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5일 (수)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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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동이를 버리고 (요한 4.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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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0-03-14 ㅣ No.136758

보실분만 보세요 길어요. 

 

물동이를 버리고 (요한 4.25-42)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27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30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31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33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36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37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원수취급을 했던 사마리아 땅에 살고 있는 당신에 백성을 만나시기 위해서 불원천리 육신이 고단해 지실 정도에 잰거름으로 사마리에 땅에 도착하셨어요 그죠 그래서 우물가에 도착하셨을때는 이미 주님께서 아주 고단하셨다 그러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반드시 머스트 그곳으로 가셔야만 했다라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주님은 자신의 백성을 만나시기위해 고단하게 젠 거름으로 그곳까지 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시간의 여유를 두고 당신에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모든 제자들을 물리시죠 왜냐면은 유대인들이 더더군다나 랍비가 여자와 대낮에 이야기하는 것은 허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있었으면은 아마 시간을 두고 이렇게 복음을 설명할 수가 없었을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을 양식을 구하게 보내죠 보통 양식을 구하러 가는데 전부다 안가잖아요 그 하느님은 그런 장치를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양식을 구하러 가고 우물가에는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만 남았어요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목이 마르니까 물을 좀 달라라는 부탁을 하심으로 그 여인과의 대화를 시작하시죠 주님께서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주님에 목을 축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도를 담고 있었다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추론해 낼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주님께서는 그 여인이 갖고 있는 진짜 목마름에 정체를 폭로시키고 그 목마름을 오직 은혜로 채워주시겠노라 라는 복음을 설명하시기 위해 물을 좀 달라라는 부탁으로 대화를 여신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었죠 주님에 부탁을 받은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의야하게 생각하면서 왜 유대인이 평소에는 상종치도 않는 나에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라고 댓구를 했어요 그 말을 들으신 주님은 엉뚱하게도 니가 하느님에 선물이 무엇인줄을 알고 너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니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세요

물을 달라고 당신이 이야기했으면서 그 여자가 왜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랬더니 내가 너에게 물을 줄려고 하는 거야 왜 생수를 구하지 않아 이렇게 대답하신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대화속에서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라고 부탁 하신것이 예수님에 목마름을 해결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으로 말라죽어가고 있는 당신에 백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주시려고 하는 그것을 설명하고 주시려고 하는 의도였다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소유한 사람은 그 지역에서 가장 힘있는 사람으로 군림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아시스도 아니고 우물도 아니고 고여있는 물도 아니고 휘도르 끊임없이 솟아올라 흐르는 물이라 그랬죠 그 단어는 생수 휘도르가 그러한 끊임없이 솟아 올라 흐르는 물을 주시겠다라고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여인은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그 휘도르 생수를 세상적인 것으로 받아드렸어요 그 여인은 주님께 자신이 이렇게 육신에 목이 말라 물을 길러 나오지도 않을 수 있는 솟아나는 샘물을 기대했던 거에요 이제 내 팔자는 폈다 이렇게 생각했겠죠 

그런데 주님께서 갑자기 그 생수의 이야기에서 그 여인에게 니 남편을 불러오라 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 여인인 여섯번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엉겁결에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어요 주님은 그 여인에게 니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있는 남자도 니 남편이 아니다라고 그 여인에 치부를 바로 들춰내시죠 주님은 사실상 이 세상에 것들로 목마름을 채우려 끊임없이 이내 말라버릴 그 무화과 나무 잎으로 자신들에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는 모든 죄인들에 모습을 그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폭로하신 거에요

주님은 세상에 힘을 상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그 남편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자신에 목마름을 해갈하려고 했던 그 여인에 잘못된 갈망에 변이를 적나라하게 폭로를 하심으로 해서 그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에 실체를 직시하도록 하시는거죠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자신들에 부끄러움을 이내 말라 버릴 무화과나무 잎 과학 철학 교육 재물 뭐 이런 걸로 가리려는 시도들을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걸 띠어 버리시는 거에요 왜 가죽옷을 입혀야 되니까, 아니 가죽옷이 아니라 의에 흰옷을 입혀야 되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이 그걸 끝까지 붙들고 있는한 하느님이 지어주시는 에 흰옷을 입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자신이 얼마만큼 큰 죄인이였는가라는 그 죄에 대한 자각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거에요 그리고 그 남편에 이야기는 곧바로 예배에 이야기로 전개가 되어지죠 

