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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생각] ▶ 박원순, 그가 평생 가면을 쓰고 여성을 대해온 ‘위선자’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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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lby00523] 쪽지 캡슐

2020-07-12 ㅣ No.97471

▶ 박원순, 그가 평생 가면을 쓰고 여성을 대해온 ‘위선자’일까요? ◀

 

 

 

▣ 檀紀 4353年 음력 5月 21日 西紀 2020年 7月 10日 금요일

 

💙 저녁 내내 마음이 떨리고 손이 떨려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이글을 씁니다.

 

제가 # 박원순 시장을 처음 만난 게 1989년이니,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시민운동 단체나 부문운동 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는 상황에서, 역사학계에도 시민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실천적 역사 연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일부가 역사문제연구소를 만들었는데, 저도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선배 손에 이끌려 적극 참여하게 됐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그 무렵의 다른 학술단체들과는 달리 창립 직후부터 번듯한 2층 건물을 ‘소유’했고, 연구 자료도 상당량을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그 건물과 도서를 기증한 사람은 역사학자도 아닌 박원순 변호사였습니다. 자기 집을 팔아 연구소 건물을 사 줬고, 자기가 모은 책들을 기증했습니다.

 

그랬으면서도 연구소의 대표나 이사장 같은 자리는 맡지 않았습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 다니다가 제적된 뒤 단국대 사학과에 다시 입학했지만 역사학계와는 별 관계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의 역사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말에 동조하여 선뜻 전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박변호사도 대단하지만 부인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인과 동지적 관계가 아니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처음 봤을 때는 워낙 품이 넓고 스케일이 커서 나이가 꽤 많은 줄 알았습니다. 그 때 나이 고작 30대 중반. 그 나이에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그말고 과연 누가 있을까요?

 

아마 앞으로도 그같은 사람이 다시 나오기는 어려울 겁니다. 역사문제연구소가 자리를 잡은 뒤 그는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를 잇달아 만들었고, ‘시민운동의 대부’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 자신은 ‘소셜 디자이너’를 자처했죠. 혹시 시간이 있는 분들은 임대식 선배가 지은 <박원순이 걷는 길>(2015. 한길사)을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박원순은, 시민운동을 할 때나 시장 일을 할 때나 언제나 행동거지가 정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술도 잘 마시지 않았고, 유머감각도 꽝이었습니다. 허튼 행동이나 허튼 소리를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그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명복을 빌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그가 꾼 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데, 그의 죽음을 어떻게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는 우리 곁에 계속 살아 있어야 합니다. 육신이 안 보이더라도.

 

1993년, ‘서울대 우조교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이라면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겠지만, 당시에는 ‘성희롱’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강간, 강간미수, 준강간, 강제추행만 범죄로 인정되던 때였죠. 당시 서울대 동료 교수 일부는 “피고소인(가해자)이 평소 남녀 가리지 않고 옆에 앉은 사람 허벅지를 주무르는 습관이 있었다”며 ‘성범죄’가 아니라고 두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피해자의 변호를 맡은 박원순 변호사는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6년 만에 승소했습니다.

 

변론서는 당시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일했던 이종걸 변호사가 쓴 걸로 아는데, 그는 박변호사가 “역사에 남을 변론서가 될 테니 정말 잘 써야 한다”고 해서 정말 고심하면서 썼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이 사건 이후 ‘성희롱’이 법적 개념으로 정착했고, 공공과 민간을 막론하고 모든 기관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이 시행되었습니다.

 

작년, 서울 북부지방법원 자리에 서울생활사박물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개관 준비 과정에서 유물 수집과 전시 기획을 도와줬는데, 막상 개관한 뒤에 보니 중요한 전시 주제라고 생각했던 항목이 빠져있었습니다.

 

서울 변두리였던 지역 특성상 ‘종점 동네’ 사람들 얘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버스 차장(안내양) 관련 전시물이 안 보이는 겁니다.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젠더자문관이 “버스 안내양 관련 전시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해서 뺐다는 겁니다.

