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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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곱의 도망[5]/야곱[3]/창세기 성조사[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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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20-03-16 ㅣ No.13680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5. 야곱의 도망  

 

야곱이 아버지께 받은 그 축복받은 형 에사우에게 내린 거다. 내용도 사실 형에게 내려준 거나 다름없다 여겨진다. 그렇지만 그것도 축복이다. 아무튼 축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말이다. 번지수가 잘못된 그 축복으로 야곱은 정처 없이 외가로 떠나야 했다. 분노에 찬 형의 눈에만 나타나지 않는 것이면 그래도 생명엔 그리 큰 문제가 없으리라. 아마도 어머니 레베카고 그녀의 오빠 라반에게 둘째를 잘 챙겨달라고 신신당부까지 했을 게다. 형이 거기까지 쫓아와 해코지는 하지 않으리라 다들 여겼으리라.

 

이제 야곱은 아버지께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날 채비를 서둘러야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 이사악의 의견도 참으로 중요하다. 만에 하나 아버지가 거기에 가지 말라면 다 끝이다. 그래서 레베카는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야 할 명분을 사전 귀띔으로 이사악에게 해 놓아야만 했다. 레베카가 이사악에게 말하였다. “나는 히타이트 여자들 때문에 살기가 싫어졌어요. 만일 야곱마저 이 땅에 사는 저런 히타이트 여자들 가운데에서 아내를 맞아들인다면, 내가 어찌 살겠습니까?”

 

야곱에게 한 내용과는 좀 동떨어진 내용이다. 맏이가 데려온 히타이트 여자들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에사우에 대한 이사악의 사랑에 대한 불만을 심하게 나타내고자, 며느리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히타이트 여자들이라면서 다소 강한 톤의 표현이다. ‘에사우의 아내들이란 중간 정도도 아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씩이나 들어와 심기가 불편하게 해 아예 살기조차 싫단다. 그 정도로 남편 이사악에게 에사우가 데려온 며느리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좀 과장해서 강하게 전달하여 기억에 심어준다.

 

이 마당에 둘째 야곱조차 저런 히타이트 여자를 집에 데려온다면 이는 정말 낭패라면서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해 보자는 투다. 어쩌면 이사악을 그리 크게 자극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보겠다는 사전 공작이다. 야곱의 원만한 피신을 이루어보겠다는 지혜의 사전 점검이다. 어쩌면 이는 집안 내력으로도 수긍이 가는 면이 다분하다. 이는 시아버지인 아브라함의 강한 의지와도 일치한다. 자신이 이곳에 시집온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에사우는 이미 아내로 히타이트 여자를 들여다 놓았다. 그게 이미 레베카는 물론 이사악에게도 근심거리였다(26,35). 이 지경에 야곱 녀석도 미친 척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면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일종의 엄포를 깔아 두는 것 같다. 참 지혜로운 발상이다.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사악도 레베카보다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사악 자신이 레베카를 멀리 떨어져 있는 친족에서 데려왔으니까.

 

그러자 이사악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해 주고 당부하였다. “너는 이곳 가나안 여자들 가운데에서 아내를 절대 맞아들이지 마라. 일어나 파딴 아람에 있는 네 외할아버지 집에 가서, 그곳의 외숙 라반의 딸들 가운데에서 아내를 맞아들여라. 하느님께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어, 네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게 하시며, 네가 민족들의 무리가 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너와 네 후손에게 내리시어,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땅을 네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 이사악은 둘째를 불러놓고 아예 훈계조다. 축복 주고 나서 주는 덕담이 아닌 명령인 하지마라이다. 흡사 십계명마냥 금지 명령 1호인 것 같다. ‘가나안 여자들 가운데에서 아내를 절대 맞아들이지 마라.’ 사실 이는 아브라함 아버지부터 내려온 가풍이나 다름없다(24,2-4 참조). 이는 마치 네 어머니도 네 할아버지 뜻에 따라 이곳 가나안이 아닌, 저 먼 하란에서 여기 시집온 줄을 너는 모르느냐?’라며 아주 단호한 뜻이 담긴 말이다.

 

그러면서 친족들 가운데에 좋은 배필 만나면, 하느님께서 복을 주시어, 자식 농사 잘 짓고 후손도 많이 주실 것도 덧붙인다. 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주신 복이 너와 네 후손에게 내리고,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가진 이 땅을 야곱 네가 차지하게 될 것이란다. 사실 이 내용이 이사악이 아들 야곱에게 내려 준, 진짜 축복 중의 축복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야곱이 에사우 이름으로 받은 축복(27,27-29)은 가짜 축복일 수도.

 

이렇게 하여 처음으로 하느님의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또 이사악에게, 이어서 야곱에게까지 내려지는 흐름을 보는 것 같다. 이 야곱에 대한 이사악의 축복(28,1-4)으로 하느님의 정체성을 나타낼 때 흔히 표현하는 말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세분의 이름으로 최초 공론화되는 것은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한 말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50,24). 이를 하느님께서 손수 당신 자신이 저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처음으로 당신 정체성을 언급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야곱이 파딴 아람에 있는 외할아버지 브투엘 댁으로 도망가야 하는 이유는 보는 시각에 따라 좀 다르다. 레베카는 에사우의 원한 때문이라지만, 이사악은 결혼 상대자를 친족 가운데에서 맞아들이기 위함이란다. 아무튼 그래도 야곱은 축복다운 축복을 받아, 후세에 하느님의 정체성을 나타낼 때 그의 이름도 함께 거론될 것이다. 이로써 이사악과 레베카의 이야기는 사실상 더 거론되지 않는다. 야곱과 레베카의 만남도 없다. 이렇게 이사악과 레베카는 야곱을 떠나보낸다.

 

앙심을 품은 형을 피해 일단은 안전한 곳인 외삼촌 집으로 피신도 겸해 도망을 가는 거다. 이로써 야곱의 이야기는 끝나는 것 같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떠나온 본고장으로 쫓겨간 그곳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펼쳐진다. 이제 이사악과 레베카의 이야기는 아들 야곱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창세기 성조사 이야기의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진다.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파딴 아람에 있는 라반 외삼촌을 만나러 출발한다. [계속]

 

[참조] : 이어서 '6. 에사우와 이스마엘 딸의 결혼‘/야곱[3]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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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호렙산,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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