그러니까 이 배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게 왜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되어질까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성경이 우리 인간들에 해갈을 향한 잘못된 갈망에 변이 중에 가장 사악한 것이 바로 예배에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는 무서운 타락에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거에요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속에서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무언가에 대한 목마름에 대한 해결책으로 선택을 한 것이 뭐였어요 남편이였어요 그것도 결국은 잘못된 예배에 행위에 표본이지요 예배가 뭐에요 월쉽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을 내 삶에 중심에 올려놓고 섬기는 행위를 월쉽 예배라고 합니다 이 역사속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인생의 중심에 그 사람에 우주에 중심에는 항상 자기 자신이 있다 말이죠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들고 자신을 위해 종교를 만들고 자신을 위해 윤리와 도덕도 만들어요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예배하는 행위들인 거죠 주님은 오고 오는 모든 하나님에 백성들에게 잘못된 갈망에 변이로써에 예배행위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 당신께서 생수가 되셔서 이 땅에 내려오셨음을 그 예배에 이야기를 통해서 밝히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진정으로 예배를 할 수 있는 자들은 생수이신 주님을 마시는 방법 이외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생겨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드렸다면 복된 소식 굿뉴스로 받아드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예배하기 위해 언제라도 남을 밟아 죽일 수 있는 살해할 용의가 있었던 죄인이였음을 인정하고 여전히 자기 속에 내재되어 살아있는 자신에 추악함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거죠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주님이 용서를 하셨다라는 말을 듣고 그 용서를 진정으로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내가 별로 죄지은게 없는데 용서가 뭐 그렇게 감사하겠어요

본인에 생각에 자신은 별로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 그 사람에게 용서라는 것이 복음으로 들리겠습니까? 자신에 죄는 그저 경미한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에 그 속죄에 선물 대속에 선물이 정말 기쁜 복음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 인간들이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내어놓은 이 세상에 모든 해결책을 남편에 이야기로부터 이렇게 끌어내셔서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을 예배하는 행위로 결론을 지으시면서 죄인들에 잘못된 해갈에 변이를 폭로하신 거에요

 

25절 보죠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하였다. 여자는 이제 자신의 정체가 낱낱이 폭로가 되어지고 자신에게 필요한 생수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아닌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주님께서 이제는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실체라 그랬죠 그 뜻은 알레떼이아 신령과 진정으로 실체로 예배를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자 그 여인은 주님께 그건 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시면 우리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겁니다. 라고 대답을 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내가 그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게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에 전부에요 그런데 그 여인이 갑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메시아를 전하러 달려갔어요 주님께서 그 여인앞에서 무슨 기적을 보여주셨습니까? 무슨 깜짝 쇼를 하셨나요 대단한 철학과 논리를 동원해서 복음을 설명하셨습니까 주님은 그저 그 여인에 죄인됨을 폭로하시고 그러한 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수가 필요하다는 간단한 복음만을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그 여인은 자기 육신에 목마름을 채워줄 유일한 도구요 수단인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사막에서 중동에서 물동이는 가장 큰 재산이였단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라고 외치면서 동네로 뛰어 갔어요 마치 26절과 그 여인이 동네로 뛰어가는 27절 사이에 많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럴때 우리가 자주 쓰는 해결책이 있죠 이 요한복음이라는 책을 가장 처음 받아서 읽었던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것을 당시에 관습과 그들에 사고에 틀 등을 대입해서 풀어보면 되겠죠 그들은 분명 이해했을 거니까 우리가 그때 당시에 관습이나 그들에 사고에 틀 같은걸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렇게 굉장히 어색하게 보여지는 거죠

 

26절을 보시면 내가 그다라는 어구가 있어요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이 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내가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에요 주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밝힌 곳이죠 그 어구를 헬라어로 보면 에고 이에미에요 영어로는 그냥 아이 엠 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죠 아이엠 후 아이 엠 하느님께서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당신에 이름이에요 주님은 지금 하느님에 이름으로 당신을 지칭하고 계시는 거에요 요한복음에는 주님께서 당신을 가리켜서 아이 엠 이라고 직접 지칭하신 곳이 여러 곳 있어요

