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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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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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06-30 ㅣ No.183133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때에 한 율법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8,18-22).”

1)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가는 일인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기도

하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추종’이면서, 동시에 ‘동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걸어가는 길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보다 더 편안할 수는 없습니다.

<더 편안한 길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신앙인들이 걸어가는 길이

예수님의 길보다 더 힘든 길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2)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어떤 율법학자의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뜻인데,

‘어디로 가시든지’ 라는 말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 말씀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삶’이 어떤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소망 자체는 훌륭한데,

제자의(신앙인의) 삶이 어떤지 잘 모르면서 일시적인

감정으로(즉흥적으로) 따르겠다고 나섰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식으로(일시적인 충동으로)

세례를 받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학교나 수도원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성사 전에 예비신자 기간이 필요하고, 신학교

입학이나 수도원 입회 전 성소자 모임 기간이 필요합니다.>

3)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말씀은

“잠시 앉아서 쉴 곳조차 없다.”이고, 그만큼 당신의 삶이

인간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런 생활을 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묻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루카복음 8장을 보면,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는 말이 있고(루카 8,1-3),

루카복음 7장에는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이야기가 있고(루카 7,36), 루카복음 10장에는 마르타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들였다는 말이 있습니다(루카 10,38).

그런 이야기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단 한 순간도 편하게

쉬실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잠깐 동안의 일이었을 뿐이고,

예수님의 삶은 분명히 전체적으로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었던’ 삶이었습니다.

<그 율법학자가 누구였는지도 모르고, 또 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런 생활을 할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랐는지,

아니면 포기하고 되돌아갔는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그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뒷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포기하고 되돌아갔기

때문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4)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씀은, 십자가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신앙인들을 고생시킨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고생길만’ 있는 생활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편안할 때도 있는데,

힘들 때는 신앙생활을 멈추고 편안할 때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살든지 죽든지’(로마 14,8), 또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 4,2),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변함없이, 그리고 흔들림 없이 꾸준히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5) 22절의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은, “세속 일에

연연하지 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들어섰다면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려고 노력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요청은,

집에 다녀오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 뒤를

따르는 생활을 그만두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제자의 삶을 중단하고,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장례를 치른 다음에는 곧바로

되돌아오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 제자는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포스였다고 전해집니다(사도 6,5).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에 곧바로 되돌아왔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필리포스는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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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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