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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정의와 연옥벌 (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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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찬 [jesus_maria] 쪽지 캡슐

2019-11-13 ㅣ No.133829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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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 긴 고해를 하시는 분들은 명동성당의 상설고해소를 방문하세요 ]


 

 

 하느님의 정의와 연옥벌    



  하느님은 자비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의롭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 지옥이고, 또 그래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연옥입니다. 왜냐하면 평생 나쁜 짓만 하다고 죽기 직전에 회개한 사람이 있을 것인데, 그 사람에게 평생 지은 죄에 대한 아무런 보속도 하지 않고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해 주어도 항상 벌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봅시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 갖은 첫 자녀는 태어나자마자 죽게 됩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얻기 위해 우리야를 죽였고 그 죄도 용서를 받았지만, 하느님의 다윗의 집안에 평생 칼바람이 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제들끼리 서로 죽이고, 또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며 자신의 소실들이 겁탈을 당하는 고통을 겪어야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병적조사를 해서 나중에 뉘우치기는 했지만 하느님이 세 가지 벌을 준비하십니다. 삼년 동안의 가뭄, 석 달 동안 칼에 쫓기는 것, 그리고 사흘 동안의 전염병입니다. 다윗은 당연히 짧은 것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 짧은 날 동안 7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벌 중에 가장 가벼운 것을 선택한 것이었을까요? 저는 같은 죄의 벌을 위해 하느님께서 서로 다른 양의 보속을 내놓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결코 사흘의 전염병이 다른 고통보다 적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막심 퓌상의 연옥실화에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성 안토니오의 말에 의하면, 오랫동안 앓고 있던 회개한 한 죄인이 하느님께 죽기를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네가 지금 죽어서 3일간 연옥에 있든지 또는 2년간 이 병을 참아 받고 바로 천국에 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

병자는 주저하지 않고 연옥을 원했습니다. 얼마 후에 천사가 연옥에 갔는데 그 환자가 천사를 보며 말했습니다.

“사흘만 있으면 될 이곳에 나는 벌써 몇 년이나 있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말했습니다.

“아니, 그대는 여기 온 지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네.”

“그러면 나는 어리석은 청을 했습니다. 가능하면 다시 인간 세계에 돌아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거기서 가장 괴로운 병을 몇 해라도 즐거이 참아 받겠습니다.”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고 병자는 연옥의 엄청난 고통을 기억하고 그저 인내했을 뿐만 아니라 크나큰 기쁨으로 먼저의 병을 잘 참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치릴로는 연옥의 아주 잠시의 고통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크다고 했고, 벌겋게 달구어진 석쇠 위에서 당한 라우렌시오의 고통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이 크다보니 연옥에서의 시간은 이 세상의 시간보다 훨씬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보속의 시간이 짧다고 결코 얕잡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윗이 위 세 가지 제시된 벌을 다 거부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벌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죗값을 치르지 않겠다는 말이고 이는 참으로 죄를 뉘우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즉 죄가 용서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용서를 청한다는 것은 벌을 받을 각오도 돼 있어야합니다.

혹은 우물쭈물 하다가 그 벌을 받기 전에 죽게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하늘나라에서 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에서라도 죗값을 치르고 깨끗하게 들어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죄에는 반드시 죗값이 있어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났다면, 어떻게 죗값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다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죗값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에서 키레네사람 시몬이 져야 했던 고통이 있는 것처럼, 내 죄에 대한 나의 보속도 반드시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은 그분이 해 주시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그분에게 전가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청하는 이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래서 연옥은 결국 우리가 남은 죗값을 청산할 수 있는 은총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죄의 보속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굳이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 자신에게도 커다란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로마에서 한 방탕한 부인이 청년을 타락시키고 쾌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영혼 같은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나 다만 때때로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청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은 갑작스레 그 천한 생활이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범한 죄가 무서워져 통회하고 고백하여 올바른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연옥 영혼이 은인을 위해 기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얼마 후에 이 여인은 감탄할 만한 최후를 마쳤고 그의 영혼에 대해서 걱정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연옥영혼을 위한 기도는 그 분들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이익을 줍니다. 바로 무서운 대죄를 미워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보속을 위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또한 그 기도를 받은 이들을 통해서도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는 영혼들은 하느님 앞에서 직접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 줍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의 백성 7만 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 대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죽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백성이 아닌 자신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청합니다. 남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고 그 고통의 값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연옥에 있는 영혼이나 자기 자신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항상 비르짓다의 기도를 추천해줍니다. 1년 동안 바치는 주님수난 15기도는 15명의 연옥영혼을 구해준다는 약속이 있고, 12년 동안 바치는 주님성혈 7기도는 자신 또한 연옥에 가지 않게 해 준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굳이 맞지 않아도 되는 매를 맞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은 예루살렘 성지 순례나 1년간의 금식보다 더 낫다.”