요한복음 824절 보세요 24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나인줄 믿지 아니하면 이라고 이렇게 경고를 하시면서 자기의 이름을 에고 에이미 아이엠 이라고 알려 주시는 거에요 내가 그인줄 이게 아이엠이에요 에고 에이미

828절 보세요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여기도 역시 에고 에이미에요 내가 바로 하느님이다라는 뜻이에요

요한복음 830절 보세요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이렇게 에고 에이미라는 주님에 이름이 들려지자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라고 굳이 밝히고 있어요 하느님에 이름에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84-6절 보세요 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5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6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여기서 나다도 그냥 에고 에이미 아이 엠이에요 아이 엠 주님께서 주님을 잡으러온 유다와 군대에게 에고 에이미라고 당신에 이름을 말씀하시자 그 하느님에 이름 앞에 유다와 군대가 나가 떨어졌어요 여기서도 하느님에 이름이 공표가 되자 능력이 나타나죠 하느님에 이름이 드러난 곳에는 마치 그 이름이 무슨 힘이 있는 것처럼 하느님에 능력이 나타나요 고대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요 신에 이름 속에는 그 신에 성품과 속성이 들어있고 그 신이 인간들에게 줄 수 있는 약속이 들어있고 또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파워가 권능이 실제로 들어있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들은 그러한 이유에서 신들이 자신들에 이름을 잘 안가르쳐 준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성경 기자들은 병자가 낫고 표적과 기사가 일어날때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서 주님에 능력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주님에 이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그렇게 기록을 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031절 보세요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보세요 여기도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므로 이름에 무슨 능력이 있는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사도행전 36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이름이 도대체 뭐 길래 앉은뱅이보고 일어나 걸어라 무엇으로 예수에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31616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고대 히브리 사람들에 사고 속에는 신에 이름이 바로 그 성품이며 속성이며 그 신에 약속이며 약속을 이루시는 능력이라는 인식이 있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느님께 내가 하느님에 이름을 무엇이라 말해야 합니까라고 하느님에 이름을 물어본 것은 단순히 그가 하느님에 이름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이제 당신이 나와 내 민족에게 약속을 해주고 능력을 발휘해서 그 약속을 이루어달라라는 부탁이였던거에요 히브리 사람들에 사고와 관습을 알면은 고런 장면들이 왜 도대체 그가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라는 고런 내용들이 이해가 되죠 하느님께서는 성경에 최초에 수신자였던 이스라엘과 초대교회 교인들에 그러한 사고에 틀과 인식을 바탕으로 하느님에 이름이 선포되어지는 곳에서 실제로 하느님에 능력이 보여지는 사건을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신 것이죠

따라서 요한복음에 최초 수신자였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에 이름이 에고 에이미 내가 그다 라고 선포된 이후에 그 여인이 갑자기 획가닥 변해서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이에요 주님의 이름이 선포된 곳에는 반드시 주님에 능력과 약속의 실행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이 성경을 보면서 그 여인이 변화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이름에 능력이였다 하느님께서 하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예수님에 이름이 에고 에이미로 밝혀지고 그 여인이 변화를 받아 전도자가 된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그 하느님에 이름에 의해 다른 말로 하느님에 약속과 능력으로 그 여인이 구원을 받아서 거듭나게 된 것이다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러한 성경에 최초에 수신자들에 관습과 사고방식에 대한 배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성경에 해석이 용이하지 않은 부분들이 더러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직 하느님에 약속과 하느님에 능력에 의해서 그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았어요

사마리아 여인은 구원이 뭔지도 몰랐고 메시아가 누군지도 몰랐고 요구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주님이 불원천리 사마리아까지 머스트 가야만 했다라고 이야기하시면서 가신 것입니다 고단하게 가셔서 그에게 은혜를 쏟아 부으신 거죠 니고데모와 완전히 상반되는 조건을 가진 그 삶 그 여인에게 주님께서 찾아가셔서 하느님에 은혜를 선물로 부어주시는 거에요 그렇게 오직 하느님에 약속과 능력에 의해서 그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는 장면에서 우리는 복음에 의한 최초에 회심자가 나오는 그러한 장면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여인은 지금까지 그녀가 관심있었던 이 세상에 물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인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 복음을 전하러 마을로 달려가요