 

💙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재했던 역사를 지우는 게 ‘왜곡되지 않은 인식’을 심어주는 방법인가? 젠더자문관이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볍게 한 말을 담당자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건 아닌가?

 

공무원으로서는 일단 지적 사항이 있으면 조치할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종의 ‘검열’ 같아서 기분이 씁쓸했습니다.

 

하지만 박시장도 이런 방식이 ‘검열’로 비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젠더자문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서울시의 모든 간행물과 전시물을 젠더감수성 측면에서 재점검하는 걸 보고는 그가 얼마나 세심하게 여성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론을 맡은 이래 박원순보다 더 여성 인권의 신장에 기여한 변호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박원순보다 더 여성의 안전과 권익을 위해 노력한 지자체장도 없었습니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모르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해온 모든 일을 ‘위선’으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퍼붓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 그가 평생 가면을 쓰고 여성을 대해온 ‘위선자’일까요?

 

그가 이 땅의 여성들에게 남긴 모든 것을 다 내다 버려야 하는 걸까요?

 

그저 하염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제3자인 제가 이렇게나 참담한데...

 

그는 1995년 전 재산인 집 두 채를 팔아 시민단체에 기부한 이후, 집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세상에 알렸고,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정착시켰으며,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가 주도하여 만든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등은 우리 사회 시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바쁜 중에도 <국가보안법연구>를 비롯해 수십 권의 책을 썼습니다.

 

변호사로, 저자로, 강연자로, 때로는 사외이사로, 그리고 시장으로 활동하면서 돈을 벌었으나 가족을 챙기지 않고 시민단체들에 기부했습니다. 65세인 그의 재산이라고는 수억 원에 달하는 부채뿐입니다.

 

곧 시장공관을 떠나야 하는 그의 유족들에게는 거처할 곳도 없습니다.

 

박원순이 살아온 일생을 흉내조차 못낼 자들이 그의 일생 전체를 능멸하는 걸 보자니, 어떤 나라 속담이 떠오릅니다.

 

“상처 입은 사자가 죽으면 들쥐떼가 달려들어 그 상처를 물어뜯는다.”

 

그가 두 여성(아내와 딸)에게 가볍지 않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압니다. 그가 한 여성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나머지 모든 여성이, 그만한 '남자사람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원순을 빼고, 한국 현대 여성사를 쓸 수는 없을 겁니다. 넘치는 반인간성에 질려, 당분간 SNS를 쉽니다.

 

당분간 SNS를 쉬겠다고 했는데, 어이없는 뉴스기사들 때문에 한마디만 더 합니다.

 

아래 글에서 '남자사람친구'는 '노동자의 벗'이나 '서민의 벗'과 같은 은유로, 박원순만큼 여성의 권익과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실질적 성과를 거둔 변호사, 시민운동가, 행정가를 다시 보긴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로 쓴 말입니다.

 

기자 정도 돼서 이런 표현의 의미를 모르진 않았을 텐데, 어떻게든 속되게 해석해서 논란거리로 만들려는 안간힘이 참 애잔합니다.

 

💙 정말 무식해서 그런 건가?

 

박원순이 걷는 길

역사문제연구소

박원순변호사

시민의 역사 의식

참여 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시민운동의 대부

소셜디자이너

서울대우 조교 사건

성희롱

서울생활사박물관

젠더자문관

부천서성 고문 사건

전재산 집두채 팔아 시민단체에 기부한 박원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

국가보안법 연구

상처입은 사자가 죽으면 들쥐떼가 달려들어 그상처를 물어 뜯는다

박원순 빼고 한국 현대 여성사를 쓸수 없다

박원순 만큼 여성의권익과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성과를 거둔변호사시민운동가 행정가를 다시 보긴 어려울것.

 

 <편집 = '가난한 자' 지팡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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