미사보다 큰 기도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나의 죄와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큰 보속이 됩니다. 될 수 있으면 이 세상에서 나의 죄에 대한 보속을 다 하고, 가능하다면 다른 잊혀진 연옥영혼들을 위해서도 공로를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준 사랑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전 요셉 신부)






죽음, 연옥, 연옥영혼을 위한 기도   



  바오로 사도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1-2).”


지상에서의 인생은 천막집, 즉 임시 거처일 뿐이고, 하늘나라에서의 인생은 우리의 진정한 집입니다. ‘죽음’은 임시 숙소에서 영원히 살게 될 그 집으로 이사를 가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일입니다.)


또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아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6-19).”


부활과 내세가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부활도 내세도 안믿으면서 단순히 현세적인 복을 빌기 위해서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현세적인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내세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고 있고, 그 믿음과 희망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부활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격’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4-36).”


그 자격을 심사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는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가 선택한 이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태 24,30-31).”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란다면, 심판관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천국은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즉 성인(聖人)들이 가는 곳이고, 지옥은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곧장 지옥으로 가야 할 정도로 악하게 산 것도 아니고, 천국으로 직행할 정도로 완전하게 산 것도 아닌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을 우리는 연옥이라고 부릅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가운데가 아닙니다.
(또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의 중간 단계도 아닙니다.)
지옥은 완전히 끝나버린 곳,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가운데가 아니라, 천국의 부속실, 또는 대기실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옥은 천국과 완전히 분리되어 따로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6).”


그런데 연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보속을 어떻게, 얼마나 하는지는 모릅니다. 또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들의 보속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입니다.
(연옥 영혼들의 보속을 도와주기 위해서, 기도하고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기도와 선행과 사랑 실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도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우리 덕분에 보속 기간이 단축된 연옥 영혼들이 천국에 들어간 다음에 우리를 도와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서, 즉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한 일입니다.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2마카 12,44-45).”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 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 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 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 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1요한 5,14-17).”
(죄인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이 말은 , 그 죄인이 살아 있는 사람이든지 이미 죽은 사람이든지 간에 모두 적용되는 권고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이기 때문에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Rev.S.Moyses) 






고마운 연옥   



  유태인들 전통에는 항상 밖에 나갔다 오면 손과 발을 씻는 전통이 생겼었고 지금도 모든 식당 앞에는 손을 씻는 곳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고 있기에 씻어도 되고 안 씻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씻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손과 발에 묻어있는 병균에 의해 걸릴 수도 있는 병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요? 어떤 때는 강요된다고 해서 불만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전통이 참 고마운 전통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도 깨끗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요한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 나라에 있는 의인들이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빨아 희게 한” 사람들입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즉, 완전히 자신을 순결하고 깨끗하게 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흠도 티도 하느님나라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이렇게 온전히 깨끗해져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부족한 상태로 죽음을 맞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씻는 연옥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은총입니다. 연옥이 없다면 누구도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가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성경에 연옥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옥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한 번은 어떤 병원 영안실에서 신자들과 함께 연도를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개신교 찬송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분들께 물어보니 개신교인들도 장례가 나면 죽은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하러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신교는 연옥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교리에 의하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으로 심판을 받고 그 심판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것은 목사님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그래도 직접 와서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는 신도들이 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연옥이 없다고 가르쳐도 사람들 마음 안에서 울려 퍼지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올바른 도리’라는 양심의 소리는 잠재울 수 없는 것입니다. 

개신교인들이 연옥이 없음을 주장하는 가장 큰 증거는 성경에 연옥이란 말도 안 나오고 그것에 대한 언급도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수없이 나와도 연옥이란 말은 단 한 번도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이 내세에 있음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이 됩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앞으로 올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12, 32)

현세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입니다. 앞으로 올 세상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나 세상 종말 이후의 새로운 세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종말 이후의 새 하늘 새 땅의 세상은 이미 하느님나라이기 때문에 죄가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더러운 것도 하느님나라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묵시 21,27 참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는 곳은 ‘이 세상’과 ‘죽음 이후의 세상’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미 천당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용서 받을 죄가 없고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용서 받을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완전히 깨끗해지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누구를 의미하겠습니까?

