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6일 (목)
(녹)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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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무지의 악, 무지의 병 “회개와 믿음의 의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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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 [forgod] 쪽지 캡슐

08:51 ㅣ No.185588

2025.10.16.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로마3,21-30ㄱ 루카11,47-54

 

 

무지의 악, 무지의 병

“회개와 믿음의 의화가 약이자 답이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ㄴㄷ)

 

시편 화답송 후렴이 악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느낌입니다. 악에 대한 궁극의 답은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이고 피신처입니다. 악의 평범성을 말합니다. 악은 디테일 안에 숨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옥으로 이끄는 길은 화려하게 포장되어 있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이 모두에 앞서 언어인 말의 중요성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요 삶이요 사람입니다. 말을 보면 삶이 드러납니다. 그가 누구인지 압니다. 언어만 적확하게 사용해도 악이 숨을 여지는 없다 생각됩니다. 오늘 현자의 말씀과 오래전 스크랩 해둔 내용이 좋아 나눕니다.

 

“몸을 단단히 붙들고 싶다면 말부터 단속해야 한다. 말은 뱉는 나뿐만 아니라, 듣는 이의 몸가짐에도 영향을 준다.”<다산>

 

“말이 충실하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진지하고 경건하면 미개한 환경에서도 뜻하는 바를 이룰수 있다.”<논어>

 

“모든 공동체는 언어공동체다. 언어가 타락하면 공동체가 타락합니다. 언어가 공동체의 토대이고 혈관이다. 그 언어가 어떤 수준의 언어냐에 따라서 공동체의 질이 결정된다.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의 언어는 공동체를 높이지만 탐욕을 동력으로 삼은 기만의 언어는 공동체를 갉아 먹는다.

언어는 눈이고 창이다. 언어가 이기심에 갇혀 있으면 우리는 넓게 볼 수 없고 높게 볼 수 없다. 우리 공동체가 사람 사는 공동체가 되려면 언어가 맑아져야 한다. 좋은 정치는 언어를 정련함으로써 공동체를 일으켜 세운다. 우리 공동체 언어는 탐욕의 언어, 짐승의 울부짖음을 넘어 더 멀리 날아야 한다.”<고명섭>

 

이래서 고전 읽기를, 성서의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명시 읽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말(言)의 사원(寺)에 머물기는 시(詩)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언어의 순화와 더불어 마음의 순화, 공동체의 순화, 수행덕목의 순화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매일미사전례문과, 또 시편공동성무일도의 아름답고 깊고 순수한 언어들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좋은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평생 영성교육에, 언어교육, 기도교육, 믿음교육, 사랑교육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다고 봅니다. 매일미사의 정성된 수행이 아름다운 명품인생, 명품신자를 만듭니다.

 

맑고 깊은 언어의 대가가 바로 오늘 하느님의 시인인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충격적 불행선언이 계속됩니다. 언어교육, 마음교육, 믿음교육, 사랑교육은 하루 이틀이 아닌 평생공부의 영역입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참으로 부단한 회개를 통해 전 삶에 걸친 순화교육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대상이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요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무덤을 만들고 더 이상의 악행들은 끊어야 하는데 무덤을 만들고 기념하면서 조상이 저지를 악행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언자들의 박해를 끊어야 하는데 예수님과 그 일행을 박해하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악순환의 반복은 역사와 더불어 계속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박해의 역사를 끊으라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한다...그렇다.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이 우리를 각성케 합니다. 반복의 악순환을 단(斷)해야 함을 배웁니다. 참으로 책임의 세습성, 책임의 연대성을 깨달을 때 회개는 더욱 절실해집니다. 마치 악의 DNA처럼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박해한 조상들과 피가 이어지고 있고, 알게 모르게 뿌리 깊이 세습되어 연대 되어 있는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부단한 전격적 회개를 통해 올바른 판단에 올바른 언어의 사용과 더불어 순화되는 마음이요 공동체이겠습니다. 이어지는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안에 은밀히 숨겨진 악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못먹는 감 찔러보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누구나의 보편적 악한 심보입니다. 나도 들어가지 못하니 너도 들어갈 수 없다는 터무니 없는 억지이나 이 또한 우리 안에 잠재해있는 악임을 깨닫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그분을 옭아 매려고 몰아대며 질문하는 모습에서 악이 발광, 준동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래서 일상에서의 영적전투는 치열할 수뿐이 없습니다. 바로 이에 대한 처방이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의화입니다. 복음의 답을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행위의 법?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역시 값싼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영적전투의 노력의 믿음과 더불어 믿음에 의한 의화입니다. 불행의 원천인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믿음의 의화뿐입니다. 성화聖化, 신화神化의 다른 이름이 의화義化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고맙게도 우리 모두, 믿음에 의한 의화로 무지의 악을 치유함으로 그 악의 힘을 무력화 시킵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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