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용 신부님_인류 멸망 공식: ‘이것’이 사라질 때…. 찬미 예수님! 세상은 어떻게 멸망할까요? 혜성이나 운석의 충돌일까요? 아니면 지금 많은 영화에서 보여주듯, 외계인의 침공일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 인류는 '자멸'할 것입니다. 만약 외계인이 존재하고, 그들이 은하계를 여행할 만큼 엄청난 기술력을 가졌다면, 그들은 지구를 침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 '사랑이 가득한' 종족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만 광년을 여행하는 기술력은 상상할 수 없는 '인내심'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이며, 그 의지의 다른 이름이 바로 '인내'입니다. 기술이 발달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편안한 기술은, 그 사랑의 뿌리가 되는 '인내심'을 말살시키기 때문입니다. 1968년, 미국의 동물행동학자 존 칼훈은 '유니버스 25'라는 이름의 충격적인 사회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쥐들에게 완벽한 유토피아를 제공했습니다. 넉넉한 공간, 무제한의 먹이와 물, 천적도 없고 질병도 없는 완벽한 환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낙원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개체 수가 2,200마리를 넘어서자, 이상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컷들은 경쟁과 구애를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암컷을 지키거나 둥지를 방어하는 '인내'를 버리고, 그저 제 몸만 치장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이들을 '뷰티풀 원스(The Beautiful Ones)'라고 불렀습니다. 어미들은 새끼 낳는 것을 멈추거나, 낳아도 돌보지 않고 내버렸습니다. 결국, 단 2년 만에 이 완벽한 유토피아는 저출산과 무관심, 폭력으로 가득 찬 지옥으로 변했고, 마지막 쥐가 죽으며 완벽하게 '멸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먹고사는 문제, 즉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자, 그 어떤 것도 '인내'하며 이뤄내야 할 의욕과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찌 쥐들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제가 아일랜드에 갔을 때, 뼈아픈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격했습니다. 아일랜드는 수백 년간 영국의 성공회로부터 그토록 잔인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인내'로써 가톨릭 신앙을 지켜낸 나라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목숨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켈틱 타이거'라 불리는 경제 부흥이 일어나, 아일랜드의 1인당 GDP가 그토록 억압했던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지켜낸 신앙을, 풍요 속에서 스스로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잘 살게 되자, 더 이상 하느님께 매달리며 인내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제가 본 아일랜드의 텅 빈 성당들은, '유니버스 25'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세계 최고의 인터넷 속도, 세계 최고 수준의 생활 환경. 우리는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 유토피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세계 1위의 저출산율입니다. '유니버스 25'의 쥐들처럼, 많은 청년이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내'의 과정을 거부합니다. "며칠만 일해서 나 혼자 편하게 살면 되지, 왜 굳이 힘든 길을 가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이런 환경은 우리의 뇌 구조마저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튜브 영상이 3분만 길어져도 참지 못하고, 10초 안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쇼츠'에 중독됩니다. 1초도 참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도파민 중독 상황에서, 두꺼운 책을 '인내'하며 읽는 사람은 신기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종말의 징조로 전쟁과 지진, 기아와 혼란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혼란은 단순히 못 살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더 잘살게 되면서,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과 더 빨리 즐기려는 조급함 속에서 더 큰 전쟁과 혼란이 벌어집니다. 이 모든 '유니버스 25'의 멸망 징조 속에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단 하나의 해법을 주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예전에는 먹고살기 위해, 즉 '나를 이기는'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내는 다릅니다. 유재석 씨나 박진영 씨처럼,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 매일 자신과 싸우는 그런 '적극적인 인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을 위해 무엇을 인내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오로를 통해 그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1테살 5,16-18) 이 세 가지를 '죽기까지' 인내하는 것이 우리가 얻어야 할 생명의 길입니다. 첫째, 매일 기도할 시간을 정해서 '인내'하며 바치는 것입니다. 둘째, 매일 감사 일기를 쓰며 억지로라도 감사할 거리를 찾는 '인내'입니다. 셋째, 내 감정이 어떠하든 '기뻐하기로' 선택하는 '인내'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과의 싸움입니다. 아기가 걷기 위해 2,000번 넘게 엉덩방아를 찧고도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도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의지', 곧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해성사'가 필수적입니다. 누군가 미워져서 기쁨과 감사를 잃었을 때, 고해성사를 보고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는 반드시 생명을 가져옵니다. 첫째, '기도'의 인내는 생명을 줍니다. 아들의 살인범 유영철을 용서하기 위해, 고정원 씨가 수년 동안 "그를 용서하게 해 달라"고 끊임없이, '인내하며' 기도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불가능해 보였던 기도의 인내가 결국 그녀의 영혼에 참된 평화라는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제가 성체조배를 매일 1시간씩 하라고 해서 그것을 의지적으로 하여 여러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을 봅니다. 