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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야고2,14~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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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0-02-21 ㅣ No.13620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야고2,14~24.26)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4-17)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외모로 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사실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거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이다.

이런 측면에서 야고보는 1장 1~13절 단락에 이어지는 14~26절 단락에서 믿음은 반드시 실천(행함,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사실과 실천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윤리적 실천 의무 모든 성경가운데 가장 명시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본 서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가 바로 오늘 독서이다.

믿음을 통한 의로움(구원) 즉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를 강조하는 바오로의 주장 (로마3,21.22; 갈라2,16)과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야고보의 주장은 언뜻 보기에는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행동'(행위, 행함, 실천)에 해당하는 '에르가'(erga)란 용어를 바오로와 야고보가 서로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오로와 야고보가 사용하는 '에르가'의 의미를 규명한다면, 이러한 오해가 풀리며 결코 두 사람의 메시지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바오로는 로마서 3장 28절에서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행위는 할례의 준수와 같은 '율법적 행위' 가리킨다. 이것은 구원이 결코 율법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공로를 제쳐놓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선행이나 공로도 하느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행위'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지 못한 자로서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에게 있어서의 '행위'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거듭난) 자가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믿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행위(실천)를 의미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은혜로 믿었다면 믿고 난 후에는 당연히 믿음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행위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이웃을 돌아보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구체적인 행위등은 참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나 야고보는 모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에는 다름이 없고, 다만 야고보가 그 믿음이 거짓 믿음이 아니라는 것은 실천(행위)으로써 증명된다는 사실을 보다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강조점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에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5~16)

 

야고보서 2장 15~16절은 야고보가 이 서간을 쓰던 당시초대 교회내의 실제적인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본문의 '형제' 해당하는 '아델포스'(adelphos)와 '자매'에 해당하는 '아델페'(adelphe)란 표현은 그리스도로 맺어진 공동체, 즉 교회의 일원으로서 남자와 여자 교인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이기 때문이다(1코린12,12~27).

 

그리고 '헐벗고'로 번역된 '귐노이 휘파르코신'(gymnoi hyparchosin)은 문자적으로는 벌거벗은 상태(be naked)이지만, 사실은 거의 옷을 입지 못한, 또는 남루하여 적절한 의복을 입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날 먹을 양식'으로 번역된 '에페메루 트로페스'(ephemeru trophes)는 '매일의 양식' 의미한다. 또한 '없는데'로 번역된 '레이포메노이'(leiphomenoi)의 원형 '레이포'(leipho)는 '결핍하다', '없다'란 뜻으로서 음식의 결핍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속한 교회내의 지체들 가운데는 충분한 의복 뿐만 아니라 음식 또한 먹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던 형제, 자매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교회 안에서도 인간으로서 생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입을 것도 갖추지 못한 채 극도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비극적 상황을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다.

 

이제 야고보는 2장 15절에서 제시한 비참한 상황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실제적으로 돕지 않고, 그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아무 유익도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평안히 가서'에 해당하는 '휘파게테 엔 에이레네'(hypagete en eirene)는 서로 헤어질 때 유다인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인사말이다.

이것은 원래 마음으로부터 상대방의 행복을 소망하는 깊은 사랑의 의미가 담긴 인사였다( 마르5,34; 루카7,50).

 

여기서는 헐벗고 굶주린 형제들에게 '하느님께서 너를 평안하게, 즉 결핍에서 채워주실 것이니 그냥 가라'고 하는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여기서 스스로 돕지 않고, 단지 입술로 평안함을 빌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잠언 3장 28절에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 테니." 하지 마라" 고 했다.

도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보내면서 평안함을 비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몸을 따뜻이 녹이고'에 해당하는 '테르마이네스데'(thermainesthe)는 '테르마이노'(thermaino)의 중간태 명령형으로 '스스로를 덥게 하다' 의미이다. 또한 '배불리 먹으시오'에 해당하는 '코르타제스테'(chortazesthe)도 중간태 명령형으로 '스스로를 배부르게 하라' 의미이다.

