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2일 (토)
(홍)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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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0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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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1-20 ㅣ No.186400

김건태 신부님_너를 찾아오신 때

 

이스라엘을 성지 순례하다 보면,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 올리브산 중턱에 ‘눈물’ 모양으로 건축된 작은 기념 성당 하나를 방문하게 됩니다. 경내 입구에 위치한 흰색 표지판에는 Dominus Flevit(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흔히 ‘눈물 성당’이라 부릅니다. 성당 내부 구조도 특이한데, 미사를 봉헌할 때 예루살렘을 내다볼 수 있도록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도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서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순례자들은 도성 가까이 이르자, 해오던 대로 시편 122편 ‘순례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집으로 가세. …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그러나 예수님은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다윗이 여부스족을 몰아낸 다음 수도로 삼고, 뒤를 이어 솔로몬이 성벽과 성전과 왕궁을 건축한 이래, 예루살렘은 정치적이며 민족적, 종교적인 중심지로 자리합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하느님의 거처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이 강조되면서 예루살렘의 신성불가침 사상이 싹트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상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성전에 머무신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하느님이 성전에 머무실 수 없다면,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성전은 한낱 인간이 세운 건조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언자들은 정의와 진리와 평화를 멀리하던 백성을 향해 일찍부터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어, 기원전 6세기 초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수많은 지도 계급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 오십 또는 육십 년에 걸친 처절한 바빌론 유배생활을 거쳤음에도, 크게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때가 되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현존은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 호소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를 거부하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결심으로 당신이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시게 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함으로써, 도성을 파괴로부터 구하시는 데 무력한 존재로 머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눈물을 흘리십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상태를 고집하는 이 양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되찾아 기쁨을 나누는 감정과 같은 모습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도성의 평화를 위해 노래하는 동안, 예수님은 백성, 특히 백성의 지도자들의 눈을 닫아 버린 오만과 자만을 애도하십니다. 이들은 결코 평화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파괴 예언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에 관한 세세한 점들을 기초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예고가 선포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해방을 선사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려 하시나, 사람들은 이 구원의 선물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살해할 것이며, 믿음이 아니라 불신의 열매를 거두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 진노의 심판은 더는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은 인간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지금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 역시 예루살렘의 주님들과 같은 모습을 고집한다면, 슬픔, 나아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마냥 부족한 존재이지만, 회개하여 하느님을 향하는 것 자체가 그분의 뜻임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 하루 하느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뜻을 살피며 채워나가는, 귀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9,41-44: 네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신다. 그분의 눈물은 단순한 인간적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평화의 때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데서 오는 구원의 아픔이다. 그 눈물은 단지 2천 년 전 한 도성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각자의 마음을 향한 주님의 눈물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42절) 평화(shalom)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누리는 충만한 삶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분의 초대를 거부했다. 예수님은 서기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성전과 도성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신다. 이는 하느님 은총의 때를 알아보지 못한 영적 파멸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4절) 즉, 하느님이 다가오시는데도 눈이 가려져 그것을 보지 못한 비극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다. 이는 그 도성이 파괴될 것을 아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의 구세주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10,113)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의 눈물을 해석하며 말한다. “주님의 눈물은 곧 하느님의 자비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울고 계신다. 우리가 죄 안에 있을 때 그분은 우리보다 더 깊이 우리의 비참함을 아신다.”(Sermo 362,1) 즉, 주님의 눈물은 심판의 눈물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사랑의 눈물이다. 사목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인류 역사의 중심과 정점은 주님의 파스카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은총의 때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다.”(10항) 교리서는 “하느님은 끊임없이 인간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자유롭게 응답할 것을 기다리신다.”(2567항)고 가르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네 삶 안에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있는가?” 예루살렘이 눈이 가려 메시아를 거부했듯이, 우리도 일상에서 하느님의 방문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우리가 눈을 감고 있으면 은총의 때는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눈을 열어 받아들이면 우리의 삶은 참 평화로 충만해진다. 
 

예루살렘을 보며 흘리신 주님의 눈물이 더 이상 우리를 향한 눈물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매 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응답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하도록 해야 한다. “주님, 저희 눈을 열어 주시어, 평화를 가져오는 길을 알아보게 하소서. 은총의 때를 놓치지 않고, 당신의 초대에 응답하여 늘 깨어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전삼용 신부님_무인도에서 4년을 버티게 한 단 하나의 습관 

 
 
찬미 예수님!
우리는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대니얼 디포가 완전히 창작해낸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알렉산더 셀커크(Alexander Selkirk)'라는 스코틀랜드 항해사의 실제 체험이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와 '알렉산더 셀커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크루소는 '난파'라는 사고로 무인도에 갇혔지만, 셀커크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무인도에 내렸습니다. 
 
1704년, 셀커크는 '싱크 포르(Cinque Ports)'라는 배의 항해사였습니다.
그는 성격이 거칠고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낡아서 곧 침몰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선장과 대판 싸운 뒤 "이 배를 타고 가느니 차라리 무인도에 내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칠레 연안에서 670km 떨어진 '마스 아 티에라(Más a Tierra)'라는 무인도에 정말로 버려졌습니다.
그는 곧 다른 배가 자신을 구조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그곳에서 그가 보낸 시간은 무려 4년 4개월이었습니다. 
 