그 인내가 자신과 자녀와 가족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둘째, '감사'의 인내는 기적을 만듭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인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이겨낸 힘이 매일 밤 '감사 일기'를 쓴 인내에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녀는 잠들기 전, 억지로라도 5가지 감사한 일을 찾아 적었습니다. 이 '인내'하는 습관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시선이 되었고, 그녀의 삶 전체를 생명으로 이끌었습니다. 감사일기를 매일 쓰는 것, 십일조를 매번 바치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일입니다. 셋째, '기쁨'을 선택하는 인내는 관계를 살립니다. EBS의 한 다큐멘터리('엄마가 울었다')에서, 한 반의 아이들에게 '30일 동안 매일 부모님 칭찬하기'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어색해요", "할 말이 없어요"라며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숙제이기에 '참고' 하다 보니, 부모님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한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엔 억지로 했는데, 하다 보니 정말 부모님이 고맙게 느껴졌고, 그렇게 말하는 제 자신이 자랑스러워졌어요." 억지로 시작한 인내가, 진짜 '기쁨'과 '생명'의 관계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일상이 '유니버스 25'의 멸망으로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들처럼 생명으로 가고 있습니까? 기뻐지려면 기쁘게 해 주어야 합니다. 행복의 의지를 가집시다. 세상이 주는 빠르고 쉬운 쾌락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기도, 감사, 기쁨'의 십자가를 '인내'로써 지고 가십시오. 그 인내의 끝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의지가 소멸하면 나도, 세상도 소멸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의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21,5-19: 너희가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1. 종말은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날오늘 전례는 “영광중에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야훼의 날’, 곧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안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날을 묵상하게 한다. 말라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불처럼 타오르는 날이 온다. 교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어, 타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태양이 떠올라, 그 날개 밑에서 치유가 이루어질 것이다.”(말라 3,19-20) ‘불’은 단지 파괴의 상징이 아니라, 정화와 심판, 동시에 구원의 빛을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날의 불은 각 사람을 불태울 것이다. 그러나 불의 성격은 다르다. 불의는 벌을 받고, 의인은 정화된다. 하느님의 불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다.”(Enarr. in Ps. 37,3) 2. 성전의 파괴 예고: 역사와 믿음의 분기점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은 세상의 중심이라 할 만큼 장엄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6절) 이 말씀은 단순히 건물의 멸망 예고가 아니라, 구약의 종교 체계가 완성되어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시대가 열릴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성전의 파괴는 그리스도 자신이 새로운 성전, 즉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중심이 되심을 가리킵니다(요한 2,19 참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주님께서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은 단순히 파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성전, 곧 당신의 몸을 세우시기 위한 서곡이었다.”(Hom. 75,1) 3. “때가 가까웠다.”는 미혹: 거짓 그리스도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신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8절) 종말론적 공포와 불안은 언제나 사람을 거짓 메시아와 허황한 예언으로 이끈다. 오늘날에도, 이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것을 종말로 해석하는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보다 두려움에 뿌리를 둔 신앙이기 때문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교회는 마지막 시험을 거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거짓 메시아의 환상에 현혹될 것이다. 그 거짓 메시아는 종교의 탈을 쓴 거짓 구원이 될 것이다.”(675항) 참된 신앙은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에서 자란다. 성 이레네오는 “거짓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느님을 잃고, 세상을 구원하려던 하느님의 사랑마저 거부한다.”(Adversus Haereses V,25,1)고 말했다. 4. 박해의 시대: 증언의 기회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변론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언변과 지혜를 주겠다.”(13-15절) 역사 속에서 교회는 늘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전해 왔다.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승리의 행진이 아니라,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증거이다. 교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순교는 믿음의 최고 증거이다. 순교자는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며, 진리와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다.”(2473항)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순교의 의미를 이렇게 고백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분의 수난 안에서 그분을 닮아야 한다.”