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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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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캐나다에서 공부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당시 저는 이냐시오 영신 수련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신학교 교학처장 신부님께서 제게 ‘설교학’을 함께 공부하면 좋겠다고 권하셨습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면 신학생들에게 설교학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학 공부도 병행했습니다. 수업에서 인상 깊었던 방식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학생들을 팀으로 나누어, 좋은 설교나 강론의 영상을 찾아 보여주고 평가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제가 신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같은 방법을 썼습니다. 학생들이 인터넷을 통해 좋은 설교들을 찾아내어 분석했는데, 법정 스님의 설법,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까지 다양했습니다. 그중 제 마음에 가장 깊은 울림을 준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람페두사’ 강론이었습니다. 교황님은 2013년 즉위 후 첫 사목 방문지로 지중해의 작은 섬 람페두사를 찾으셨습니다. 그곳은 전쟁과 가난을 피해 온 난민들이 머물던 수용소였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는 세계화된 세상 속에서 ‘무관심의 세계화’에 빠져 있습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보면서도 ‘그건 내 일이 아니야’라며 지나쳐 버립니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무책임한 ‘익명의 사람들’로 살고 있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그러나 오늘 저는 세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교황님의 이 호소는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처음부터 잘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눈물 속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해방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끊임없이 이렇게 상기시키십니다. “너희도 한때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난민이 아니었더냐?” 그 체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해방된 백성은 이제 나그네와 과부, 고아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강한 자의 세상이 아니라, 약자가 존중받는 세상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하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난민의 삶을 사셨고, 십자가 위에서 철저히 버려진 이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언제나 난민과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는 우리를 다시 깨우칩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살았지만, 문 앞에 굶주린 라자로가 있었음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당하며 아브라함에게 애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신앙의 문제는 눈에 보이는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무관심 속에 사는 사람은 부활의 기적이 눈앞에 펼쳐져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한국 교회도 사도좌와 뜻을 같이해 이주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에게 사목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민자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낯선 땅에 와서 도움을 받으며 살아온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그 기억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이민자와 난민을 환대할 수 있습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몰라봤지만, 하느님은 라자로의 이름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를 이름으로 부르시고, 탐욕스러운 부자를 외면하십니다. 그 하느님의 시선을 기억하며, 우리 공동체가 환대와 연대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도 한때는 종살이하던 난민이 아니었더냐?” 이 말씀은 과거를 회상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기쁨을 누리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