보여 주십니다. 신앙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많이 드렸고(마태오 7,21) 주님의 이름으로 좋은 일들을 많이 했다고 자랑할는지 모르지만(마태오 7,22),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와 반면, 비록 세상에서는 천시를 받고 따돌림을 받아가며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만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간직하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며 선행으로 가득 찬 일생을 보냈다면, 그들은 하느님을 참으로 아는 자요, 하느님 나라에서 누구보다 먼저 첫 자리에 초대될 것임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구원의 말씀인 주님의 말씀을 오늘도 우리 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계속 흘려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의 생활이 마치 죄악을 밑바탕으로 지탱되고 있지나 않은지요?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는 의미 깊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다 같이 진심으로 회심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곧바로 실천에 옮겨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말을 하면서도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신앙 생활이라면,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보장이 되어 있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주님의 말씀을 많이 들은 자도 아니요, 주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또 말하는 자도 아닙니다. 오직 그 말씀을 묵묵히 행동으로 옮기는 자입니다(마태오 8,21).






병자성사


병자성사는 어떤 성사인가요?
교회는 질병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중대한 위험에 처한 환자들에게 병자성사를 통해서 병을 이겨나갈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즉 교회는 병자성사를 통해서 병고로 허약해진 환자의 마음과 신앙을 굳세게 하고, 병자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면 잃어버린 건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혜를 청합니다.


병자성사와 종부성사는 다른가요?
병자성사와 종부성사는 같은 성사에 대한 두 가지 명칭입니다.


어떤 사람이 받을 수 있는지요?
병자성사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만이 아니라 중한 병을 앓는 환자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헌장 73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병자성사는 "죽을 위험이 임박한 이들만을 위한 성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육체가 쇠약 해지거나 나이가 많거나 병이 들어 죽을 위험에 처하기 시작하면 이미 이 성사를 받기에 합당한 시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이 규정에 따르면 급격히 노쇠해지는 노인들도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본당에서는 노인들을 위해서 성당에서 공동으로 병자성사를 베풀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한 수술을 받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는 것은 합당할 뿐만 아니라 권장할 일입니다.


병자성사의 특별한 은총은 무엇입니까?
첫째, 병자성사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강화함으로써 병이나 노쇠의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평화와 용기를 줍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병들고 노쇠한 이들을 외면하는 경향이 만연하지만, 하느님은 이런 일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큰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시는데, 병자성사는 이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 또한 죽음에 직면한 사람은 병자성사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도움을 받습니다.

둘째, 병자성사를 통해서 병자의 영신적인 구원에 적합한 경우에는 건강이 회복되는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는데, 그 목적은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해서 구원을 얻게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데 있었습니다. 모든 환자는 예외없이 자신의 병이 나아서 다시 건강해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은 그 사람의 구원에 유익이 되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한도 내에서 치유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그러나 열심히 기도한다고 모든 병이 반드시 다 치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청하였지만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9)는 대답만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감수해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육체적인 치유만을 바라고 병자성사를 반복해서 받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셋째, 병자성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병자 자신의 고통을 일치시키도록 돕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이 받으셔야 할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을 몸소 감수하셨습니다. 병이 낫지 않더라도 열심히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합치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다"(골로 1,24)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고통이 자신과 교회에 선익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넷째, 병자성사는 아직 남아 있는 죄를 용서하는 은혜를 베풉니다. 야고보 사도는 병자를 위한 기도와 도유가 "병자를 구할 것이고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주실 것이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병자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받을 것입니다"(야고 5,15 참조).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지만, 혹시라도 남아 있는 죄가 있다면 병자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게 됩니다.


병자성사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병자성사의 은혜는
첫째, 생명의 은총을 증가시키고
둘째, 병자를 위로하고 유혹에 강하도록 하고
셋째, 경한 죄를 사면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고
넷째, 구원에 유익하다면 육체의 건강을 줍니다
.