 

요한이 굳이 이 여자가 물동이를 버린것을 기록을 했을땐 무슨 이유가 있을거 아니에요? 그 동안 자신이 이 세상에 중심이 되어 살아야 한다라는 그러한 강박관념에 의해서 자신에 과거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현재에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서 남에 눈을 피해 대낮에 물을 길러 나와야 했던 그녀에게 성령이 임하자 주님에 은혜가 임하자 그녀에게서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없어 졌어요 자신에 그 부끄러움은 메시아가 다 지고가셨다라는 확고한 복음에 말씀이 그 속에 심겨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에 자리에 앉아 있다가 하느님께 순종하는 피조물에 자리로 내려온 구원 얻은 성도들은 자신에 처지로 인해 부끄러워 하지 않아요. 우리가 자꾸 우리에 상황을 부끄러워하고 내 외모를 부끄러워하고 내 가난을 부끄러워하고 하는 것은 여전히 그 사람이 이 우주에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기대한 만큼 내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가난한게 왜 부끄럽죠 내가 못배운게 왜 부끄럽습니까

은연중에 내가 도달해야 할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더 높은 곳이였는데 내가 아직 거기에 못 올랐다라는 분노가 그러한 부끄러움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여인에게 복음이 들어가자 부끄러움이 없어졌어요 물동이 던져두고 자기가 피해 다녔던 그 사람들에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너무 소중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해줄 너무 소중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복음을 은혜를 받은 자들은 자신에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스스로에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쌓아두었던 이 세상에 힘과 가치들을 초개처럼 여길 수 있게 되는 거에요

 

엘리사가 하느님에 부르심을 받았을때 소와 쟁기를 버려두고 따랐다 그러죠 당시에 소와 쟁기는 그 당시 사람들에 생계에 수단이였어요 목숨이였단 말입니다 하느님에 부르심을 받자 자기에 생명을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에 부르심을 받았을때 어부들은 그물을 세리는 세리에 책상을 버려두고 따랐다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그러한 재산과 힘을 한꺼번에 놓아 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에 힘만이 가능케 하는 것이라구요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모든 재산을 다 버립시다 그렇게 요구하는게 아니에요 적어도 그러한 세상에 힘에 지배당하면서 살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에요 복음을 이해한 사람들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느님 나라에 소망보다 더 가치있게 여기지 않아요 그러니까 주님은 그러한 세상의 힘을 자꾸 놓으면서 왜 그 세상에 힘은 너무 달콤하고 너무 매력적이라 내가 하느님나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는데 방해가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자꾸 이 세상것들을 놓고 너희들이 거듭났으면 하늘을 바라보고 위에 것을 찾으라하고 요구한다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된게 오늘날은 뭐 건축헌금을 얼마를 하고 혹은 뭐 교무금 얼마를 하면 하느님께서 오병이어에 기적을 오늘날도 발휘하셔서 튀겨주신다 이렇게 가르친다 말입니다 그런건 없어요 여러분이 헌금을 하면 헌금 한 만큼 손해입니다. 헌금을 하고 그 헌금한 만큼 하느님께 뭔가 반대급부를 누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아닌 거에요 도둑놈이죠 그건요

 

마태복음 1344-46절을 보세요 44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소유를 다 팔아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자기에 모든 소유를 다 잃는다 해도 그 천국 희망을 절대 놓지 않아요 그래서 하느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너 정말 그러니, 너 정말 성도 맞어, 라고 테스트를 하기도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께서 건강도 재산도 가정에 행복까지도 이렇게 걷어가 버리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보이므로 해서 자신이 하느님에 자녀임을 하느님과 세상 앞에 입증해 내는 거에요 계속해서30-34절을 보세요 31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33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은 마을 사람들이 주님께로 몰려오고 있었어요 그 와중에 주님에 제자들이 양식을 갖고 도착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음식을 드리면서 선생님 드세요라고 권했어요 그때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했던 똑같은 뉘양스에 말씀을 하시죠 제자들이 육신에 굶주림을 해결해 줄 음식을 갖다 드리고 드십시오 했더니 주님은 그러한 세상에 음식이 아닌 다른 음식이에 대해서 말씀을 하세요

 

