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4일 (일)
(자)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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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 가해, 자선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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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07:47 ㅣ No.186830

[대림 제3주일 가해, 자선주일] 마태 11,2-11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가톨릭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대림시기의 세번째 주일을 ‘가우다떼 주일’이라고 불렀는데, 라틴어인 ‘가우다떼’는 “기뻐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대림 제4주일이 지나면 곧 다가올 우리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림 3주때부터 미리 기뻐하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몸소 사람이 되어 오시는 주님께 대한 감사와 기대, 희망과 바람이 큰 것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힘을 내어 남은 대림 시기의 후반부를 기쁘게 지내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더 착실히 하자고 격려하고 권고하는 것이 오늘 ‘가우다떼 주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메마른 땅인 ‘광야’를 통과하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며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권고합니다. 그의 권고대로 참된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기쁨이 무엇인지 그 본질부터 알아야겠지요. 기쁨은 첫째로 소유를 통해 느끼는 만족감입니다. 갖고 싶었던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 흡족하다고 느끼는 겁니다. 기쁨은 둘째로 성취를 통해 느끼는 뿌듯함입니다. 오랫동안 염원하는 일을 마침내 이루었을 때 그런 일을 해낸 자신이 자랑스럽고 뿌듯한 것이지요. 기쁨은 셋째로 인격적 만남과 친교를 통해 느끼는 충만함입니다.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이를 실제로 만나 그와 깊은 인격적 친교를 이루면 항상 한 구석이 허전했던 나의 마음이 깊은 곳에서부터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이 세가지 기쁨 중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기쁨은 인격적이면서 동시에 성취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를 드디어 만나게 되는 기쁨을 이야기하니 인격적인 기쁨이고, 그 메시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과 영광이 이루어지게 됨을 이야기하니 성취적인 기쁨이지요. 그 기쁨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 얻는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기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기쁨을 얻기까지 길고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일단 그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면 우리 영혼이 저 깊은 데서부터 충만한 행복으로 차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런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시는 ‘메시아’라는 점에 의구심이 생긴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런 질문을 하지요.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을 두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선포했던 그가,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보고 오히려 자신이 그분께 세례를 받아야 한다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던 그가 왜 그런 의구심을 품게 되었을까요? 그건 아마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이 자신이 선포했던 ‘준엄한 심판자로서의 메시아’와 달랐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도끼가 나무 뿌리에 닿아 있을 정도로 심판이 임박했다고 선포했지만, 예수님은 3년 이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하느님의 자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타작 마당에 펼쳐둔 곡식 중에서 쭉정이를 가려 타는 불 속에 던져버리는 무서운 심판을 선포했지만, 예수님은 열매 맺을 때까지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그대로 두시는 하느님의 인내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감옥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하니 마음이 급해져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 것이겠지요. 우리도 요한처럼 주님께 의구심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을 청해도 이루어주시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좋은 일이 생기기는 커녕 오히려 더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겪게 될 때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께 의구심을 품지 않고 그분을 온전히, 끝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광야로 나간다는 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하느님을 만나 그분과 친교를 맺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고 노력하는 것, 즉 신앙생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때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신앙생활 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탐욕은 원하는 만큼 채운다고 해서 만족되지 않고 우리를 계속해서 더 큰 갈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탐욕만 쫓다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참된 진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고운 옷’을 걸치고 왕궁에서 호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 즉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신앙생활 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하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부귀영화는 뱀이나 전갈의 ‘독’과 같아서 그것을 많이 취할수록 죽음과 멸망의 구렁에 깊이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 하는 우리는 자신에게 해로운 것에 욕심부리며 집착하지 말고, 우리에게 정말 유익하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청해야겠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지향으로 신앙생활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는 세례자 요한을 무시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과 영광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폄훼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써, 예수님과 함께 시작될 하느님 나라의 ‘입구’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가 대단한 인물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써 우리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도록 이끄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 자체에 집중하지 말고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하느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참된 기쁨과 영광을 바라보며 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며 사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라야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옳고 그름, 효율과 결과를 기준으로 삼지만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되는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생각하며 그렇다면 기꺼이 순명하고 아니라면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주는 참된 기쁨은 이처럼 단순하고 분명하게 사는 이들이 누립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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