그가 섬에 내렸을 때 가진 것은 옷가지, 칼 한 자루, 도끼, 그리고 '성경 한 권'뿐이었습니다.
첫 몇 달간 그는 해안가에 머물며 절망적인 고독과 싸워야 했습니다.
밤마다 해안으로 몰려나와 울부짖는 수천 마리의 바다사자 떼 소리는 그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오늘 복음 속 예루살렘처럼, 완벽한 혼돈과 멸망의 공포(세상의 혼란) 한가운데에 던져졌습니다. 
 
그를 미치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규칙적인 일과'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과의 중심에는 '아침'과 '저녁'의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해 준 우즈 로저스(Woodes Rogers) 선장에게 훗날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그 섬에서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하고, 성경을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그는 섬에 달력을 만들어 날짜를 확인하며, 특히 '주일'에는 모든 노동을 멈추고 온전히 하느님과
만나는 '방문의 때'로 지켰습니다.
그는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라는 매일의 자기봉헌을 통해, 무인도의 야만성이 자신의 내면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영적 방어벽을 쌓았습니다. 
 
1709년 2월 2일, 마침내 우즈 로저스 선장이 이끄는 배가 그를 발견했을 때, 선원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4년 4개월을 홀로 지낸 사람이 당연히 미쳐 있거나 언어조차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셀커크는, 짐승 가죽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문명인보다
더 평온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즈 로저스 선장은 1712년에 출판한 자신의 항해 일지 『세계를 일주한 순항』에 이 놀라운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셀커크)는... 읽고, 시편을 노래하고,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 고독 속에서 자신이 이전에 살았던 그 어떤 삶에서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셀커크는 세상의 모든 평화라고 여기던 것들이 사라진 무인도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
'하느님'(어머니)을 만나는 '방문의 때'를 지켰습니다.
그는 그 규칙적인 기도를 통해 '평화'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장소'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하다가 런던 탑의 차가운 독방에 갇혔습니다.
그의 아내 앨리스가 찾아와 "대체 왜 고집을 부리십니까? 여기 감옥보다 우리 집이 더 좋지 않습니까?"라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토마스 모어는 평온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감옥과 내 집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여기도 하느님께서 계시고, 내 집에도 하느님께서 계시오."
그는 어떻게 감옥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그의 평화는 '집'이나 '정원'(장난감)에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평생을 지켜온 '규칙적인 기도 시간'(아침/저녁)을 단 하루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때'를 놓치지 않았기에, 그는 왕의 위협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진은 현대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무엇이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안정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연구했습니다. 수많은 변수 속에서 가장 강력한 요인은 '돈'이나
'학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규칙적인 가족 저녁 식사'였습니다. 
 
아이에게 평화는 학교 등수나 스마트폰이 아닙니다.
부모이고 부모와의 규칙적인 만남입니다. 
일주일에 단 몇 번이라도, 정해진 시간에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규칙적인 만남'을 가진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훨씬 안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이 '저녁 의식'은 단순히 밥을 먹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루의 혼란을 마감하고, 가족이라는 '안식처'(어머니)로 돌아와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평화를 확인받는 '방문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왜 우셨습니까?
"네가 하느님께서 너희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19,44) 
 
예루살렘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규칙적인 의식'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렉산더 셀커크와 달리, 그 제물(장난감)에만 매달려 정작 그들을 찾아오신
'하느님'(어머니)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오시는 때'에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 로마의 압제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세상'에게 평화를 구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길을 너 홀로 몰랐구나" 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기다릴 때 언제 돌아올지만 알아도 평화를 얻습니다.
평화는 때를 아는 자만의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하느님께서는 하루의 시작을 '저녁'으로 보셨습니다.
하루의 혼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저녁 기도'로 하느님을 만나 평화를 얻고, '아침 기도'로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 우리 신앙의 리듬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아.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 의식이 필요해."
'규칙적으로 만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준비시킵니다. 
 
다니엘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예루살렘 쪽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 아침-점심-저녁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평화로웠습니다.
세상의 장난감이 주는 헛된 평화에 속지 마십시오.
매일 정해진 '아침'과 '저녁'에, 나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의식'을 회복하십시오.

그 '때'를 아는 사람만이 참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연중 제33주간 목요일>(11.20)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19,42ㄱ)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자!' 
 
오늘 복음(루카19,41-44)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19,42) 
 
복음에서 구체적인 표현으로 언급되고 있는 예수님의 눈물은 '오늘 복음'과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흘리신 눈물'(요한11,28-37)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11,35)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19,44)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평화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는데,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루살렘이 평화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 예수님 예고대로 예수님 부활과 승천 후의 때인 기원 후(AD) 70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알아보는 것'이고, '구원과 부활에로 우리를 이끄는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잡고 평화이신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가,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성사적 시각(영적인 눈)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 독서는 마카베오서의 말씀인데, 모진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전합니다. 곧 '엘아자르의 믿음(2마카6,18-31/화)과 '일곱 형제를 둔 어머니와 그 아들들의 믿음'(2마카7,1.20-31/수)과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의 믿음'(1마카2,15-29/목)을 전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되어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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