마치 이 땅에 생수를 찾던 여인에게 영원한 생수를 말씀하시듯 이 땅에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양식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주님은 당신에 양식은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에 뜻을 행하는 것이고 그 분에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명확하게 그리스도인에 양식에 관해서 정의를 해주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행하실 하느님에 뜻은 무얼까요 요한복음 6장에 나오죠 38-40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우리 주님에 양식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살려 내라고 하신 그분에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을 완수하시는 거였어요 그 일은 어디서 온전히 이루어졌죠 테텔레스 타이 다 이루었다여기에서 온전하게 라는 말과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 타이와 똑같은 단어에요 그 일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죠 그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루실 하느님에 뜻은 십자가를 지시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양식이 될 수 있을까요 

양식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역할을 하는 거라 그랬어요 그게 어떻게 양식이 될 수 있었을까요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 정말 주님께 힘이 되는 양식이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아버지 하느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성자 하느님이시죠, 주님은 그 성부하느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분이 시키시는 것은 모두 옳으며 선한 것이다라는 것을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그분이 시키신 일을 하는 것은 선하고 옳은 일이라라는 확신이 있으셨기 때문에 비록 그분에 명령이 십자가였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는 그게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절 보세요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주님은 완성자이시다 그래요 여기 텔레이오테스라는 단어도 역시 테텔레스 타이에 파생이에요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에 말씀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셨다래는 거에요 그게 양식이였다래는 거에요 그게 아주 힘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에 양식은 이 세상에 힘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짜 함이 되는 것은 하느님에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에요 하느님은 당신에 백성들이 정말 하느님에 말씀을 따르는 것을 양식으로 삼고 사는 지를 때때로 또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 삶이 이렇게 고단한 거에요 증거를 대드리죠

신명기 82절 보세요 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야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하느님에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야 하는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실려고 광야에서 시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정말 이 세상에 양식이 아닌 하느님에 말씀만으로 힘을 얻고 행복해 하고 기뻐하실 수 있는 성도인지 확인하실 수 있는 절호에 기회라고 생각을 하시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고지 꼭데기에 올라가야 된다라는 이런 고지론은 완전히 성경과는 반대되는 논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고 고지 꼭데기에 올라가는게 아니에요 우리가 고지 꼭데기에 올라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야 예수 믿으니까 이렇게 된다 그러니까 봐 날 보고 너희들도 예수를 믿어하면 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예수는 내가 원하는건 모든지 그냥 내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 그런 엉터리 무당 잡교가 전달되어지는 것이지 복음이 전달되어지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예수가 어디 있어요?

주님은 우리에게 끝없이 너희는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라고 이야기하신다니깐요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그러나 담대하라 끝까지 이겨라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끝까지 이기라는건 끝까지 우리가 싸워야 할 뭔가가 있다라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 소원성취 이런 말이 어디서 나온 거에요 도대체.

형통이라는 말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딱 한번 나와요 요셉이 어떻게 됐을때 형통했다 그래요 감옥에 갔을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해서 도망갔는데 하느님에 말씀을 지켰는데 그래 내 자식 잘했다 옛다 총리되라 그때 총리 안시켜주고 감옥에 넣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삶을 형통이라고 이야기한다니깐요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라는건 하느님이 하느님의 자식을 만들어 내기위해 함께 하시면서 때로는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으면서 그 아들이 다른 곳으로 못가게 요렇게 몰아가시는 그걸 형통이라고 하는 것이지 내 소원이 다 이루어지는 걸 형통이라고 하지 않는다니깐요 우리 이 추악한 인간에 소원이 다 이루어지면 이 세상은 이건 다 지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그런 기독교가 어디서 생긴 거에요 도대체,

 

자 주님은 그렇게 당신에 양식에 관해서 말씀하신 후에 히브리 잠언을 사용하셔서 속담이죠 제자들에게 인박한 종말을 알리시고 그들을 주님에 동역자로 부르세요 요한복음 4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른다라는 어구는 히브리 잠언이에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백성들을 추수하는 일에 긴급함과 긴박성을 알리시기 위해서 히브리 잠언을 사용하셔서 이 세상에 추수와 영적 추수를 비교하시는 거에요 주님께서 하느님에 백성들에 구원을 추수로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이 여러곳 있는데 한 두군데만 찾아드리죠

