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30일 (화)
(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연중 제26주일 다해,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스크랩 인쇄

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2025-09-28 ㅣ No.185153

[연중 제26주일 다해,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루카 16,19-31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요즘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고해소에 앉아 신자들의 고백을 듣고 있으면 정말 그렇게 느껴집니다. 어쩔 수 없이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다는 분들이 좀 있고, 기도생활에 소홀했다는 분들이 좀 있습니다. 또한 언뜻 들으면 죄를 고백하시는 듯하다가도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듣다보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딱한 처지를 넋두리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많지요. 판공성사 기간이 되면 그런 경향은 더 심해집니다. 지난 판공 이후 처음하는 고해인데 성사표를 내야 한다고 해서 들어왔을 뿐 고백하실 죄가 없답니다. 십계명을 고의로 어긴 적도 없고, 남들에게 별다른 피해 끼치는 일 없이 나름 잘 살고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분들에게 정말 죄가 없는 걸까요? 큰 잘못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문제없다는 안일함 때문에, 적당히 신앙생활 하며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만 챙기려 드는 개인주의에 빠져서, 무엇이 하느님 앞에서 진짜 ‘죄’인지조차 모르는 채 의식 없이, 성찰 없이 살고 있는 건 아닌지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보내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콕 찝어 ‘바리사이’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그분의 의도가 드러나지요. ‘바리사이’라는 이름은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한편, 자신들을 일반 대중 특히 죄인들과 엄격히 구별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하여 죄인들의 부정함에 물들지 않고 영적 순수성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남들이야 어찌되든 나만 잘 살아서 구원받으면 된다는 철저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지요.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가 그런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종교 지도자로서 사회적 특권을 누리던 바리사이들이 그랬지요. 물론 그런 특권을 누리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혼자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보니 지척에서 가난과 굶주림, 질병의 고통으로 신음하던 이웃 라자로에게 무관심하고 인색했다는 점입니다. 자기 식탁에 남아도는 빵 부스러기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이웃의 딱한 처지를 헤아리고 보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죽음 이후 부자와 라자로의 지위에 역전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서 극심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라자로는 천국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된 반면,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던 부자는 저승에서 꺼지지 않는 불에 타는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된 겁니다. 왜 이런 심판이 내려졌는지, 왜 자신이 그런 큰 고초를 겪게 된 것인지 그 연유도 모른 채 자비를 간청하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그렇게 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이 말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부자들은 벌을 받고, 고통 속에 신음하던 빈자들은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재물은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뿐,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지요. 부자의 잘못은 자신이 ‘좋은 것’들을 받았음을 ‘망각’한 채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 좋은 것들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신데, 그분은 부자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그것들을 주신 게 아니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소중한 피조물인 다른 사람들을 돕고 보살피라고 주셨지요. 즉 부자가 누린 재물은 권리가 아니라 ‘소명’이었던 겁니다.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주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라자로에게 자기 갈증을 좀 식혀달라고 요구하려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지요.. 그러나 부자는 가난하고 볼품 없는 라자로가 자기 삶에 아무 도움 안되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자신이 저승에서 고통 받을 때 물 한방울이라도 줄 수 있는 ‘은인’은 라자로뿐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비와 사랑으로 친교라는 열매를 맺었다면 그 열매를 저 세상에서도 누릴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웃과 자신을 분리하여 단절된 채 사는 사람은 저 세상에서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분리되어 그분 사랑이 단절된 채 살게 됩니다. 영원한 고독과 고통 속에서 뒤늦은 후회로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이지요. 부자와 라자로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그들 사이에 빈부격차는 있을지언정, 상대방에게 건너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구렁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직 기회가 있었을 때, 부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야 했습니다. 관심의 다리, 공감의 다리, 나눔의 다리, 자비의 다리… 그랬다면 그 다리를 통해 하느님 나라로 건너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애시당초 깊은 구렁 같은 게 생길 일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자는 그럴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자기 집 대문을 활짝 열었다면 그 문이 라자로와 친교를 맺는 ‘통로’가 되었을텐데, 그 문을 굳게 닫아두었기에 굶주림에 신음하던 라자로가 빵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기 위해 부자에게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는 거대한 ‘철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철벽이 저 세상에서는 타는 갈증에 신음하던 부자가 물 한 방울이라도 얻어 마시기 위해 라자로에게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는 거대한 ‘구렁’이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게 다 ‘자업자득’이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러나 자기 형제들만은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사랑과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라자로처럼 천국에서 평화와 행복을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라자로를 그들에게 보내 경고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청하지요.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을 본다면 아무리 완고한 이라도 마음을 고쳐먹을 거라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고개를 저으며 부자에게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사실 모세의 율법을 보면 같은 동족을 돌봐야 할 책임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신명기 법전을 보면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된다 …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신명 15,7-8)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부자는 그 율법을 몰라서 안지켰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하느님 말씀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기에, 자기 구원과 직결되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흘려 들었기에,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 삶에 ‘회개’라는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사랑의 계명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으면 우리도 비유 속 부자처럼 저승에 가서야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50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