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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일 수원 교구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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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 오늘 이 집에 구원이!
키는 작았지만 자존심이 강했던 자캐오는 예리코의 세관장, 다시 말해서 로마 당국의 위임을 받아 국경 도시인 예리코 지방의 세관 업무를 총괄하던 공직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매우 부자였으며, 세관 업무에는 자주 비리가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유다인들로부터 공공인 죄인으로 취급되거나, 침략자인 로마 제국의 협조자라는 이유로 홀대받았던 사람이었으나, 하느님은 당신 성령을 보내 이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십니다.
아이들은 흔히, 그것이 나무든 건물이든, 높은 곳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기를 좋아합니다. 자캐오는 자존심과 사회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똑같은 행동을 취합니다. 우스꽝스럽게 보이거나 천박하게 취급될 수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이 이 사람을 사로잡아, 돌무화과나무에 오르게 합니다. 다른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성령의 활동에 민감한, 탁월한 예언자이신 “예수님은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십니다.” 자캐오의 마음 깊은 곳을 응시하시며, 그의 이름으로 자캐오를 부르십니다.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의 사명 전개가 자캐오의 집에 머물러야 함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다시 불러 모아야 할 사명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제 예수님은 눈먼 이를 치유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셨으며, 오늘은 죄인으로 취급되던 사람의 집에 머무시고자 하십니다.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이분은 메시아일 리가 없습니다. 정(淨)은 부정(不淨)과 함께할 수 없으며, 그럴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사명 수행 동안 종종 악표양의 원인 제공자처럼 행동하시며, 지금도 그렇게 인식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편, 회개에 대한 하느님의 호소에 응답할 때 동반되는 기쁨은 넘치고도 넘칩니다. 자캐오는 기쁨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며,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갚고자 하는 회개의 진정성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고 다짐할 때의 네 곱절은 율법이 명시하는 것 이상의 배상이며(탈출 22,3.6; 레위 5,21-24; 민수 5,6-7 등), 로마법에서는 명백한 절도 행위에만 해당하는 법규입니다. 이처럼 자캐오는 하느님의 넘치는 은총에 넘치는 선의로 화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캐오를 죄인으로 취급했던 군중을 향하시며, 자캐오가 회개에 대한 진정성과 관대함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임을 드러내고 있음을 천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설령 죄인이라 하더라도 당신을 받아들이는 그 자리에, 그래서 당신이 머무실 수 있는 그 자리에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분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자캐오가 세관장이었고 부자였다는 점에서 직업상 그러한 오해가 가능했을지 몰라도, ‘네 곱절’로 표현되는 그의 진정성을 감안한다면 분명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그에게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했던 것은, 주님이 그의 집에 머물러 구원을 베푸셔야 했던 것은 죄인 취급보다 더 가혹했던 사회적 냉대였을 것입니다. 자캐오를 영적인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냉대였습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부족한 점들을 주님께 고백하고 도우심을 청하는 한편, 내 차가운 시선이 이웃을 영적인 파멸로 몰아갔던 적은 없었는지 성심껏 살피고 회개하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에서 예수님과 세관장 자캐오의 만남을 전해 준다. 사람들의 멸시와 죄의 무게 속에서 살던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모습은, 구원이란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운 눈길에서 시작됨을 보여준다. 자캐오는 세관장이었고, 부와 권력을 가졌지만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손가락질당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군중은 자캐오의 눈을 가리는 죄와 편견의 장막이었지만, 그는 그 장벽을 넘어선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를 향해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죄인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자캐오는 기쁨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회심의 열매를 맺는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8절) 예수님은 곧바로 선포하신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9절) 구원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이루어진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자캐오는 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보았으나, 사실은 주님께서 먼저 자캐오를 보고 계셨다. 인간의 눈보다 먼저 닿는 것은 하느님의 눈길이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VII, 83) 성 아우구스티노도 회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Confessiones, XIII,1) 교리서 또한 구원의 은총은 하느님께서 먼저 다가오시는 은혜라고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으시며, 그분의 은총이 없이는 우리는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다.”(2001항) 우리도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자캐오처럼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님을 보기 위해 필요한 용기를 내야 한다. 또한 자캐오가 회심의 열매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사랑과 나눔의 행위로 이어져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주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집,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에 오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죄와 이기심의 군중을 떠나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도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9절)는 말씀이 선포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캐오처럼 용기 있게 주님을 바라보고, 회심의 열매로 나눔과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겠다. 아멘.