(Epistula ad Romanos, 6,3) 5.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종말의 덕, 희망의 완성오늘 복음의 절정은 다음 말씀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19절) 이 구절은 종말론적 덕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단순히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끊임없는 신뢰 안에서 서 있는 힘을 뜻한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인내란, 폭풍 속에서도 하느님을 붙드는 영혼의 닻이다.”(Hom. de grat., 2) ‘인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구원을 붙잡고 사는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인내는 사랑의 완성이며, 그분의 인내 안에서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6.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깨어 있는 현재바오로 사도는 종말을 기다리며 세상을 외면하는 이들을 꾸짖는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2테살 3,10) 참된 기다림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적극적 사랑의 행위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는 손을 놓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일 속에서 주님을 만난다.”(Homiliae in Evangelia, Lib. I, Homilia I, n.1) 교회의 종말론적 희망은 ‘하늘나라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 안의 성화’에 있다. 사목 헌장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지상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수행될 때, 그 결과는 하늘나라에 그대로 반영된다. 세속의 활동은 하느님의 나라와 분리될 수 없다.”(사목 39항) 7. 결론: 깨어 있음의 신앙종말론적 신앙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기다림이다. 우리는 마지막 날을 예언하거나 계산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날을 매일의 충실함 안에서 준비하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묵시 3,20) 그분은 이미 매 순간 우리 문 앞에서 계신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나의 책임과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을 맞이하는 종말의 자리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그날은 먼 훗날이 아니다. 주님이 오늘 내 안에 오신다면, 그것이 나의 종말이요 완성이다.”(In Io. Ev. tract. 49,1) 김건태 신부님-복음을 증언할 때 [말씀] ■ 제1독서(말라 3,19-20ㄴ) 바빌론 유배지에서 귀환한 유다인 공동체는 평화와 행복의 시간을 기대했으나, 아직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신앙 또한 식어가 형식에 사로잡히기 일쑤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예언자 말라키는 소리를 높여 이스라엘은 굳건한 믿음과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의 날은 오고야 말 것이며, 이날 악인은 멸망하고 의인은 구원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제2독서(2테살 3,7-12) 주님의 날이 임박했다는 기대 속에 상당수의 데살로니카 신자들은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나약한 신앙 자세,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와 같은 자세를 질타하면서,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은 게으름 없이 매일 매일의 삶에 충실한 삶, 매사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삶이어야 한다고 애써 가르칩니다. ■ 복음(루카 21,5-19)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을 중심으로 세워진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자신들의 종교적 제도로 말미암아 폐쇄적 집단이 되어버린 유다교도들에 의해 버림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계시며, 이 버림은 결국 민족의 멸망을 초래하게 될 것임을 내다보십니다. 성전의 파괴와 함께 낡은 옛 세상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나, 새 세상을 맞아들이기 위해 제자들은 또한 갖은 반대와 박해에 직면하고 이를 감수해야 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새김] 우리 가톨릭 신앙인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은 선(善)으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뜻대로 구원되어 평화와 행복의 질서 속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믿어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말씀이 때로 거침없는 질타와 가혹한 응벌을 내용으로 할 때도, 구원을 위한 회개를 이끌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음을 직시하며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원의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그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상당수의 테살로니카 신자가 그러했듯이, 일상사를 소홀히 하거나 포기한 상태에서 문자 그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오늘 성경 말씀의 가르침은 분명 ‘아니다!’입니다. 주님의 날은 꼭 오리라는 믿음 속에(제1독서) 좌절과 포기의 삶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흐름을 바탕으로 매사에 더욱 충실한 삶(제2독서), 갖은 반대와 박해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삶의 자세로(복음) 그날을 준비해 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헛되이 내세우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혼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주님은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매사에 충실한 가운데 복음을 증언하려는 신앙 자세로 이 한 해를 살아왔는지 반성하며, 새로운 신앙의 한 해를 조심스럽게 준비해나가시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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