이런 단어들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대책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교회 공동체 내에 가난한 자들이 궁핍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교인들이 그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공급해 주기보다는 값싼 동정의 무책임한 말로만 떠들어대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완전히 무시하고 말로만 반응하는 그들의 반응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나 자매에게 베풀어 주어야 하는 최소한의 사랑의 행위조차 행하지 않는 위선적인 태도이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은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58,6~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7)

 

이 구절은 실천(행동, 행함)이 없는 믿음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명한 구절로서 본 서간의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야고보는 2장 15절과 16절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 사실에 대해 이제 중간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다.

 

'죽은'으로 번역된 '네크라'(nekra)는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나타내고 있다(루카15,24.32).

즉 실제적인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본인과 이웃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측면에서 해롭기까지 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오직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만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야고보서 2장 17절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2장 8~10절에서도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 하셨습니다."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19)

 

야고보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멸망할 마귀들이 가진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헛된 믿음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야고보는 신앙 문답과 같은 양식으로서 유일신론을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마귀들'(타 다이모니아; ta daimonia)도 유일신론을 인정하고 있다. '떱니다'로 번역된 '프릿수신'(phrisusin)의 원형 '프릿소'(phriso)는 '떨다','극한 공포에 사로잡히다','소름끼치다'란 뜻으로서 마귀들이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매우 크게 두려워한다는 의미를 나타내주고 있다.

 

결국 이 구절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마귀처럼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도 있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실천(행동,행함)이 배제된 믿음만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1)

 

야고보는 이제 실천있는 믿음만이 하느님 대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유다인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한다(요한8,39).

본문에서 야고보가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파테르 헤몬; pater hemon)이라고 언급한 것은본 서간 수신자들의 대부분이 유다계 그리스도인이거나 유다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23)

 

여기서 야고보는 바오로 사도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한 창세기 15장 6절을 이용하고 있다. 야고보는 먼저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었다'는 사실에 대해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후사가 없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그의 씨로 하늘의 무수한 별과 같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다(창세15,5). 그리고 그 믿음을 하느님께서는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15,6).

 

그러나 그 후 이사악을 기꺼이 제물로 드린 <'아네넥카스'(anenegkas)의 원형은 '아나페로'(anaphero)로 '제단에 놓다', '제단에 가져가다'는 뜻사건을 통해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이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 사건은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의 가장 두드러진 증거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순종의 행위일 뿐 아니라 그의 아들을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산 제물로 드릴지라도죽음으로부터 하느님께서 능히 그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히브11,19).아브라함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아들을 제물로 드렸다는 것은 그 약속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야고보는 이처럼 믿음과 행위가 일치되는 구약의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이 증거하는 믿음과 행함(실천)의 일치를 증거하고 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이 창세기 22장의 그의 순종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표현이다.

'이루어졌고'로 번역된 '에플레오데'(eplerothe)의 원형 '플레로오'(pleroo)는 '충만하게 하다', '완성하다', '온전하게 하다'는 뜻이다.

 

즉 창세기 15장 6절의 '칭의'(의로움의 선언)도 법정적 선언이고(로마4,3) 창세기 22장은 그 '의로움의 선언'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는 명백한 증거 사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는 본절을 통해 아브라함이 행위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로써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26)

 

야고보는 서간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행위(실천)와 믿음의 관계에 대한 결론을 2장 26절에서 맺고 있다. 실천(행함, 행동, 행위)없는 믿음은 영이 없는 몸과 같은 것이라 비유한다. 이것은 2장 17절의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내용과 동일한 말이다.

즉 야고보는 실천없는 믿음은 숨을 쉬지 않는 육체에 비교하면서 믿음을 육체에, 그리고 실천(행함)을 영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으로 번역된 '프뉴마토스'(pneumatos)의 원형 '프뉴마'(pneuma)는 '호흡','숨', '생명'이란 일차적인 뜻이 있으나 구약에서부터 보편적으로 '호흡이 있는 생명'이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인간 생명의 삼중 구조(1테살5,23)에 입각해서 새 성경은 '영혼'안에 있는 '영혼의 핵'인 '심령'(영)으로 번역되어 있다.

 

숨쉬지 않는 육체는 시체일 뿐이다. 이처럼 행동(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호흡이 끊긴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육체와 영이 하나이듯이 믿음과 실천(행함)도 하나이다.

육체와 영이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영이 없는 몸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믿음은 실천 없이는 아무런 구원의 능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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