전삼용 신부님_당신은 올라갈 무화과나무가 있습니까?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랐습니다. 남들의 시선을 감수하고, 체면을 버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겠다'는 열망 하나로 나무에 올랐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에게도 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야 했던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습니다. 1946년, 36세의 아녜스 수녀(마더 데레사의 본명)는 이미 18년 차의 베테랑 로레토 수녀였습니다. 그녀는 캘커타 성 마리아 수녀원 부속 학교의 교장으로, 부유한 집안 소녀들에게 지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삶은 안락하고, 존경받았으며, '성공한' 수도자의 삶(군중 속의 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미 '싫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훗날 고백하기를, "안락한 수녀원 담장"과 "담장 밖 빈민가의 비참함" 사이의 거대한 괴리에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깊이 알고 싶었지만, 수녀원의 안전한 규칙과 일상 (자캐오를 막아선 '군중')이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적인 해답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1946년 9월 10일, 다르질링행 기차에 오른 이유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피정을 갈망하며 기차를 탔던 그 '노력' 자체가, 이미 일상의 안락함(군중)을 벗어나 주님을 만나고자 했던 그녀의 첫 번째 '돌무화과나무'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열망의 나무' 위에 올라가 있을 때, 예수님께서 지나가셨습니다. 기차가 캘커타의 빈민가를 덜컹거리며 지나칠 때,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영감이 아니라,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명확한 '명령'이었습니다. "나는 목마르다." (I Thirst.) 그 순간, 그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비로소 '진짜로' 본 것입니다. 그분은 깨끗하고 안락한 수녀원(군중) 안에 계신 분이 아니라, 가장 더럽고 버림받은 빈민가에 목마른 채 누워 계셨습니다. 하지만 진짜 '돌무화과나무'는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것과, 그분께 '내려가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그녀 앞에는 자캐오보다 더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군중', 즉 수녀원을 떠나는 것을 금지하는 엄격한 교회법과 전통이었습니다. 둘째는 '작은 키', 즉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한 명의 수녀라는 한계였습니다. 그녀가 올라야 할 두 번째 '돌무화과나무'는, 바로 '교회법과 전통의 벽을 넘어서는 끈질긴 순명'이었습니다. 그녀는 2년 동안, 안락한 수녀원에 머물면서도 매일 교황청과 대주교에게 편지를 쓰며 '떠나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미쳤거나, 교만해졌다"고 꾸짖었습니다 (자캐오를 꾸짖던 군중처럼). 하지만 그녀는 "주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열망 하나로, 가장 고통스러운 '기다림'과 '인내'라는 나무 위에 머물렀습니다. 마침내 1948년 8월, 교황 비오 12세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돌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젠 그녀의 가슴 속에 들어오셨고, 그녀는 자신이 이전에 추구하던 것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녀는 로레토 수녀원의 검은 수도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캘커타의 거리에서 가장 가난한 인도 여인들이 입는 1달러짜리 값싼 '파란 줄무늬 사리'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단돈 '5루피'(당시 환율로 약 100원)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빈민가'(자캐오의 집)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구원이 캘커타에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캐오를 만납니다. 그는 세관장, 즉 민족의 반역자요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그의 영혼은 지독히 가난했고 왜소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키가 작았다'(루카 19,3)고 말합니다. 이는 단지 신체적인 조건만이 아니라, 군중(세상)의 비난에 짓눌려 하느님을 볼 수 없었던 그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런 그에게 간절한 열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루카 19,3) 애썼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가지 거대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군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죄인이라 손가락질하며 길을 막아섰습니다. 둘째는 '작은 키'라는 자신의 한계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싶지만, 세상의 시선과 비난(군중)이 두렵습니다. "저 사람 너무 열심이야", "유난 떤다"는 말이 무섭습니다. 또한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성격이 소심해서", "죄가 너무 많아서"라는 내 안의 '작은 키' 때문에 주님을 볼 수 없다고 주저앉습니다. 자캐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중을 탓하거나 자신의 키를 원망하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루카 19,4) 이것이 핵심입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것. 이것은 상식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체면을 구기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예리코의 세관장이, 그 부자가, 체면도 버리고 옷이 찢어지는 것도 감수하며 나무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을 꼭 보고 싶어서"입니다. 이 나무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열망 때문에, 남들의 시선(군중)과 나의 한계(작은 키)를 기꺼이 뛰어넘는 '구체적이고 별난 노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모든 이는 이 '자기만의 돌무화과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저만의 '돌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 남들보다 예수님을 더 깊이, 더 생생하게 알고 싶었습니다.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마리아 발토르타의『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였습니다. 남들이 모두 비웃고 이단 시비까지 하던 그 책을, 저는 5년 동안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돌무화과나무'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려고, 남들이 하지 않는 그 '별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갈등했습니다. 지금 가는 길을 가야 할까, 아니면 제자의 길을 가야 할까? 그리고 자캐오처럼 이전에 추구하던 것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제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주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제 안에 사시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아무런 '돌무화과나무'에도 오르지 않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찾는다면서, 남들이 하는 만큼(군중)만 하고, 내 한계(작은 키) 안에만 머무른다면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돌무화과나무'는 무엇입니까? 남들보다 10분 더 바치는 아침 기도입니까? 남들이 꺼리는 봉사활동입니까? 아무도 안 알아줘도 매일 읽는 성경 한 장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당장 그 나무를 향해 달려가십시오. 체면을 버리고 그 나무에 오르십시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여러분을 올려다보시며,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아무개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전의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모시고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는 성모님과 같은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 '참으로 기쁜 소식!' 오늘 복음(루카19,1-10)은 '예수님과 자캐오', '예리코의 자캐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지나가실 때, 부자 자캐오라는 세관장이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고 싶어합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를 보려고 애썼지만 키가 작은 자캐오는 군중에 가려 예수님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캐오를 보시고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일어서서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19,8)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 이르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9-10)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인 예리코의 눈먼 이를 고쳐주신 말씀과 함께 너무도 기쁘게 들려옵니다. '구원에 이르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끊임없이 자비를 청하고, 끊임없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비를 청하고, 끊임없이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만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아니 매순간 부활합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확실하고도 분명한 구원의 길입니다.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시편73,2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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