마태복음 311-12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지금 상황을 잘 그려 보세요 사마리아 여인이 마을에 가서 메시아가 왔다라고 복음을 전했어요 그러니까 마을사람들이 주님께로 막 몰려갔습니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30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예수께로 막 왔어요 그러한 광경속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보리밭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왔다 잠언에는 추수할 때가 넉달이 지나야 된다라고 하는데 지금 추수할 때가 왔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추수 대상이 누구에요 추수에 대한 이방인인 사마리아 인인 거죠. 선민이라 자처하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에 길이 활짝 열렸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2절에 세상의 구원자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거에요 코스모스 주님은 유대인들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에게 열려진 구원에 완성자시라는 거에요 그런데 36절 이하를 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추수꾼으로 부르세요 제자들은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에 말씀을 이 세상 적인 것으로 받아드렸던 그러한 사람들이에요 주님께서 영에 양식을 말씀하시는데 누가 선생님께 먹을 걸 갖다 드렸냐라고 이렇게 갸우뚱하던 사람들이였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미련한 제자들을 추수꾼으로 부르신다구요

본문 36-38절 보세요 36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37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36절을 보시면 거두는 자들이 나오는데 그 거두는 자들이 이미 삯을 받았다라고 나오죠 그게 무슨 뜻이에요 원래 인부에 삯은 일이 끝난 후에 주는 거죠 그런데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삯을 주었다라고 그래요 그 말은 거두는 일이 이제 추수하는 일이 너무 긴급한 상황에 이르렀기에 미리 삯을 주어야 할 정도로 긴박해졌다 라는 뜻인 거에요 그런데 36절을 보시면 뿌리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그러죠 누구에요 당연히 예수님이죠 거두는 자들은 제자들을 비롯한 하느님에 백성들에요 왜 주님께서 심어 놓으시고 아무 자격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거두라고 하실까요 그 이유가 36절에 나오는 거에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 하게 하려고 그게 유일한 이유입니다.

주님이 다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왜 추수에 동참하라 말씀하시냐하면 우리 기쁘게 해줄라구요 주님은 당신께서 뿌려 놓은 씨에 열매를 당신에 백성들에게 거두게 하세요 그 이유는 주님과 주님에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에요 그러니까 선교나 전도는 우리에 노력과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뿌려놓으신 알곡들을 거져 주어 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통해 기쁨을 얻어요 그렇게 주님에 말씀을 따라 행함으로 우리에게 오는 기쁨은 가히 우리에 양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복음을 전하다 보면 육신적으로는 참 힘이 드는데도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있어요 기쁘지 않으세요, 여러분이 복음을 전했는데 전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해요 그런데 간혹 어떤 사람들이 전혀 기대치 않았던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와 당신이 그때 나에게 전해준 그 복음에 말씀이 내 가슴을 후벼파서 많은 고민끝에 나는 이제 예수를 믿기로 했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너무 너무 너무 기쁘고 감사하지 않아요?

하느님에 말씀을 쫓아 나를 활활 불태워 버릴 때에 우리에게 오는 그 만족감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게 내 양식이고 그게 너희 기쁨이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거둠에 기쁨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인지가 37절과 38절에 나와요 저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 이야기 중에서 이 구절이 가장 핵심적인 요절이라고 생각을 해요 37절에 보면 주님께서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고 말씀을 하세요 이 말씀은 주님께서 자신을 당신에 백성들 대신에 저주받은 자 저주받을 자라는 것을 인정하시는 구절에요 이 구절은 신명기에서 인용된 거거든요

