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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우리의 희망은 ‘몸’만의 건강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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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18-2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며, 우리의 희망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신 일과 불치병을 앓는 여자를 고쳐 주신 일은, 당신이 인간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그 ‘생살여탈권’은, 인간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에 연결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회당장과 여자의 심정에 초점을 맞추면, 어린 딸이 죽음을 맞이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심정은 완전한 절망 상태였을 텐데, 그래도 그에게는 ‘예수님’이라는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불치병을 앓던 여자에게도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2) 우리는 이 이야기를 대하면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불치병도 고칠 수 있다.” 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믿기만 하면’은, 일종의 함정이 될 수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에 ‘무조건’ 응답해야 할 의무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니고, 또 예수님은, 믿고 기도하는 사람의 병을 ‘무조건’ 고쳐 주시는 자동응답기도 아닙니다. ‘권한’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권한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한은 당신의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권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는데도 불치병이 낫지 않는 사람에게 가서, “당신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3)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2코린 12,7ㄴ-9ㄴ).” 바오로 사도는 평생,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게 하는 어떤 불치병을 앓았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서 ‘세 번이나 청했다.’는 말은, 주님께 간절하게 청했다는 뜻인데, 또 그만큼 그 병의 고통이 무척 심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간청을 들어 주시기를 거절하셨기 때문에, 그는 순교할 때까지 그 병고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믿음이 부족해서 자신의 병을 못 고친 것도 아니고, 또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를 덜 사랑하셔서 그의 청을 거절하신 것도 아닙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라는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병고를 겪으면서도 기꺼이 인내하는 모습 자체가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4) 간절하게 기도해서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도 많고, 끝내 치유되지 못하고 그냥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은데, “치유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 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도 치유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구의 청은 들어 주시고, 누구의 청은 안 들어 주시는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 모릅니다. 모르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청을 못 들으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사정을 외면하시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 없으신 것도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나의 간청을 듣고 계시고, 내가 고통스러워할 때 함께 아파하시면서 안타까워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언제든 어떻게든 당신의 자비를 주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5)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지상에서의 육신의 건강이 아니라, 내세에서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육신의 병과 그 병의 치유에만 집착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또 우리의 희망은 이쪽 세상에 있지 않고 저쪽 세상에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