“그들은 숨은 일을 모두 드러내시는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2마카베오 12,41-45)

연옥의 존재에 관해 이것보다 더 명확하게 나와 있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안타깝게 개신교는 이 성경을 정경에서 제외시켜버렸습니다. 신약과 구약의 정경은 교회가 정한 것이지만 개신교는 신약은 교회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구약은 그리스도교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 경전을 제외시켰던 유태인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종교가 정한 것을 그대로 따른다는 뜻입니다.


또 그들이 내세우는 가장 큰 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사람들은 단번에 죄 사함을 받습니다. 단번에 죽으시고 단번에 모든 죄가 사해졌으므로 그것으로 인간의 죄에 대한 청산은 이미 이루어진 겁니다.”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죄가 완전히 사라지던가,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던가, 둘 중에 하나라는 뜻입니다.

죄를 계속 짓더라도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다 사해지니 죽을 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완전히 죄가 용서된 상태에서 천국으로 바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피는 죄를 용서하여 사람을 살립니다. 따라서 죄가 없이 죽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다 사해졌다는 것이 완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린 아기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기 때 죽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더 살도록 하시는 하느님이 조금 이상한 분이실 것입니다. 아기는 죄가 없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죄를 알게 되더라도 완전한 성인이 되도록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옥이란 완전하지 못한 상태로 죽은 이들이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완전하게 성숙시키는 하느님의 자비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쉽게 말하면 조금만 더 공부하면 낙제를 면하기 때문에 조금 더 공부하도록 나머지 공부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연옥이 없다면 바로 천당 갈 사람은 정말 드물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잣집 친구 생일잔치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신을 벗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양말에 구멍이 나서 엄지발가락이 튀어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창피해서 계속 다른 발로 그 발을 밟고 있었습니다. 좋은 음식과 놀이들은 더 이상 좋아 보이지 않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하느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완전한 성인들만 있는 곳인데 혼자만 어린 아기라면 본인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연옥은 벌을 주기 위한 곳이 아니라 하느님나라에 들어갔을 때 충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곳이기에 은총의 공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한데 합친 것보다 연옥의 아주 미소한 괴로움이 더 혹독합니다.” (성 치릴로)

“연옥에서 일순간 받는 고통은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고통보다 더 무섭습니다.” “현세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보다 연옥불은 혹독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왜 죽은 뒤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냐면 죽은 이후에는 믿음의 공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선 믿음의 불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단련하지만 죽은 뒤엔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기에 그 고통이 더 가중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엔 고통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 연옥이 고통스러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이 세상에서 완전해져서 주님께 가야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완전해지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 5,48) 

개신교의 말대로 믿음으로 다 해결된다면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되도록 노력하거나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용서되어도 그 벌은 남기 때문에 우리는 고해성사가 있어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로마엔 연옥 영혼들에게 봉헌 된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안엔 연옥 영혼에 관한 많은 기적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화재가 나서 새겨진 연옥에 있는 한 사제의 얼굴, 옷과 책상, 책 등에 손 모양으로 타 들어간 것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 분이 일 년처럼 고통스러워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나타나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손을 대어서 탄 자국들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공로는 믿음의 공로까지 합쳐지기 때문에 우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면 그들은 수백 배의 공로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또 이 세상에서 기도해주는 이들을 위해 주님 옆에서 얼마나 많이 청원해 주겠습니까?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늘에 좋은 친구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미사가 가장 큰 기도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식사 후 기도만 잘 해도 그들에게 수많은 위로를 줄 것이고 우리도 그 사랑의 보답을 크게 입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하늘과 땅의 교류입니까? 이제 시작되는 위령성월, 연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조금 더 인간관계를 넓혀 봅시다.

(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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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http://예수.kr ,  http://마리아.한국)

 


자비의 예수님,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과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에게 구원의 은총 속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와 교황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온 세상의 모든 이들과 태아에게도 은총과 자비를 베푸소서. 온 세상과 우리 나라에도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게 이끌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과 배필이신 성 요셉과 성인의 통공 안의 모든 가족들은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돌아가신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를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빌어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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