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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복음, 순수한 믿음과 구원으로 이어지는 손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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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제 축일 6월 29일 주일 2주 전에 제가 영세 받은 본당에 가 주일미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딱 1년 반 정도의 시간만 지나면 제 본당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본당을 떠나서도 지금까지 연도가 일어나면 그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다 참석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어쩔 수 없는 핍박 아닌 핍박이 있다고 해도 본당과 맺은 인연도 인연이지만 제 마음은 제가 영세를 받은 본당을 떠날 수 없다는 암묵적인 표현입니다. 원래는 오늘 복음을 묵상한 후에 전체 스토리를 생각하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순간 스토리를 변경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목 마지막 '손길'에 자판을 치면서도 그곳에 눈이 가다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손과도 의미가 있어서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은 만나고 싶지는 않지만 본당 신자가 그리워 갔던 것입니다. 마지막 평화의 인사를 드릴 때 제가 몇 차례 언급한 분인데 마침 제 자리 앞 두 줄 앞에 계셨습니다. 돌아보시면서 저를 발견하시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셨습니다. 정확한 연세는 모르지만 제가 듣기로 지금은 아마 여든 다섯은 조금 넘어셨을 거라고 합니다. 요즘은 공식적으로 필요한 경우에 제가 안부 문자를 드리곤 하는데 적당한 호칭이 좀 애매해서 그냥 세례명에 '님'자로 붙이고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자매님이 저를 안아주신 적이 대략 7번 정도 됩니다. 그렇게 안아주시는 장면은 다 성전 안이었습니다. 미사 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몇 차례 그런 걸 경험한 후에 우연히 듣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성별을 떠나 그 장면은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뭔가 순간 울컥한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조금 더 과장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는 자매님들에게 많았습니다. 조금 착오가 있었습니다.
그날이 마침 자매님 축일이었네요. 지금 생각이 납니다. 멜라니아입니다. 사실 그날 갔던 건 어떻게 그 전 주에도 본당을 갔거든요. 사실 그날 간 것은 옆 본당에 미사를 갔는데 마침 성지순례를 가 어쩔 수 없이 본당에 갔는데 그날 공고에 제가 잘 아는 신부님이 특강을 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몰랐다면 모르겠는데 그 소식을 알고는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그 신부님은 제가 신부님과 힘들어 하는 사정을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아마 제가 본당에서 영성체 때 보고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제가 이미 마침 옮긴 성당이 이 신부님이 사목하셨던 본당이었고 그곳으로 교적을 옮긴 사실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원래 영성체 줄에서 중간에 신부님 계신 쪽으로 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날 강연을 듣고 난 후에 신부님께 톡으로 오늘 간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냥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기회되면 하려고 했습니다.
잠시 삼천포로 샜습니다. 그 신부님은 제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제가 원하면 저의 억울함을 본당 신부께 항변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신부님께서는 별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다고 하셔서 제가 그냥 하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괜히 신부님 입장만 곤란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사실 삼천포로 샌 것 같았는데 이 내용이 들어가야 어쩌면 상황이 이해가 되실 것 같기도 합니다. 그날은 특이하게 강론을 생략하고 미사를 마치고 특강을 신부님이 하셨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실 때 자리를 자매님 뒷 자리로 이동을 했습니다. 에어컨이 켜져 있어도 조금 더워셨던지 부채로 부채질을 하셔서 제가 뒤에서 주보로 살랑살랑 바람을 불어드렸습니다. 처음엔 잘 모르시다가 나중에 고개를 돌려보시고 표정으로 웃으시면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이 장면도 사람들이 저는 몰랐는데 본 분들이 있어서 나중에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습니다. "저래서가 아니라 저러니 멜라이아 언니가 베드로를 아끼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추가하겠습니다.
그날 미사 때 자매님이 활짝 웃으시면서 평화의 인사 시간에 손을 내미시는 장면을 맨 뒤 2층 성가대에 계신 자매님들이 그 장면을 목격하신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그 장면 하나로 제가 어떻게 본당에서 신앙생활을 했는지 그 하나로 다 증명한 것이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 장면을 제가 예전에 암투병했다고 하시는 성가대 누나 같은 자매님도 보셨던 것 같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상황을 가지고 오늘 복음으로 다시 와서 묵상을 해보겠습니다.
어제 주일도 옆 본당에 아주 오랜만에 갔는데 전 마산교구 지속적인 성체조배 회장님이신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거의 대부분 오랜만에 뵐 때는 꼭 손을 먼저 내미시고 악수를 청합니다. 성당에서는 유일하게 저한테 악수를 청하는 자매님이십니다. 과거에 초등학교 교사를 하셨고 지금은 퇴직하신 지 꽤 됐고 노후를 보내시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저를 대하시는 태도가 참 깍듯하게 예의를 잘 지켜주십니다.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냥 인사를 하고 반가움을 표시할 수도 있지만 악수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예의도 예의지만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어떤 경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래 악수를 하는 인간의 행위의 유래가 여기서 기원됐다고 합니다. 88년도 고1 때 유명했던 영어 참고서 지문에서 악수의 유래를 봤던 게 기억이 납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하는 의례적인 행동으로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설령 의례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악수를 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공통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손, 또 하나는 그 손에 부대하여 일어난 접촉입니다. 요즘 현대판으로 이야기하면 스킨십입니다. 혈루병 여인은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신체적 스킨십은 아니지만 그 옷자락만이라도 하는 간접 스킨십입니다. 회당장 딸은 직접적인 스킨십입니다. 직간접을 떠나서 여기서는 접촉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여러 가지를 상징할 수도 있지만 심지어 혈루병 여인에게는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그 구원도 예수님께서 인위적으로 구원해 주신 게 아니라 여인의 믿음이 여인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의 근저에는 바로 예수님과의 접촉이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신체의 접촉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옷자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라도 예수님과 어떤 연결고리만 있으면 된다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수한 생각이 자신의 병을 치유하는 기적도 일으켰지만 그게 구원으로 연결됐다고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메시지를 떠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연결고리를 생각한다면 그 연결고리가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바로 겉으로 보기엔 열심한 신앙처럼 보이지만 그게 신앙생활과 믿음의 궁극적인 결과인 구원과는 먼 따로국밥처럼 될 수 있습니다. 썩은 동아줄을 잡고 가는 신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잡은 줄이 썩은 동아줄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끝까지 올바른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