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9일 (토)
(녹)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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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회개와 영적승리의 삶 “주님과 함께하는 파스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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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 [forgod] 쪽지 캡슐

07:42 ㅣ No.183545

2025.7.19.연중 제15주간 토요일                                                          

 

탈출12,37-42 마태12,14-21

 

 

회개와 영적승리의 삶

“주님과 함께하는 파스카의 삶”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움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시편119,147)

 

폭우로 인해 전국적으로 피해가 참 많습니다. 큰비가 내리고 나니 불암산 계곡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고 흐르는 물길 모습도 힘차서 좋습니다. 오래전 <혁명>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지금 저는 하느님의 생음악 빗소리를,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씁니다. 놀랍게도 바로 24년전 2001년 7월19일 오늘 시입니다. 하느님 눈에는 24년전이나 지금이나 '영원한 현재의 오늘'입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꼭 큰 비가 내려야 

 맑게 흐르는 시내인가

 비 없어도 늘 맑게 흐를 수는 없나 

 바짝 마른 바닥에 잡초와 오물들

 대책없이 썩어 악취를 발하던 시내

 폭우내리니

 말끔히 씻겨 정리되고

 하얀 모래에 맑게 흐르는 물

 살아 노래하는 시내가 되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2001.7.19.>

 

이런 혁명은 가능합니다. 바로 영적혁명, 내적혁명인 회개입니다. 어느 때 보다 생태적 회개가 절실한 때입니다. 인공지능 AI가 아닌 회개가 답입니다. 웬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길한 느낌도 듭니다. 어느 지인이 보내준 <AI;한없이 전기를 먹는 인류의 괴물 우상인가>라는 글입니다.

 

1.기계는 대답하고 지구는 타들어 간다.

2.기술은 진보하고 인간은 퇴보한다.

3.생명은 연산(演算)이 아니다.

4.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정말 분별력의 지혜가 절실한 작금의 시대입니다. 참으로 실용과 더불어 그 이상으로 관상을 강조할 때입니다. 관상의 기초가 되는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내적혁명의 삶, 영적승리의 삶, 주님과 함께 하는 파스카의 삶이 절실한 때입니다. 얼마전 레오 교황의 <생태적 위기는 관상적 시선을 요구한다>라는 주제의 강론에 전폭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팎의 많은 이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배려하는 일이 얼마나 긴급한 일인지 인정하지 않는다...오직 ‘관상적 시선’(contemplative gaze)만이 피조물과의 관계를 바꿀수 있고, 죄의 결과 야기된 관계의 파멸로 인한 생태적 위기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작금의 위기의 시대, 실용의 강조와 더불어 그 이상으로 강조되어야할 내적혁명의 회개라는 파스카의 삶, 관상적 삶입니다. 오늘 말씀 주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승리의 삶,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탈출기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열째 재앙을 통해 이집트에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 60만명의 승리의 행군을 보여줍니다. 이집트의 압제하에서 430년이 끝나는 바로 그날 주님의 모든 부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옵니다. 탈출기의 마지막 구절은 파스카 승리의 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날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세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밤을 새우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유래한 우리 교회의 <파스카 성야>입니다. 아니 참으로 믿는 모든이에게 모든 밤은, 하루하루 날마다 동터오는 부활의 새벽을, 새날을 앞둔 파스카의 밤일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깊이 묵상하고 배워야 할 내용은 파스카 예수님의 관상적 승리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노래’(이사42,1-4)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 때 비로소 관상적 시선, 관상적 삶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참된 제자들이 이렇게 살았고, 바로 오늘의 우리가 배워고 따라야 할 삶의 지침입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12,18-21)

 

예수님은 결코 선동하는 시끄럽고 요란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한없이 깊고 고요하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비롭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AI이 아니라 이런 관상적 영적 승리의 삶이 인류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실용에 앞서 끊임없는 내적혁명의 회개로 이런 1.“침묵과 경청, 온유와 겸손, 배려와 존중, 정의와 평화, 사랑과 인내”를 살아내는 관상적 영적 승리의 삶이, 2.최소한도 의식주의 단순소박한 삶으로 쓰레기를 덜 내는 삶이, 3.소유의 쾌락이 아닌 날로 비워감으로 존재의 기쁨을 사는 자발적 가난의 관상적 삶이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내적혁명의 관상적 회개의 삶에 참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찬미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07,1).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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