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1일 (화)
(백)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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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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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2024-10-06 ㅣ No.176578

[연중 제27주일 나해] 마르 10,2-16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5킬로미터나 되는 크고 단단한 반석을 100년에 한 번씩 흰 무명천으로 닦을 때 그 바위가 다 닳아서 없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을 한 ‘겁’이라고 하는데, 그냥 아무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무려 오백겁이라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칠천겁, 두 사람이 부모와 자식 사이로 만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팔천겁이라고 하니,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느끼게 되지요.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만난,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사람들인데, 나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나와 인연을 맺은 이들을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갈 소중한 ‘동반자’로 여기며 아끼고 사랑해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원히 안 볼 사람, 어떻게 되든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여기며 그들을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나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서는 그런 내 모습을 보시고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오늘 복음은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들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을 일종의 ‘매매계약’으로 생각했습니다. 결혼을 통해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 된다고 여겼기에 여성에게는 재산의 소유권이나 상속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도 아들도 없는 ‘청상과부’들은 먹고 살기가 참으로 막막했지요. 그런데도 남성들은 모세가 버림받은 여성들에게 재혼이라는 살 길을 열어주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인정해준 ‘이혼의 예외규정’을 근거로, 이혼을 여성보다 우위관계에 있는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처럼 여겼습니다. 이혼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면서 ‘헤어지다’라는 말을 쓰지 않고 ‘버리다’라는 말을 쓰는 것에서부터 이미 그런 마음가짐이 드러나고 있지요. 이혼을 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소외되고 상처받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냉혹한 모습입니다. 어쨌건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살았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나 존중 조차도 없는 비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이혼 규정에 대한 그런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해석은 모세가 의도한 바가 아니거니와,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도 부합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망을 채울 생각만 하는 그들에게 창세기의 내용을 예로 드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은 남자든 여자든 혼자서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나름의 장점이 있고 고유한 특성과 자기만의 개성이 있기에 그 자체로 아름답고 매력이 있지만, 자기 혼자서는 절대 채울 수 없는 부족함과 약함 또한 지니고 있기에 그런 부분을 보완하고 발전하여 완전한 ‘한 사람’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자든 여자든 상대방을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봐서도 안되고,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들어서도 안되겠지요. 남녀는 평생을 같이 하며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함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혼인성사 때 신랑과 신부가 낭독하는 서약문의 내용에서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납니다. “나 000은 당신을 내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즐거운 일들이 많아서 내 기분이 좋을 때, 내 몸이 어디 아픈데 없이 건강하고 편안할 때 함께 사는 사람을 챙기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프고 기분이 안좋을 때, 몸과 마음이 아파서 짜증과 화가 밀려올 때에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배우자를 대하려면 그만큼 상대방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하고 배려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노력들이 쌓여가면서 부부는 서로를 닮아가고 완전해지는 겁니다.

 

흔히들 결혼을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합니다. 혼인하는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까지 두루 영향을 미치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행사라는 뜻입니다. 남녀가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제 뜻대로 하는 ‘사람의 일’로 생각하기 쉽지만, 혼인은 엄연히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그 사람과 나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하느님께서 그와 내가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도록 섭리하지 않으셨다면, 그와 나는 ‘부부’라는 사랑의 공동체로 맺어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부라는 사랑의 유대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건 내 맘일지 모르나, 그 관계 밖으로 나오는 건 내 마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그 사람 모두를 위해 특별히 준비하시고 섭리하신 것들을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폐기할 수 없는 겁니다. 혼인의 그런 특성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맺어주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함께 멍에를 매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은 결혼정보 회사가 그러는 것처럼 서로 조건을 맞춰보고 호불호를 따져가며 맘에 들면 만나보라고 그와 나를 짝 지워주신 게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십자가를 보다 수월하고 보람있게, 그리고 기쁘게 끝까지 지고갈 수 있게 하시려고, 그 과정에서 그와 내가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주게 하시려고, 사랑이라는 멍에를 함께 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내 맘에 안드는 점이 생겼다고, 꼴보기 싫은 모습이 보인다고, ‘성격차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들어 그와 갈라설 생각을 해서는 안되겠지요.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멍에를 함께 졌다면, 그 멍에를 우리 어깨에 지워주신 그분 뜻이 드러나도록 힘내서 끝까지 가야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원칙은 비단 남녀사이에만 적용되는게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대하는 당신의 마음가짐을 보여주시면서, 우리가 사랑이라는 원칙을 나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까지 확장해서 적용해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어린이의 마음으로, 어린이를 대하는 마음으로 내 배우자를, 그리고 나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이 세상에서도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인 겁니다. 이 말씀은 어린이를 주어로 보는가 아니면 목적어로 보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어린이를 주어로 본다면 ‘어린이처럼’ 하느님과 그분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라는 뜻입니다. 어린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그대로 실천하는 단순하고 순박한 영혼들입니다. 하느님을 대할 때도 그렇지요. 하느님의 뜻을 욕심이나 편견으로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 받아들인 것들은 일단 따릅니다. 그런 수용과 순명을 통해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변화되는 겁니다. 한편 어린이를 목적어로 본다면 예수님처럼 어린이들을,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하며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이해와 사랑으로 끌어 안으라는 뜻입니다. 또한 어린이들을 끌어안는 그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끌어 안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내가 걷는 이 길이 그저 고통만 있는 길이 아니라 부활과 영광을 향해 가는 ‘십자가의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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