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0일 (수)
(녹)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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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루카 13, 22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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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승 [bona24] 쪽지 캡슐

2024-10-29 ㅣ No.17717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13,24)

베들레헴의 예수 성탄 성당 입구는 다른 성당과 달리 입구가 아주 좁은 편인데, 그 까닭은 십자군 이후 베들레헴을 점령한 사라센인들이 말을 타고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구를 좁고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더더욱 성당 내부의 예수님을 출산하신 후에 어머니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눕히셨던 ‘그 거룩한 자리’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좁은 문과 좁은 통로를 내려가야 하는데,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만이 聖所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성소 중의 성소라고 할 수 있는 그 거룩한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좁은 문과 좁은 통로를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이상하거나 거슬리는 부분은 없습니까? 먼저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13,23)라는 질문을 받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13,24)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는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13,23.24)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언급하신 좁은 문은 곧 구원받기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면 닫힌 문은 결코 어떤 누구도 닫힌 문을 여는 게 불가능하다는 소리로 들려옵니다. 결국 인간의 측면에서 ‘좁은 문’이라면, 하느님의 시선에서 ‘닫힌 문’인 셈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3,24)라는 말씀 속에 담긴 뜻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길 바라지만 전부가 아닌 그중에서 일부만 들어가겠고, 그마저도 한번 안에서 닫아버리면 아무도 닫힌 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의 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문이 닫히고 나면 사람들은 문을 두드리면서,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13,26)하고 애걸복걸하며 울부짖겠지만, 집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13,26.27)하고 냉정하게 거부하실 거라, 뜻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왜 그토록 냉정하게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거절의 이유인즉 그들은 평소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도 이웃에 어려움을 외면하고 “불의를 일삼은 사람들”(13,27)로써 뒤늦게야 구원받기 위한 선행 조건인 일상에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고”(마태6,33) 실행하는 삶이라는 알게 되었지만 때는 늦으리라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구원)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7,13.14)라는 말씀을 통해 구원과 멸망은 이미 주어진 일상에서 어떤 시선에서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반복해서 예수님께서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 너희는 항상 깨어 살라, 는 말씀의 또 다른 가르침이라고 느낍니다. 

사실 예수님 이전과 이후 인생의 위대한 스승들 역시 두 가지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즉 하나의 길은 어리석은 길- 죽음에로의 길- 넓은 길- 종살이 길- 눈멂의 길--俗人의 길이지만, 이에 반해 다른 길은, 지혜로운 길- 생명에로의 길- 좁은 길- 해방의 길- 눈뜸의 길- 聖人의 길로 구분 지었습니다. 예수님 역시도 두 가지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1)마태오 7,13-14 넓은 문과 넓은 길/ 좁은 문과 좁은 길; 2)마태오 7,24-27 어리석은 사람과 모래 위의 집/ 지혜로운 사람과 반석 위의 집; 3)마태오 6,24 재물 섬김의 길과 재물을 땅에 쌓아둠/ 하느님 섬김의 길과 재물을 하늘에 쌓아둠으로 구분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는 길과 문’을 통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실 구원과 멸망의 길과 문은 지금 여기서 어떤 삶의 가치와 시선을 가지고 사느냐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와 시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가치와 시선을 갖고 사는 삶은 지금 당장은 힘들고 울겠지만, 훗날에 편하고 웃게 될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13,30) 마지막 삶의 자리에서 웃고, 첫째가 되는 삶을 선택하지 않으시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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