신명기 203-8절 보세요 3 그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가 오늘 적과 싸울 때가 다가왔다. 너희 마음을 약하게 가지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라. 당황하지도 말고 그들 앞에서 떨지도 마라. 4 주 너희 하느님은 너희를 위하여 적들과 싸우시러 너희와 함께 나아가셔서, 너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5 그다음에 군관들이 백성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새 집을 짓고서 아직 봉헌하지 못한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가 싸우다 죽어서, 다른 사람이 그 집을 봉헌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6 또 포도밭을 가꾸어 놓고서 아직 그 열매를 맛보지 못한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가 싸우다 죽어서, 다른 사람이 그 열매를 맛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7 또 여자와 약혼하고서 아직 그 여자를 맞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가 싸우다 죽어서, 다른 사람이 그 여자를 맞아들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8 군관들은 백성에게 다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런 자가 형제들의 마음을 제 마음처럼 녹아내리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자 오늘 본문하고 요 신명기에 이야기를 한번 비교해 보자구요 이 저주가 누구한테 내린 거에요 심는 자는 예수 한사람이였는데 다른 이들이 거두게 된 이 저주가 누구에게 떨어진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그 저주에 자리에 예수께서 서신 거에요 그래서 그분이 심고 다른 이가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우리에 부끄러움이 되셔서 벌거벗겨 져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의에 흰옷을 입혀 주셨어요 그 저주에 자리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 그 저주에 자리로 가셔서 당신이 하시는 일에 열매를 당신이 안거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을 받은 거에요 여러분 그걸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 이야기를 통해서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되셔서 잔치를 잔치답게 회복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에 그 피에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에요 이 요한복음에 그 표적에 책 2장에서 12장까지에 이 표적의 책이 표적 오해 강해 구조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뭐에 대한 강해에요 첫번째 표적 혼인잔치집에 떨어진 포도주를 만드신 그 기적 거기에 대한 강해로 주어진게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에 구원은 인간측에서의 어떤 시도나 노력 인간에 잘남 이런 것을 근거로 되어진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보혈과 그 분에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렇게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은혜 아래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그 감격과 기쁨을 그걸 그냥 얻어 먹고 사는 피조물인 하느님에 은혜가 떠나 버리면 티끌에 불과한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존재가 하느님을 하느님에 자리에서 화이어 시키고 그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이렇게들 기고 만장하는 거에요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성당 안에서도 하느님은 나를 도와주는 서번트 슬레이브에 불과한 거에요 종이에요 종.

아니 당신에 뜻을 난 모르겠으니까 내가 원하는걸 이루어 달래니까 하느님은 그 창조주에 자리 절대 상위권자에 그 자리를 나에게 다시 내달라고 우리에게 지금 신앙생활을 허락하시는 거에요 너희들 그 자리에 앉아 있어봐야 너희들에 영과 육은 가면 갈수록 피패하게 돼 그게 요한묵시록에 불 못인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절대 상위권자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니들이 거기에 앉게 되면은 너희들은 결국은 이 땅에서도 불못같은 삶을 살다가 결국은 불못으로 떨어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려와 내 말을 들으라니까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그러면 먹지 말아 그 자리에 있을때 너희들은 왕이요 제사장이요 예언자로 나와 화목한 관계를 이루면서 살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 이 인격과 오성에다가 내가 설명해 줄테니까 너희들 이제 다시는 내가 너희를 하느님에 형상으로 내 벗으로 창조해 놓지 않았니 그 인격과 오성을 갖고 이제 다시는 내가 세워놓은 그 질서를 깨고 들어오지 말아 라고 우리에게 지금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거 배우고 가는 거에요 이 땅은 언젠가 다 확 불살라지고 새하늘과 새땅이 내려올텐데 왜 여기다가 자꾸 아방궁을 지어달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까 마지막으로 40절 이하를 보시면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데 그들이 모두 예수님에 말씀을 듣고 돌아오게 되었다라는 구절이 나와요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예수에 말씀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보세요 하느님에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오는데에 전도자에 지혜나 전도자에 언변이나 전도자에 학식이 도움이 된다고 하나요? 예수님에 말씀을 친히 듣고 돌아온다 그러죠 그러니까 결국 설교가 하느님에 말씀이 아닌 신부나 교사에 설득이나 권고가 되면요 사람은 감동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에 백성으로 돌아올 수는 없게 되는 거에요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고 요즘 세상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사람들을 웃겨주지만 요즘은 사람들 하느님에 백성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죄인이 그 죄인에 자리에서 하느님에 백성으로 돌아올 때는 오직 하느님에 말씀만이 유효해요

그러니까 신부님이나 교사의 설교는 예화에 나열이나 재미있는 코믹한 이야기나 이런 것으로 점철이 되면 안되는 거에요 듣는 사람 재미있죠, 그럴거면 차라리 게그 콘서트 비디오를 빌려다 보시라니깐요 주몽을 빌려다 보시던지 아니면 도올 김용옥 교수에 도덕강연을 들으시던지 그도 저도 아니면 국민학교 도덕책 있죠 거기에 다 나와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이 강론대에서 선포되어져야 하는 것은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만 선포되어져야 되는 거에요 지루할지라