병자성사를 받으면
첫째, 상존의 은총(성화은총)을 더해 주고
둘째, 죄와 벌이 사해집니다.
셋째, 육신의 병을 낫게 해주고 병자의 영혼을 견고하게 하여 악의 세력과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서 굳세집니다.
넷째,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을 갖게 되고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냉담 중이거나 견진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이거나 혼인 장애(조당)가있는 신자가 병자 성사를 받아 임종 전면은사(전대사)를 받고, 견진성사와 혼인성사를 받지 못했다면 견진성사를 받은 후 혼인 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자 성사 및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병자성사 예식서 30, 31,115-135항. 사목지침서 제 98조 참조)


병자성사로서 중죄가 사해질 수 있습니까?
병자성사는 병자가 고백할 수 없더하도 그가 통회하면 중죄가 사해집니다.


생전에 몇 번이나 받을 수 있나요?
병자성사는 반복해서 여러 번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병이 들었을 때마다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은 병자가 건강을 회복했다가 다시 중병에 걸리게 되면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으며, 같은 병으로 앓다가 병이 더 중해지는 경우에도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받기 위해서는 고해성사를 잘 받고, 신망애 삼덕을 발하고, 기도하며 특별히 만사를 하느님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1)우선 병자로 하여금 신망애 삼덕의 정을 일으키도록 하여주고, 자기 죄를 성찰하여 통회를 발하게끔 하고, 타인과 불목한 일이 있으면 용서케 하고, 채무관계라든가 기타 병자로 하여금 심적 부담이 없게끔 해야합니다.
(2)육신의 준비 : 성유를 바를 부분(이마와 두손바닥)을 깨끗이 합니다.
(3)가족의 할 일 : 방을 깨끗이 하고, 조그만 탁자위에 십자고상, 초, 성수, 깨끗한 물을 담을 그릇 하나, 수저 하나를 준비합니다.


어떻게 청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병자의 상태가 위급하지 않은 경우에는 본당 사무실이나 구역 책임자에게 신청해서 신부님과 시간을 맞춰 약속하면 됩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경우에는 병원의 원목 신부님에게 청하거나, 원목 신부님이 계시지 않는 경우에는 소속 본당 신부님이나 그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계시는 신부님에게 청하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도 병자성사는 죽기 전에 받는 성사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성사를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병자성사를 청해서 받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성사는 공동체의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환자의 가족이나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병자성사가 집전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병고를 겪어야 하는 것은 환자 자신이지만, 가족이나 신자들이 함께하면서 관심과 기도를 아끼지 않는다면 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병자성사 예식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병자성사는 말씀 전례로 시작해서 성사의 핵심 부분인 안수, 도유로 이어집니다. 이는 말씀과 성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좀더 자세히 얘기하면, 사제는 성호경으로 예식을 시작하고 통회의 기도에 이어서 성경 말씀을 읽고 간단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구하는 호칭기도를 바칩니다.

말씀 전례에 이어서 사제는 말없이 병자에게 안수하는데, 이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교가 축성한 성유를 병자의 이마와 두 손에 바르면서 다음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 그리고는 마침 기도를 바칩니다.

죽음에 직면한 환자는 병자성사 외에도(아직 의식이 있으면) 성체를 영하게 됩니다. 이렇게 죽음에 임박해서 영하는 성체를 노자성체(路資聖體)라고 합니다. 먼 길을 떠날 때 노자를 지니고 가듯이 천상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리스도를 노자로 모시고 가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함께 받을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병자가 지은 죄가 있으면 병자성사를 받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마땅 합니다. 그러나 병자성사 중에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병자성사 전에 고해성사를 받고 곧 이어서 병자성사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동시에 두가지 성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해성사 때에는 함께 있던 가족들이나 신자들은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신부님께만 받을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사제, 즉 신부와 주교만이 이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의 집권자는 사제입니다. 특별히 본당신부는 그 본당 신자에게 성사를 줄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성경에 병자성사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해 주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마르코 복음 (6,13 참조)에는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를 받을 사람과 병자성사의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원로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이렇게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예시되고 야고보 사도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병자성사입니다.


