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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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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체제와 동행 체제’라는 주제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체제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는지 묵상하면서 강의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은 그런 관점에서 ‘동원 체제’와 ‘동행 체제’라는 사회 구조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함께 알아 보고자 합니다. 동원 체제는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사람들을 위에서 아래로 끌고 가는 체제입니다. 명령이 있고, 복종이 있습니다. 사람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집니다. 과거 유대 사회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제사장,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도구로 백성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죄인은 배제되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교회의 구조도 비슷한 면이 있었습니다. 교황, 주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로 이루어지는 피라미드 구조가 있었습니다. 이런 동원 체제는 데카르트, 칸트, 헤겔의 철학적 성찰로 동행 체제로 변화되었습니다. 신분과 세습으로 권력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선출된 권력이 국민을 위해 권한을 행사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이미 동행 체제를 보여 주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행 체제는 함께 걷는 체제입니다. 사람을 존엄한 주체로 여기고, 결정에 함께 참여하게 하며, 길 위에서 서로 배우고 나누는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동행 체제의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지 않고 함께 식탁에 앉으시고, 함께 걸으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 말씀은 강제 명령이 아니라, 초대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동행 체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사람을 동원하는 길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걷는 길이었습니다. 세리와 창녀, 병자, 죄인들과 함께 밥을 드셨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셨고, 사람들에게 스스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위에서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으며 열리는 길 위의 나라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구조를 쇄신하려 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교회는 소공동체로 이루어진다고 선포하였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동원 체제의 교회에서 동행 체제의 교회로 방향을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이었고, 초대교회 공동체가 함께 했던 길이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2000년대 복음화’라는 방향을 정하였고, 1990년부터 동원 체제 교회의 틀에서 동행 체제의 교회로 변화를 모색하였습니다. ‘지역, 말씀, 실천, 본당과의 연결’이라는 소공동체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를 시작하였습니다. 교우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말씀을, 공동체를 통해서 실천하려 하였습니다. 친교와 나눔이 공동체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께 이렇게 탄식합니다. “제가 이 백성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어찌하여 저에게 그들을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 모세는 백성을 동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무게에 눌려 울부짖으며, 하느님께 함께 길을 찾자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물고기 두 마리, 빵 다섯 개.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함께 내어놓을 때,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사목과 공동체는 어떤 체제에 있을까요? 신자들을 동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동행하고 있습니까? 사목자는 지휘자입니까? 아니면 벗이자 동반자입니까? 오늘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살아간 이 사제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도 명석하지 않았고, 설교도 간결했으며,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매일 고해소에서 사람들과 함께 눈물 흘리며, 그들의 짐을 함께 나눴습니다. 신부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 역시 ‘동원’이 아닌 ‘동행’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하느님을 향한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신부님이 진정한 사목자요 목자라 불리는 이유는, 교우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교우들 곁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성 비안네 신부님처럼, 함께 걷고, 함께 나누며, 함께 우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 길 위에서 열립니다. 동원하지 말고, 동행해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요청에 우리가 기쁨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