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 할지라도 그 하느님에 말씀만을 풀어서 전달해주는 거에요 그러면 이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되어 이 말씀 자체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그에 영과 혼과 골수를 쪼개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짜 하느님에 말씀에 능력으로 주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인 거에요

그러니까 성당에 와서 뭐 여러분 너무 감동 받을라고 하지 마세요. 하느님에 말씀에 의해 진짜 감동을 받으셔야죠 진짜 감동을 자 우리는 그 하느님에 은혜 앞에 부복하며 나를 위해서만 살던 그 이기적인 삶에서 돌이켜서 주님에 말씀을 지키며 살기로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삶을 살다 보면 거기에서 오는 영에 양식과 즐거움이 우리를 강권하여 계속해서 그러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거에요

그런데 그런 시도들을 안해 보고 야 그 어려운 삶을 어떻게 살어 하니까 뭐 개뿔이나 하늘에 그 풍성함을 맛봤어야 계속 살고 싶지, 해보지도 않고 그냥 그거는 어떤 특별한 위인들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 나름대로의 위인전을 만들어 놓고 그 사람은 뭔가 특별해서 하는 것이고 나는 절대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고렇게 게으름을 부린다니깐요

하느님에 말씀을 따라서 살아보십시오 거기서 오는 행복과 기쁨을 맛보셔야 된대니깐요 그래야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을 소망할 수 있는 거에요 먹어보지 않은걸 어떻게 먹고 싶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이 땅에서 먹어봐야 아이고 이게 이렇게 맛있는건데 왜 이렇게 조금밖에 안줘 저 하늘나라 가면 이걸 온전한 걸 먹을 수 있단 말이야라고 그 나라를 소망할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맛도 못보고 그게 뭔 맛인줄 알고 그걸 원하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를 믿고 목숨을 걸겠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에게 죽음이 닥치면 가기 싫다고 덜덜덜덜 떠는 것입니다 아니 이 땅은 환란과 고난과 슬픔과 눈물과 탄식이 있는 곳이라면서요 그거 우리가 이 땅을 벗어나 갈 하느님 나라는 이게 전부 없는 곳이라면서요

 

그러면 그곳으로 하느님이 얼른 졸업시켜 주겠다고 오라고 하면 감사합니다 하느님 벌써 제 졸업학점이 체워졌나요 하고 가야 될거아니에요 그런데 저마다 왜 그렇게 죽기 싫어갖고 똥오줌 다 싸고 그렇게 죽죠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모르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이걸 안믿는 거에요 그러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을 막 부러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니까 하느님 나라가 별로 안가고 싶은 거에요 그 하느님과 지금도 나는 별로 안친해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면은 그 하느님이 너무 보고싶어요가 아니라 거기에 하느님이 있던 말던 그냥 내가 원하는 금으로 된 집 다이아몬드로된 길 이런거 응 팹시콜라인지 펄시콜렌지 그 인간이 하여튼 그 천국에 모형을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는데 고런거만 원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까지도 기복신앙에 빠져있는 자들이지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하느님이 있던 말던 난 아이돈케어 그냥 내가 좋아하는 뭔가가 어떤 환경이 있었으면 하고 가고 싶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배우는 거에요 그분에 사랑을 배우는 거에요 그래 나는 그분에 사랑과 은혜가 없으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자구나 그냥 확고히 깨닫고 오매불망 그분을 만날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에 신앙생활이여야 되는 거에요 엉뚱하게 딴거 쫓아다니지 마시고 여전히 그냥 자기 물동이 꼭 껴앉고 이거 버리면 마치 죽을것처럼, 이걸 버려야 나가서 하느님에 뜻대로 살 수 있을거 아닙니까? 버려야 뛰지 이걸 들고 어떻게 뛰어요 여러분들이 하느님 이외에 여러분들에 힘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그 많은 것들 하나하나 쳐내 가면서 오직 그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과 행복 만족 그것을 좀 맛보시기 바랍니다.

 

하루빨리 코로나-19 퇴치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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