병자성사는 병자인 경우에는 어느 누구나, 그리고 어느 때든지 받을 수 있습니까?
병자성사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나이, 즉 첫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는 나이에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철들지 않은 어린이나 전면적인 정신장애인은 병자성사를 받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가벼운 병이나 죽을 위험이 없는 만성병 환자는 받지 못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임박해도 사형수나 파선 중인 배의 승선자나 전쟁 중의 군인들은 병자성사를 받지 않고 고해성사와 영성체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자성사는 의인의 성사이므로 의식이 있고 말을 할 수 있으면 고해성사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거절하면 병자성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는지요?
정례서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 있는 신자들도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위험한 병 때문에 외과수술을 받아야 할 때 병자가 수술 전에, 또 노환으로 말미암아 기력이 쇠진해지는 노인들은 병세의 위험성이 목전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병세의 위독 상태에서는 그 정확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엄격하지 말고, 필요한 경우에는 의사의 의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자성사를 받을 사람이 병세가 더 악화될 단계까지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말고 병자가 위험해지기 시작하려 할 때 바로 성사를 받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건부 병자성사에 대하여 들은 기억이 있는데 어떤 경우입니까?
조건부 병자성사에 대한 규정은 없어졌으며, 이런 경우 병자성사는 일상적인 형식으로 집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병자가 이성을 잃어 무의식 상태에 빠졌을 지라도 고백을 듣고 성체를 영해 줄 수는 없지만 병자성사를 주어야 합니다. 사제가 환자에게 갔을 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라면, 그를 위하여 하느님께 그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자비로이 천국으로 받아들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만 병자성사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조건부 병자성사는 금지됩니다.


환자가 회복되었다가 다시 중병에 빠지면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는지요?
병자 성사는 환자가 전의 중병으로 회복된 후 새로운 중병을 앓거나 오랜 지병 중에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는 경우 다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가 점차 악화되더라도 병자성사를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병자가 임종하였을 때 어떤 조치를 하여야 합니까?
병자가 임종하면
첫째, 즉시 본당에 연락하고 이웃 교우들에게 알려 연도하게 하고
둘째, 본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리기 위하여 준비하고
셋째, 교회(묘지)의 사용 허가 수속을 하고
넷째, 가족들이 화목하고 정중하게 고인에게 맞갖은 예의로 그러나 허례의식을 없애고 신앙을 바탕으로 장례의식을 준비하고,
다섯째, 연도와 위령미사를 바치며 고인의 유지를 따라 살도록 다짐하고, 가문과 사회와 교회에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고인을 위하는 일입니다
.

(GoodNews의 7성사 중 병자성사에서)






사제는 땅위의 천사


우리가 사제의 신성한 직분을 이해한다면 미사의 무한한 위대함을 보다 풍부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순교자 이냐시오 성인은 사제직은 세상의 모든 직분중 가장 숭고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에프렘 성인은 사제란 무한한 존엄의 직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성직의 존엄이신 사제는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카시안은 하느님의 사제는 모든 지상의 주권자들과 모든 천상의 직들 위에 높이 들어 올려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제보다 높이 계시는 분입니다.

* 교황 이노슨트 3세 성하는 "사제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존재입니다. 하느님보다는 아래에 인간보다는 위에 사제의 직분이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 데니스 성인은 사제는 성스러운 인간이며, 사제직은 성스러운 직분이라 명하셨습니다.

*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은 사제를 존경하는 이는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축복받은 사람이고, 사제를 모욕하는 이는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토마스 성인의 말씀에 따르면 사제직의 존엄은 천사의 존엄보다 더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 "죄인을 용서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일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단 하나의 죄를 용서하는 데도 주님의 모든 전능하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제의 능력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 순교자 이냐시오 성인 : 사제는 교회의 영광이며 기둥입니다. 또 천국의 문지기이기도 합니다.

* 치쁘리아노 성인 : 하느님의 진정한 영을 받아서 사제직을 받도록 신탁된 사람들은 경외감과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 에피파니우스 성인 : 저는 사제의 직분을 기꺼이 수령하고자 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사제 직분은 두려울만큼 성스러운 것입니다.


