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 주간 월요일
“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마태 9,25)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은 단순한 기적을 넘어,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직접 나누어 주시는 순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참여함으로써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숨 쉬며 살아 있어도, 내면은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죽은 듯 보여도 깊은 차원에서는 '잠든 상태'일 뿐,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
우리는 매일 '존재에 대한 불안'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마주합니다.
무의미함, 소외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말씀은,
그 모든 존재적 불안을 근본에서부터 치유하는 시작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스며들어,
당신의 따뜻한 현존으로 채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가 있던 그 방 안으로 들어가신 것처럼,
오늘도 제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찾아오십니다.
그곳은 누구도 모르는 나만의 상처와 두려움이 머무는 자리,
때로는 희망조차 내려놓고 싶어지는 그 지점입니다ㅣ.
직장에서 매일 반복되는 업무에 지치고,
"이렇게 살아도 괜찮나?"하는 회의가 엄습할 때,
예수님은 바로 그 무기력한 마음 한복판으로 조용히 들어오십니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받은 상처로 마음을 굳게 닫을 때,
예수님은 아무 말 없이 내 마음의 문을 살며시 열고,
상처 위에 손을 얹으십니다.
존재의 깊은 만남 - 손을 잡으심
소녀가 일어난 것은 “ 특별한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께 “손을 잡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내미시는 손을 붙잡을 때,
그 손길이 우리의 무력감과 절망을 뚫고 “살아오를 힘”을 전해 줍니다.
우울과 불안의 어둠 속을 헤매던 사람은, 그 손길을 통해
“내 삶에도 의미의 빛이 스며들 수 있다”는 희망을 회복합니다.
신앙이 습관과 의례로만 남아 있던 사람도, 다시 한 번 그 손을 잡으며
기도와 묵상이 살아 있는 만남이 됨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특히 성체를 영함으로써 존재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또한 로사리오를 바치며 신비를 묵상할 때,
우리 존재 전체가 그리스도의 삶과 공명하며, 그분의 생명 안에 참여하게 됩니다.
소녀가 일어났다.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지?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수님의 현존으로 내 안이 채워질 때, 이 질문들은 멈춥니다.
그분의 손을 잡는 순간, 내 안의 모든 잠든 부분이 깨어납니다.
두려움은 희망으로, 무력감은 활력으로, 절망은 생명으로 바뀌어
우리는 새로운 여정의 첫걸음을 떼게 됩니다.
주님,
제 방 안으로 들어오셔서
제 손을 잡아 주소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해 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