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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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나는 당신이 곁에 있음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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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모 [kanghmo7] 쪽지 캡슐

2020-08-03 ㅣ No.97588

찬미예수님!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 이야기

공선옥 - 눈물로 지은 집
우리 인생에서 사랑이 없다면,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며 고통스러워할 일도 오늘 내가 이렇게 땀 흘리며 살아가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때도 나는 당신이 곁에 있음을 몰랐어요

아버지는 끝내 돌아가시고 어느새 아이가 둘이나 딸린 '어린 이혼녀' 가 된 나는 먹고 살길을 찾아 상경을 했다. 구로동 봉제 공 장을 다녔다. 공장 안에는 탁아소 있었다. 큰 아이는 데리고 다닐 수 있었는데 문제는 둘째 아이였다. 그런데 마침 집 앞에 '요셉 아 가방' 이라는 아가방이 있었다. 허름한 빈민가의 한 집 문짝 위에 '요셉 아가방'이라는 문패가 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던 날의 기쁨이 란! 왜냐하면 나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하고 살길이 없어 그 아이 를 '아동일시보호소' 에 맡겼다가 찾아온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 이다. 그 아이를 아동일시보호소에 계속 맡겨 둘 수는 없는 일이었 다. 무엇보다 나는 아이와 함께 살고 싶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살 기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돌도 안 지난 아이를 업 고 다니면서는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내 눈에 요셉 아가방은 마치 하느님이 내게 주시는 선물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홍 가타리나 수녀님.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 지. 언젠가 남양주 덕소에 살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은데. 가타리나 수녀님이 안 계셨다면 나는 그때 어떻게 그 험한 세월의 강을 건너갈 수가 있었을까. 지금도 기억난다. 구로3동성당 밑, 성당에서 돌보는 할머니들의 집(그 집 이름은 '안나의 집' 이었다) 옆집. 작은 양철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조그만 흙마당이 있는 작은 집에 구로공단에 다니는 엄 마들의 아기들이 수녀님과 봉사자 한 분의 보살핌을 받고 있던 집. 아침에 아기를 맡기러 가면 해님보다 더 환하게 아기를 받아 안아 주시던 수녀님. 저녁에 아기를 데리러 가면(나는 언제나 가장 늦게 오는 엄마였다) 달님처럼 푸근하게 아기를 내어 주시던 수녀님. 원 래 요셉 아가방도 세 살에서 다섯 살까지만 봐 주는 곳이었다. 그 러나 수녀님은 내 눈물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특별히 우리 아 기를 받아 주셨던 것이다. 나는 그때 수녀님께 눈물로 간청했다. 지금 생각하면 반은 협박이었다. "수녀님, 수녀님이 우리 아기 안 받아 주시면 나는 또 우리 아기 하고 헤어져야 한답니다." 수녀님도 우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아기는 요셉 아가방에서 유 일하게 기저귀 차는 아기가 되었다. 우리 둘째는 그곳 요셉 아가방 에서 2년을 컸다. 그래서인가, 둘째는 길에서 수녀님들만 만나면 엄마라고 했다. 좀 커서는 저도 수녀님이 될 거라고 했다. 내가 작가가 되어서 팍팍한 서울을 떠나 광주로 내려와 살던 어 느해 크리스마스였다. 우리 집은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찾아갈 만 한 사람도 없었다. 왜 그때 그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어 린 시절에 일 년내 교회 안 다니다가 크리스마스 때만 교회에 갔던 기억이 떠올라서였을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성당엘 나갔다. 성 당 안에서는 성탄 축제가 한창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연극도 보고 노래도 들으며 문득, 여기에 있는 사람들하고 내가 서로 잘 알고 친 한 사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과 내 가 그다지 외롭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그러니까 외 로워서, 사람이 그리워서 나는 성당을 다닐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큰 소리로 기도하고 뭔가 열기에 가득 찬 것 같은 개신교식 예배보 다 나는 차분한 성당식 미사가 더 마음에 들었다. 성당엘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우면 아빠가 없어도 아이 키우는 것이 그다지 힘겨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 외롭고 힘든 내 삶에 성당의 힘을 빌리자. 성당에 나가게 된 건 그렇게 순전히 나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순간, 가타리나 수녀님이 생각났다. 서울을 떠난 후 까맣 게 잊고 있었던 '나의' 수녀님.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수녀님이 바로 나를 성당에 오게 하신 분이었구나. 하느님은 그렇게 내가 가장 어려울 때 언제나 나를 돌 보고 계셨던 거구나. 어떤 기운이란 것은 그러니까 바로 하느님의 기운이었던 것이구나. 모든 옳고 거룩한 것들의 총화이신 내 안의 내 하느님. 나는 왜 내 안의 그 하느님을 그토록 까맣게 몰라봤던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 출처 : 선교사랑방. 글쓴이 : 마르티노 권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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