천사와 사제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된다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사와 사제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된다면, 저는 우선 사제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천사께 인사하겠습니다."
성인은 끝까지 성직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


하느님은 사제를 돕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아일랜드의 한 작은 마을에 가난한 상인이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 가족은 세속적인 것들은 많이 갖지 못했지만 매우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한 많은 미사에 함께 참례하곤 했습니다.
가까운 교구에 허약한 체질에 너무 공부를 많이 하다 정신적 균형에 문제가 생기고 더 이상 사제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한 젊은 사제가 있었습니다. 이 사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안 되는 한에서 이곳 저곳을 떠돌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착한 상인은 아내에게 자기 집에 작은 방을 정돈하여 신부님께 묵으시도록 하고 음식을 마련해 드리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젊은 사제도 이 부부의 친절한 초대에 기꺼이 응해, 수년간 편한 마음으로 한동안 이 집에 머물다 떠나곤 하였습니다.
이 사제는 죽음의 때에 이르러 의식을 온전히 회복했습니다.  사제는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가장 절실한 기도로 이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십사 청하였습니다.
"오! 주여, 이 사람들이 당신의 사제인 제게 베푼 것에 수천배로 갚아주십시오. 이 착한 당신의 자녀들에게 정신적인 축복과 물질적인 축복을 함께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마친 후 신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는지 들어보십시오. 이 가난했던 상인은 굉장히 장사가 잘 되서 부유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은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상인의 여동생 중에 네 명이 수녀가 되었으며, 부인의 형제 중에 네 명이 역시 수녀가 되었습니다. 이 상인은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사제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는 신자들은 큰 보상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좋은 사제를 봉헌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사제만큼 주님께 큰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사의 신비)






사랑 품고 하느님께로 떠나라



사랑 품고 하느님께로 떠나라.
그것이 고통이 되었든, 불안이 되었든, 내면의 영적 갈애가 되었든, 우리는 생애에서 절대자 하느님을 애절하게 찾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홀연 신앙의 문턱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하다. 누군가의 안내가 필요한 것이다.

한 선배의 고백은 우리를 신앙이 가져다주는 은총의 세계로 친절히 안내해 준다. 일찍이 청년 시절 동경으로 유학 가서 종교학을 전공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모태 신앙(母胎信仰)과 동양 유수의 종교(儒佛仙) 사이에서 처절한 갈등을 겪어 내고나서, 스스로는 천상 가톨릭 신자임을 선언하고 살았던 구상 시인(1919-2004년)은 만년에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 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意識)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구상,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누구든지 신앙의 은총에 눈을 뜨게 되면 세상이 이제까지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보이게 된다. 이 세상의 하찮은 들꽃 하나도 거룩함이 깃든 하느님 피조물로 보이게 되고, 지난날 슬픔과 고통 투성이로 보였던 삶의 편린(片鱗)들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축복과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껏 몸부림치며 고독하게 살아온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삶에서 드러나지 않게 도움의 손길로 부추겨 왔던 하느님 동반(同伴)에 눈물로써 감사할 줄도 알게 된다. 당신께서 신앙의 눈을 떠서 당신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림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거룩하게 대하고, 아름답게 누리시기를 바란다.

당신은 이제 신앙의 첫 발을 내디디려 한다. 신앙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며 결단이기 때문이다. 망설이는 당신 발걸음에 이해인 수녀가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이라는 제목의 시(詩)로 격려의 말을 전한다.

“'내가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나와 정든 것과의 아낌없는 결별이며 당신과의 새로운 해후입니다. 유예 없는 결단이며 지체 없는 출발입니다. 또한 낯선 것과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처럼 모험을 받아들이는 용기 있는 행위.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그러므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고백을 세 번 거듭한 시몬 베드로처럼 당신께 대한 사랑을 매사에 확인하는 기쁨의 응답입니다.”


"사랑은 나의 인력(引力), 당겨지는 대로 그리로 나는 쏠린다"고 외운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과도 같이 당신 아닌 그 아무것도 나의 배고픔을 채워 줄 순 없습니다. 
당신의 좁은 길을 넓은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려 하오니 지금껏 나를 이끄시고 보살피신 그 크신 사랑으로 나를 새롭게 하여 주소서. 내가 당신을 잘 듣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 건 나 자신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당신 은총으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이해인, "사계절의 기도")


당신이 과거 정든 것과 아낌없이 결별하시기 바란다. 낡은 가치관, 악습, 고집들을 가차없이 버리기 바란다. 그래야 하느님과 새로운 해후가 이루어진다. 과거가 당신을 잡아당기더라도 주저하지도 머뭇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단호하게 출발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모험의 길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낯선 것"들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마라. 당신이 챙길 것은 오로지 하나, 사랑뿐이다. 사랑을 품고 사랑이 부르는 대로 가라. 거기 하느님이 계신다. 그렇다고 대충 떠나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호락호락한 길이 아니다. 좁고 험한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마태 7,13).

