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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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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0-03-17 ㅣ No.136824

 

오늘 복음 이야기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리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께서 확답을 주시지 않고 비유로 대답을 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실제 용서를 횟수라는 관점에서 질문을 했습니다. 근데 이런 질문을 했으니 예수님께서도 질문에 맞게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존재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게 가장 큰 뜻일 거라고 봅니다. 그다음으로 의미하는 게 용서에는 횟수라는 개념이 없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독서와 연관해서 묵상을 하게 되면 형제와 어떤 반목이 있어 서로 화목하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제사는 그 제사가 아무리 희생제사라고 해도 하느님께서는 그 제사가 오히려 역겨운 제사가 된다는 걸 알려주십니다. 그럼 복음 속으로 여행을 한번 떠나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여쭤봅니다.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하는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해야 하느냐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 일곱 번까지라고 한계를 설정한 것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 정도까지 하면 더는 더 이상 용서를 할 수가 없는 한계이지 않을까 하는 뜻에서 아마 자신은 일곱 번까지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비유 하나를 말씀드립니다.

 

만 탈렌트 빚진 종과 백 데나리온을 빚진 종, 즉 두 종의 비유를 통해 용서를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말씀을 하십니다. 이 비유에서는 횟수를 언급하시지 않지만 잘 이해를 하면 그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천상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런 비유를 할 수가 있을까 싶습니다.

 

만 탈렌를 빚진 종이 임금에게 자신의 빚을 탕감 받고 나서 자신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에게 빚을 갚으라고 윽박을 지릅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소연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걸 보고 동료들이 안타까운 나머지 이런 사실을 임금에게 죄다 알렸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짓이 얼마나 잘못되고 밉상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으면 남의 사생활임에도 그걸 죄다 주인에게 고자질을 했겠습니까?

 

주인은 이런 사실을 듣고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 올랐을 겁니다. 그래서 종을 불러 말을 합니다. 첫마디가 바로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화가 난 나머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고 복음은 말을 합니다.

 

이 대목에서 이 악한 종은 저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백 데나리온을 빚진 종은 바로 우리의 이웃이나 형제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화폐가치로 비교한다면 만 탈렌트는 수조에 해당하는 빚입니다. 이 빚만큼의 죄를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존재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주위 사람이 설령 우리에게 잘못을 했다고 해도 그 죄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죄의 용서에 비하면 그건 어쩌면 상대적으로 봤을 때 죄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경미한 내용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이런 엄청난 대역죄인인 너에게 그런 자비를 베풀었는데 어찌 너는 그런 보잘것없는 것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는가에 대해 화가 나셨던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고 했잖습니까? 어마어마한 그 돈을 어찌 다 갚겠습니까? 결과로 봐서는 정말 어리석은 종입니다. 어리석어도 너무나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주 자그마한 자비를 베풀지 않음으로 해서 자신이 평생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이 사람을 바라보듯이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이 복음을 묵상할 때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우리가 엄청 용서를 받은 죄인임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 잘못한 타인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의 존재가 마찬가지로 악한 종과 같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 비유에서 악한 종이 용서를 받은 것과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과의 격차를 생각하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시한 한계치의 열한 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이 비유를 보면 거의 용서에 대한 횟수를 정할 수가 없다는 그런 결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비유가 들려주고자 하는 핵심일 겁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35절을 보면 용서는 마음으로부터 해야 한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입으로가 아닌 마음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뜨끔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설령 누군가 용서를 한다고 한다면 그래, ‘용서할게라며 입으로 하는 용서를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마음으로는 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엄밀하게 따지면 마음은 용서가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하실 겁니다. 지금부터 왜 그런지 한번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마치 평생 하느님을 알았다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삶의 여정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제사가 비근한 예로 우리가 말하는 미사입니다. 이 미사의 의미를 잘 한번 생각해보면 이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미사를 다른 표현으로 이야기하면 미사성제라고 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강생하셔서 저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 제사로써 당신 구원의 신비인 파스카 신비에 동참하는 것이며 이 신비의 삶 속에서 당신을 기억하며 살겠다고 하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신앙고백을 하는 제사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게 예수님께서는 형제간 화목을 제1순위에 두시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523절 이하를 보면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고 하신 말씀을 보시면 형제와 벌목한 상태에서 바치는 제사는 의미가 없다는 걸 의미합니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 예언서에서 아자르야는 말합니다. 불 한가운데서 우뚝 서서 입을 열어 기도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시어 저희를 끝까지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께서 저희를 축복하시겠다는 그 계약을 폐기하지 마시옵기를바라며 지금 당신께 드릴 예물도 분향도 없다고 합니다.

 

당신께 바칠 예물이라고는 부서진 영혼과 겸손한 정신밖에 없다고 하면서 이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당신께 드리는 희생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해 주시옵기를 탄원하며 기도를 올리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이때 하느님의 자비도 청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말을 합니다. 111절 이하를 개략적으로 보시게 되면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번제물도 싫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고 하십니다.

 

15절 이하를 보면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신앙은 하느님께 드리는 경건한 제사에 자신의 마음을 평생 오롯이 내어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제사가 유효한 제사가 되려면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경건을 잃어서는 안 될 겁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분향과 제물이 제대로 된 예물이 되려면 남을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악한 종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자비를 입은 죄인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때 제일 먼저 필요한 게 진정한 참회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참회는 하느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행위이며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기쁜 마음으로 하나 되며 그분 안에 녹아들기를 갈망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그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게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존재임에도 용서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이때 진정 우리는 오늘 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처럼 자기의 형제를 진심으로 입으로가 아니고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이러기 위해서는 진정한 참회가 선행되어야 가능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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