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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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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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20-06-02 ㅣ No.138679

학교에서 방정식을 배울 때입니다. 1차 방정식은 답이 하나입니다. 그러나 차수가 올라가면 답이 여럿이 됩니다. 2차 방정식은 2개의 답, 3차 방정식은 3개의 답이 되고 N차 방정식은 답이 N개가 됩니다. 여러 개의 답은 1차 방정식의 눈으로 보면 틀린 것 같지만 N차 방적식의 눈으로 보면 1개의 답은 없습니다. 동양의 사상도 인간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으며, 서양의 사상도 인간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다를 수 있지만, 서로 틀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중용(中庸)에서 중은 희로애락이 발현되기 전의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쁨과 슬픔의 중간이 아닙니다. 분노와 즐거움의 중간이 아닙니다. 중은 가운데나 평균이 아닙니다. 모든 감정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중은 천하의 근본이 됩니다. 영성신학에서도 중용(Indiferentia)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 중용입니다. 이 역시 희로애락의 감정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영적인 길입니다. 중용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넘어서는 도를 찾으며 그 과정을 화()라고 합니다. 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신독(愼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신독을 통해서 중용에 이르면 하늘의 기운을 얻고, 도를 찾아 화에 이르면 땅의 기운을 얻습니다. 하늘은 시간의 영역입니다. 땅은 공간의 영역입니다. 그러기에 중용에 이르면 하늘과 땅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늘과 땅은 자연재해를 통해서 변화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내가 중용의 삶을 산다면 자연재해 앞에서도 내 삶의 가치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중용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이 조화롭다고 해도 내가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능력과 재능은 인간이 중용의 삶을 살 때 하늘과 땅을 능히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중용의 삶을 살지 못하면 하늘과 땅에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러한 삶은 중용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도를 통해서 조화를 이루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인의 관습에는 형이 사망을 하면 동생이 형수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7형제가 형들이 먼저 사망해서 형수와 살았다면 부활해서 형수는 누구와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였습니다. 이 또한 고정관념에 갇힌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원칙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애벌레는 2차원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나비가 되면 3차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차원의 삶에서는 전혀 상상 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눈앞의 것만 볼 수 있고, 느린 속도로 기어야 하는 애벌레와 하늘을 마음껏 날 수 있는 나비는 전혀 다른 차원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이야기 하는 부활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 번째 의미는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고통에서 즐거움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는 부활의 의미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기에 불의한 죽음을 당한 이들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의 마카베오기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하는 어머니와 아이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티아티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제사를 거부하고 순교를 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죽음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활의 신앙은 지금 이곳에서의 충실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불신과 편견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민족과 계층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으로 지금 이곳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증언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우리들 또한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뜻을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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