이렇듯이 생명에 이르는 길은 모든 것을 원하고 몰두를 요하는 길이다. 헐렁한 마음으로는 얼마 못 가서 포기하기 십상인 길이다. 하지만 길이 험하다 해서 신앙을 짐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신앙이 당신 짐을 덜어줄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길은 순탄치 않지만 예수님께서 짐꾼으로서 우리와 동행해 주실 것이다. 우리 짐이 무겁지 않도록 부축해 주실 것이다. 아니 그 짐이 더 이상 짐이 안 되게 하는 비결을 일러주실 것이다. 이윽고 당신은 신앙이 결코 짐이 아니고 오히려 인생의 고달픈 짐을 대신 져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주저하지 마라. 당신이 신앙을 통해 누리게 될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몰라서 그렇지 그 가치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을 몽땅 팔아 그것을 사려들 것이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우리는 세상 잇속에는 얼마나 눈이 밝은가! 어느 지역 땅이 얼마나 오를지, 어느 아파트가 얼마나 투자가치가 있는지 얼마나 잘들 아는가!
아무리 잘난 체하고, 아무리 으스대도 이런 사람들은 "밭에 묻혀 있는" 하늘나라 "보물"을 볼 줄 아는 사람에 비하면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지혜는 잠시의 가치에 집착하지만 성령의 영감을 받은 지혜는 영원히 녹슬지 않을 보화(마태 6,20)를 붙들기 때문이다.

(사랑의 성모수녀회 사랑수녀님)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사명의 확신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사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향한 비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의 확신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기 이 짧은 글로서 표현하는 것이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사명은 자기의 은사에 대한 인식과 자각이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기적이나 이상으로 이런 부르심을 받았다, 이런 사명을 받았다고 하는 경우는 제외합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명을 말할 순 없습니다. 또한 사명은 신앙을 기본으로 합니다. 신앙 없는 사람은 사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신앙인이면서 사명을 받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명에는 우선 내적 확신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그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각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틀림없는 것은 사명에 대한 내적 확신이 없는 사람의 신앙 생활은 힘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사명은 '은사'와 함께 주어집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바오로에게 유대인들을 맡기지 않으셨고, 베드로에게 유대인들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에게는 이방인을 위해 일할 사명을 주셨죠. 그것은 바오로가 가진 은사와 그의 여러 가지 여건이 그 일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그렇게 준비시켜 주신 것입니다.

형제자매님은 사명에 대해서 고민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형제자매님은 하느님을 위하여 무엇을 잘 하실 수 있습니까? 즉,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형제자매님의 달란트, 재능이 무엇입니까? 그곳에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엿장수에게 엿을 팔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그 사람에게 사명으로 주십니다.
요약하면, 사명에 대한 확신은 그 개인의 신앙에 따라 그 강도가 다르고, 그 방법과 확신의 과정이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확신이 없으면 그리스도인답게, 사명자답게, 직분자답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명은 이미 주신 은사와 달란트, 재능의 범위 내에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창골산 봉서방"에서 hijjang)






조지 뮐러의 대답



영국의 조지 뮐러(1805~1898)는 

일생을 고아를 위해 헌신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에 말년에 뮐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평생을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조지 뮐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조지 뮐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평판, 선택, 좋은 것, 싫은 것, 원망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나는 죽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은 하느님의 책망이었고
제가 원했던 것은 하느님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조지 뮐러의 대답은 간단한 대답이지만
가장 중요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 부인" 이라는 기초위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죽을 때 비로소
성경적인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아의 죽음은 매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합니다.
내 속에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쳐서 날마다 죽이는 것이 나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기도와 은총, 성령충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자기부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 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 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생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임신하지 못하는 부부를 위한 기도


우리 조상들의 주 하느님, 주님은 진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하와를 그에게 동무로 주시어 주님을 위하여 이 세상에 인류를 번식하게 하시고, 그들을 주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축복과 자비를 가지고 내려오시어 원수가 간음과 실망이라는 두 가지 죄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닫아 놓았던 태를 열어 수태시켜 주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조물주, 거룩하신 아버지, 이 두 자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들을 행복하고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내는 포도나무와 같이 번식력이 있게 하시고, 남편은 그를 받쳐주는 지주(支柱)와 같이 그의 보호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 생명이여, 내려와 생명을 주십시오. 오 불이여, 내려와 다시 따뜻하게 하십시오. 능하신 분이여, 내려와 행하십시오. 내려오십시오! 

올해의 풍성한 수확에 대한 찬미의 축제를 위하여 이들이 산 곡식다발을, 즉 주님께 바라는 자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영원하신 주님께 봉헌된 그들의 맏아들을 바치게 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시 )


(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립니다. 아멘 )

 


 

 




교만의 증상들



이기심

자기의 욕심을 감추기 위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짓밟고 있다면, 자기의 재능을 활용해도 다른 이에게 축복이 되지 못한다면 자신의 재능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인 교만으로 인해서 섬김을 받고자 하며, 항상 자기만 옳다고 여기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신의 소원이 항상 성취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자라나게 된다.


우월감

교만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을 멸시하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교리나 행동, 고유의 가치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게 만든다.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은 교리나 불화가 아니라 바로 교만이다. 서로에게 주고받을 만한 가치 있는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모든 분쟁과 분열, 불신, 갈등과 불화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비꼬는 말

비꼬는 말은 위장된 유머로서 다른 사람의 결점을 부각시켜 상처를 입히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편견을 드러낸다. 비꼬는 말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거나 감정이 상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당당히 그것을 다룰 용기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는 쓴뿌리가 자라나는 것이다.


정죄와 비난

교만한 자는 비판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장점을 잘 발견하지 못한다. 상대방의 장점이 드러나면 삐딱하게 받아서 무시해 버린다.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쁨이나 은혜를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다른 사람을 모함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한 점에 대해 있는대로 얘기해 버리는 것은 곧 그 사람에 대한 모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참지 못함

참지 못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계획, 일정을 사람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을 나타내며,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 참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안에 사랑과 절제가 없다는 증거다.


탐심

질투와 탐심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에서 시작된다. 탐심은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과는 동떨어진 세상의 것을 바라보게 하는 태도와 방식이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갈망할 것이다.


강퍅한 마음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은근히 기뻐한다. 다른 이들을 위로할 줄도 격려할 줄도 모르며, 다른 사람이 잘 되는 일에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한다. 강팍한 마음으로 변해가는 첫 단계는 싫어하는 사람과 마주하지 않는 것이다.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되면서 서서히 냉각되어 그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 그대로 방치하면 교만에 뿌리를 내린다.


배우기 싫어하는 마음

고침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 어떤 잘못을 지적할 때, 그 말을 경청하는가?, 화를 내는가? 합리화하고 변명하는가? 아니면, 해명하는가? 성숙한 사람일수록 남의 충고나 지적을 잘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훈계 속에는 최소한의 진실이 들어있게 마련이다.


아부

칭찬과 아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칭찬은 다른 사람을 신실히 세워주기 위한 것이지만, 아부는 조종하려는 의도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기 위한 정직하지 못한 행위이다.


자기연민

상처받고 지치고 약점잡히고 오해받고 압박받고 죄를 지을 떄, 그리고 낙심하거나 침체될 때 우리는 쉽게 자기연민에 빠진다. 이런 습관을 깨뜨리기 위해 때로는 격전을 치러야 하며,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자기 연민은 교만을 조장하며 그 이면에 있는 이기적인 목적을 합리화한다. 만족할 줄 모르며 이기적이기 때문에 또 다른 무언가를 요구한다.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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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http://예수.kr ,  http://마리아.한국)

 


자비의 예수님,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과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에게 구원의 은총 속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와 교황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온 세상의 모든 이들과 태아에게도 은총과 자비를 베푸소서. 온 세상과 우리 나라에도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게 이끌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과 배필이신 성 요셉과 성인의 통공 안의 모든 가족들은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돌아가신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를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빌어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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